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현 상황은 과연 자연스러운 전환기의 모습일까, 아니면 심각한 사회 해체의 과정일까? 어떤 때는 지나친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인간의 의식 구조보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사회가 급격히 변동하는 과정 속에는 어느 정도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가치 합의와 상호 신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행동을 예사롭게 여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전제되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사회 속에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회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의 부당한 요구나 권리 침해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시민의식이 형성되었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기주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 속에서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전념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부당한 행태를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의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개인주의의 성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사회공동체의 과제에 협력하지도, 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냉전은 끝났으며, 21세기에 인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후쿠야마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최종 종착지로 실현되면 역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멈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선택지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신이 《역사의 종말》을 썼을 때,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즉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지 않는 한 역사의 종말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앞으로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장기간 군림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희망을 받아들일 때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은 공산주의가 한물간 체제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정하기에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극단적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사회를 바라보며 이것을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인류로선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자유 시장경제의 장점만 부각하는 건 ‘희망 고문’일 뿐이다.

 

서평의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필자의 염려와 《역사의 종말》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한 이유는 유발 하라리《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약칭 ‘21가지 제언’)의 서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미리 하기 위해서였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혼미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는 책의 서문에 자유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12쪽)

 

 

이 책은 단순히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그저 그런 미래학적 예언서는 아니다. 저자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근대 세계로 향하면서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사람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됐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가 불변의 진리라든가, 완벽한 사상인 것처럼 믿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21가지 제언》의 부제를 빌려서 이 책의 주제를 단 한 줄로 표현하자면, ‘더 나은 자유주의 시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로 볼 수 있겠다. 하라리는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자유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부정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를 제안한 마르크스의 ‘처방’은 틀렸어도 그의 진단에 주목하듯이, 자유주의 역시 여러 모로 한계가 있어도 새롭게 고쳐 나갈 수 있다면 지금도 유효하다.

 

자유주의와 인류는 ‘기술적 도전’과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적 도전’은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알고리즘의 결정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며,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정치적 도전’이란 민족주의의 과잉과 종교 근본주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나는 국제적 분쟁이다. 민족주의자와 종교 근본주의자는 국가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나 핵전쟁 같은 복잡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통해서 해결하기 어렵다. 사회 분위기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만들어지는 가짜 뉴스와 (보이지 않는) 테러의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에 속절없이 갇힌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라리는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나에 대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라는 주체는 합리적이지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살면서 느끼는 나쁜 마음, 슬픈 마음 등 내면의 고통을 용감하게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관찰’하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관찰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환경이나 타인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하라리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제시한 21가지 제언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상식적인 ‘제안’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푸짐한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것처럼 늘어놓았는데,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종이’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21가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음식 가짓수는 많은데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식탁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내린 음식 '처방'은 구체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종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에 먹을 만했던 것은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서문이었다. 눈으로 먹고 난 뒤에 자유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 메뉴가 아쉽다. 먹을 게 별로 없는 마당에 마지막에 ‘명상’이라니. 책을 다 읽어도 다시 허기를 지게 만드는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프리쿠키 2018-11-13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루스 박사님 멋집니다. 짝짝짝!!

cyrus 2018-11-14 12:18   좋아요 0 | URL
계속 박사님 소리 들으니까 부담스럽네요.. ㅎㅎㅎ 그런데 ‘Sl루스’를 거꾸로 부르면 안 되겠어요. ‘스루IS’가 되는데, 이슬람 테러 집단 이름처럼 보이네요. ^^;;

2018-11-14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4 12: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ㅎㅎㅎㅎ 저자가 진중하게 미래에 대한 고민을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명상을 언급해서 김이 샜습니다.. ^^;;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철학자들은 여자의 지적 능력을 남성보다 취약한 것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신의 책을 통해 선천적인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성은 영혼의 원리가 없는 불완전한 남성이었다. 여성에 대한 종교의 입장도 철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동아시아, 2017)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

 

 

 

