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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ㅣ 창비시선 173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평점 :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2쪽)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그 여자네 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알싸하게 아파온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 박완서의 동명 소설도 보인다. 박완서 선생이 이 시를 읽고는 반해서 길이가 만만찮은 시 전체를 소설의 앞머리에 인용했다. 일제의 강제 징병과 정신대 징발 때문에 결국 헤어져야만 했던 만득이와 곱단이의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슴아슴 피어난다.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4쪽)
시에 등장하는 그 여자네 집은 밀착된 풍경이 아니라 적어도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두고 떨어져 바라본 풍경이다. 그 거리로 인해 그 여자와 화자의 관계는 계속 짝사랑 특유의 떨림을 유지한다. 지금은 가까이 없기에 더욱 그리운 떨림. 사랑이란 그 지독한 열병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런 지독한 열병 같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에 대한 따스한 사랑, 대자연에 대한 더없이 큰 사랑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사랑을 모르므로 어떤 대상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농부와 시인」 중에서, 79쪽)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사랑한다. 그의 삶에서 섬진강을 빼어놓고 말할 수 없듯이 그의 가족, 짝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은 그의 시이자 삶이다.
강물에 가네
나는 강물에 가네
저문 강물 저물어 나도 가네
강가에 서서
강물을 보네
강물을 보네
아, 이 고요로움을 한움큼 길어
사랑하는 님에게 드리고 싶네
서편에 뜬 붉은 구름이랑 같이 드리고 싶다네
내 깊은 데서 아직도 타는 이 그리움, 이 사랑을
아, 산봉우리 젖네
저 푸르른 솔잎
가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네
물에는 물에만 있네
(‘나는 집으로 간다’ 중에서, 34~35쪽)
시인의 마음에서도 섬진강은 흐르고 흐른다. 그 섬진강은 그저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는 강이 아니리라 느끼고 겪어야 하는 강이다. 그 강가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섬진강이란 풍경을 두고 느끼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중에서, 66~67쪽)
사는 일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 한끝을 흐르는 강물에 적셔보고 싶다. 강이라면 저리 천천히 흐르며 때때로 고이기도 해야 수면 위에 비진 세상을 볼 수 있다. 기슭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와 뒤섞인 제 울음소리도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강물처럼 우리도 천천히 지나가며 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가늠해본다.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 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강 끝의 노래’ 중에서, 68~69쪽)
김용택 시인의 시에 있는 섬진강은 당신을 못잊어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과 같이 편안하다. 후미진 하동 포구의 갈대들은 지나가고 지나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 만나며 헤어지며 흘러가는 강물의 몸짓으로 섬진강의 갈대숲은 기다리며 잊혀가는 세월의 빛으로 그렇게 강인하게 흔들린다. 그런 갈대를 만날 수 있다면 겨울 하동은 춥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