추의 역사(열린책들)을 쓴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악마와 마녀를 추하게 묘사된 도상에 인간의 어두운 본능을 억압하여 인간을 종교적으로 일깨우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중세에는 성기가 수치심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간주했는데, 이런 사회에선 출산과 무관한 성행위를 하는 여성은 마녀로 의심받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클리토리스를 마녀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악마에게 젖을 물린다는 마녀의 유두가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 [품절] 기 베슈텔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 2004)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는 서구를 지배한 가톨릭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조작하고 왜곡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여성 차별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가톨릭에서 여자는 마녀, 매춘부, 성녀, 바보 등 네 범주로 분류된다. 가톨릭이 생각하는 마녀는 악마와 결탁하여 사악한 주술을 부리는 존재이다. 지배자의 종교가 된 가톨릭은 마녀사냥을 통해 다른 종교적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교황청은 문서까지 만들어 마녀사냥을 허용했다. 매춘부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음란한 여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의 음란함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마녀로 연결된다. 가톨릭에서 여성은 마녀와 성녀로 구분되는 대립적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 뿌리는 인류 타락의 기원인 하와(Hawwāh)와 인류 구원의 어머니 마리아(Maria)에 있다. 문제는 마녀와 성녀를 구분하는 교회의 기준이 자의적이었다. 이렇다 보니 성녀로 추앙받던 사람이 마녀로 몰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바보는 가톨릭이 선호하는 부류의 여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하와의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희생할 준비가 돼 있고, 똑똑하지 않으며, 집안일에 충실한 정숙한 여성이다. 여자에게 구원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게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 슐람미스 샤하르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나남출판, 2010)

 

 

 

슐람미스 샤하르(Shulamith Shahar)는 중세 전성기인 12세기부터 마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의 여성을 조사함으로써, 중세 여성에게 적용된 위계적 질서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살핀다. 샤하르는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위계적 질서와 기준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 중세 여성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중세 여성 내부에서도 계층 및 신분에 의해 다른 경험을 하므로 각각의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수녀가 될 수 있는 여성은 귀족 출신의 여성이었으며 수도원장이 되면 수녀원에 속한 땅을 소유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여성은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왔음에도 중세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했다. 여전히 중세 여성의 삶을 제약하는 걸림돌은 많이 남아 있었고, 상층 계급의 여성들도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그래서 샤하르는 중세의 모든 여성을 성직자, 전사, 농민다음 아래에 놓인 4신분으로 본다. 그녀의 책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나남출판)여성신분/계층으로 이중 차별받는 중세 여성의 삶을 재구성한다.

 

 

 

 

 

 

 

 

 

 

 

 

 

 

 

 

 

 

* [품절] 거다 러너 왜 여성사인가(푸른역사, 2006)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출신 역사학자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늘 타자였고 '주변인'이었다. 그녀는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을 주변인으로 지칭하면서, 여성사를 젠더, 인종, 계급 등 모두가 얽혀 유기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성이 겪는 차별은 다중적이고 다양하게 얽혀 있다. 여성사의 재구성에서 역사가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대 서사의 정교한 재구성이다. 여성 사이의 차이, 그래서 생겨날 수 있는 서로 다른 정체성과 억압 문제 등 결국 여성사는 이런 복잡한 차이들을 어떻게 역사로 기록해야 할 것이냐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야 한다. 나는 여성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사는 젠더는 물론 인종, 계층, 섹슈얼리티, 장애 등 다양한 기준에 의해 억압받은 주변부의 여성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학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과 놀라운 반전. 추리소설의 묘미이다.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동참하게 만드는 추리소설은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읽을거리다. ‘추리’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탐정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강하지만 사실 탐정 추리물은 사라진 지 오래다. 현대 추리소설은 역사, 의학, 법정 스릴러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작가와 독자의 두뇌 싸움이라는 점이다. 작가는 끝까지 독자를 속이려 하고 독자는 작가가 정교하게 설치한 트릭(trick)에 속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것이 수백 년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아니 변할 수 없는 추리소설만의 매력이다.

 

추리소설은 근본적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기 위한 소설이며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추리소설은 고전일수록 입문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추리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고전 탐정 추리물에 익숙한 독자들은 책을 선택하는 데는 고민이 생긴다. 작품성이 좋다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끔찍하고 잔인한 내용을 싫어하는 독자가 사이코 스릴러를 읽거나, 영화처럼 빠른 전개를 원하는 독자가 차분하게 진행되는 안락의자 탐정 추리물을 보고 있는 것은 고역일 것이다. 아직 추리소설에 맛을 들이지 못했거나 장편을 읽을 만한 시간 혹은 참을성이 없는 분들에게는 특정 작가가 쓴 단편집이나 여러 작가의 글을 모은 단편 선집을 권한다.

 

 

 

 

 

 

 

 

 

 

 

 

 

 

 

 

 

 

* [절판] 엘러리 퀸 엮음 《미니 미스터리》 (청년사, 1996)

 

 

 

 

《미니 미스터리》(청년사)는 총 51편의 초 단편 추리소설이 실린 선집이다. 엽편 소설(손바닥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분량이 아주 짧다. 몇몇 작품은 예상치 못한 트릭과 반전으로 독자들의 허를 찌른다. 또 나뭇잎처럼 작은 지면 속에 인간 내면의 악의와 어둠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예리한 통찰, 촌철살인의 기지와 해학도 있다.

 

 

 

 

 

 

이 책은 미국의 추리작가 엘러리 퀸(Ellery Queen)이 1969년에 엮은 추리소설 단편 선집이다. ‘엘러리 퀸’은 추리소설을 쓰는 사촌 형제 프레데릭 대니(Frederic Dannay)와 맨프레드 리(Manfred Lee)의 필명이자, 작품 속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이름이기도 하다. 1941년에 퀸은 우수한 단편 추리소설과 작가들을 소개하는 정기간행물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EQMM)>이다. 퀸은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단편 선집 형태로 편집하여 정기적으로 출간했다. 《미니 미스터리》는 열세 번째 ‘EQMM 선집’이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최초의 미니 미스터리

탐정업의 기원 (뉴턴 뉴커크)

 

 

미니 범죄소설

백만에 하나의 우연 (새뮤얼 홉킨스 애덤스)

살아 있는 팔찌 (로버트 블록)

웨딩드레스 (루이스 브롬필드)

심문 (마크 코널리)

목사의 오명 (제임스 굴드 커즌스)

연설 (에드워드 존 던세이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앤서니 길버트)

위대한 사기꾼 칼메신 (제럴드 커쉬)

팜베 세랑의 한계 (러디어드 키플링)

표범 남자 이야기 (잭 런던)

신용 제일 (필립 맥도널드)

최선책 (페렌츠 몰나르)

죽느냐 죽이느냐 (오그던 내쉬)

죽어가는 배우 (로버트 네이선)

양심 (엘머 라이스)

정말 있었던 이야기 (딜런 토머스)

 

 

미니 미스터리

유령의 집 (올리버 라 파지)

어느 노인의 죽음 (아서 밀러)

도브 덜셋의 통찰력 (크리스토퍼 몰리)

 

 

미니 클래식

절묘한 변호 (작가 미상)

산초 판자의 명판결 (미겔 데 세르반테스)

자장가 (안톤 체호프)

장갑 한 켤레 (찰스 디킨스)

어머니의 약속 (기 드 모파상)

정의의 비용 (기 드 모파상)

나의 회중시계 (마크 트웨인)

개와 말 (볼테르)

 

 

미니 셜록 홈즈

파라돌의 비밀 주머니 사건 (존 딕슨 카)

아담과 이브의 실종사건 (로건 클렌더닝)

탐정의 정체 (마거릿 노리스)

 

 

미니 탐정소설

핀치벡 로켓 사건 (에릭 엠블러)

서명된 살인 (로렌스 블록맨)

너무 쉬운 범행 (조지 하먼 콕스)

강변의 범죄 (에드먼드 크리스핀)

살인을 위한 메뉴 (C. P. 도넬)

다운셔의 공포 (앤드류 가브)

찻집의 암살자 (마이클 길버트)

시카고의 밤 (벤 헷트)

20년 후 (오 헨리)

애플비 경감의 첫 번째 사건 (마이클 이네스)

살인의 향기 (프랜시스 & 리처드 로크리지)

비글의 코 (아서 포지스)

각설탕 (엘러리 퀸)

토요일 밤의 살인 (패트릭 퀜틴)

말을 삼킨 사나이 (크레이그 라이스)

런던 야화 (마저리 샤프)

산타클로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렉스 스타우트)

마술처럼 사라지다 (줄리안 시먼스)

결정적인 단서 (앤소니 바우처)

 

 

최후의 미니 미스터리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탐정 이야기, 또는 머리카락 한 올이 갈라놓은 운명, 또는 초 단편 살인 미스터리 (스티븐 리콕)

 

 

 

국내에 다른 번역 작품(단행본)이 있는 작가 :

로버트 블록, 러디어드 키플링, 잭 런던, 로버트 네이선[주1], 딜런 토머스[주2], 아서 밀러[주3], 크리스토퍼 몰리[주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안톤 체호프, 찰스 디킨스, 기 드 모파상, 마크 트웨인, 볼테르, 존 딕슨 카, 에릭 엠블러[주5], 오 헨리, 엘러리 퀸, 패트릭 퀜틴[주6], 크레이그 라이스[주7], 렉스 스타우트[주8], 줄리언 시먼스[주9]

 

 

 

 

 

 

 

 

 

 

 

 

 

 

 

 

 

 

 

 

 

 

 

 

 

 

 

 

 

 

 

 

 

 

 

 

 

 

 

 

 

 

 

 

 

 

 

 

 

 

 

 

 

 

* [품절] 《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책읽는섬, 2016)

* 《세계 추리 걸작선 2》 (한즈미디어, 2013)

* 《SF 명예의 전당 1 : 전설의 밤》 (오멜라스, 2010)

* [절판] 《대통령의 미스터리》 (산다슬, 2007)

*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 (황금가지, 2005)

* [품절] 《마니아를 위한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도솔, 2002)

* [No Image, 품절] 《세계 공포 초특급》 (명지사, 1995)

* [절판]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1》,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2》 (명지사, 1993)

* [No. Image, 절판]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모음사, 1992)

 

 

 

 

 

 

 

 

 

 

 

※ 단편 선집에 다른 작품이 수록된 작가 :

새뮤얼 홉킨스 애덤스(《대통령의 미스터리》)

로버트 블록(《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 외)

제임스 굴드 커즌스[주10](《헤밍웨이 죽이기》)

제럴드 커쉬(《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1》)

러디어드 키플링

잭 런던

필립 맥도널드(《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1》)

아서 밀러(《헤밍웨이 죽이기》)

안톤 체호프

찰스 디킨스

기 드 모파상

마크 트웨인

존 딕슨 카(《마니아를 위한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외)

에릭 앰블러(《마니아를 위한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로렌스 블록맨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1》 외)

에드먼드 크리스핀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오 헨리

프랜시스 & 리처드 로크리지[주11] (《세계 공포 초특급》)

엘러리 퀸

패트릭 퀜틴 (《에드가상 수상 작품집 2》)

크레이그 라이스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렉스 스타우트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2》)

앤소니 바우처 (《SF 명예의 전당 1 : 전설의 밤》)

 

 

 

 

Trivia

 

* 《미니 미스터리》의 역자는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시리즈를 번역한 김석희 씨.

 

 

 

 

 

 

 

 

 

 

 

 

 

 

 

 

 

* 『산초 판사의 명판결』(미겔 세르반테스)과 『개와 말』(볼테르)은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각각 《돈키호테》와 《돈키호테》와 《자디그》에 있는 내용이다.

 

* 『백만에 하나 우연』(새뮤얼 홉킨스 애덤스), 『목사의 오명』(제임스 굴드 커즌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앤서니 길버트), 『최선책』(페렌츠 몰나르) 등 네 편의 단편소설은 《존 딕슨 카를 읽은 사나이》 (모음사)에 실려 있다. 자세한 내용은 리뷰 참조(http://blog.aladin.co.kr/haesung/7577633).

 

 

 

 

 

 

[주1] 미국의 소설가(1894~1985), 대표작: 《제니의 초상》 (문예출판사) 

[주2]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삽입된 시를 쓴 영국의 시인(1914~1953).

[주3] 미국의 극작가(1915~1995).

[주4] 미국의 소설가(1890~1957).

[주5] 알라딘에 에릭 ‘엠’블러, 에릭 ‘앰’블러로 알라딘에 검색 가능함.

[주6] 미국의 추리 작가(1902~1984), 대표작 : 《두 아내를 가진 남자》 (해문)

[주7] 미국의 추리 작가, 라디오 방송 작가(1908~1957), 대표작 : 《스위트홈 살인사건》 (해문)

[주8] 미국의 추리 작가(1886~1975), 대표작 : 《요리사가 너무 많다》 (엘릭시르)

[주9] 영국의 시인, 추리 작가, 평론가(1912~1994). 추리소설의 역사를 다룬 《블러디 머더》 (을유문화사)를 썼음.

[주10] 미국의 소설가(1903~1978). 1949년 퓰리처상 수상.

[주11] 미국의 부부 작가. 남편 프란세스(1896~1963)와 아내 리처드(1898~1983). 1960년에 미국추리작가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 16세기 중남미 정복과 관련한 유럽인의 양심선언, 북스페인 라틴총서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 지음, 최권준 옮김 / 시타델퍼블리싱(CITADEL PUBLISHING)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아이티는 1492년 인도 항로를 찾아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Columbus)가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에서 발견한 땅 중 하나이다. 이 섬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콜럼버스 일행은 에스파냐(스페인)의 영토라는 의미가 담긴 ‘에스파뇰라(Española)로 이름 붙였다. 이 섬에 당도한 에스파냐의 정복자(conquistador)들은 수백 명의 군대와 개를 동원하여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의 목표는 오직 금이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옮긴 전염병 때문에 거의 멸종됐고, 정복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강제로 끌고 와 금 채굴에 나섰다.

 

정복자를 ‘항해가’ 또는 ‘모험가’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남다른 모험 정신을 가진 자, 용기 있게 떠나는 자, 광대한 꿈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야심만만한 꿈은 잔인한 정복욕이 되었다. 정복자들은 무자비하게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금을 약탈했으며 토착 문명을 파괴한 자리에 자신들의 문명을 주입했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발견(또는 관찰)하는 대항해 시대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발견과 정복은 결국 타인의 땅을 침입하여 빼앗는 모험이며, 대항해 시대의 모험은 본질적으로 침입과 약탈의 습성을 닮았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의 식민지 정복은 신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 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이었다.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야만’은 발견된 것일까. 약탈 행위와 원주민 학살이 진정 그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문명화를 위한 사명’ 때문이었을까. 콜럼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라스 카사스 신부(Bartolomé de Las Casas)는 일찍이 문명이 남긴 땅의 상처를 보듬으며 정복자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를 규탄했다. 그가 쓴 《인디아스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는 에스파냐 정복자와 군인들의 잔인한 만행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을 인도의 일부, 즉 인디아스(Indias)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카리브해 쪽 지역을 서인도, 진짜 인도를 동인도라고 불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항로 덕분에 서인도 제도는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반면에 원주민들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는 비극의 무대였다.

 

라스 카사스의 책은 단적으로 말하면 에스파냐의 카리브해 정복사가 아니라 카리브해 원주민들의 피착취사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살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미개하여 이성으로는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사리 분별력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야만인들’에게 우월한 문화를 강제로 부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원주민의 권리와 정체성을 둘러싼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식민주의적 관점은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복 사업과 식민지 통치 정책을 놓고 벌어졌던 ‘라스 카사스-세풀베다 논쟁(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의 인문주의자 세풀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는 유럽인의 원주민 정복을 지지했다.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므로 그들이 태생적으로 노예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라스 카사스는 직접 서인도 제도의 섬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는 에스파냐 기독교인들의 만행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기독교인들은 말을 타고서 그들의 칼과 창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괴상한 잔혹함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빠냐인들은 마을로 들어가서 마치 우리에 갇힌 어린 양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어린이, 노인, 임산부, 아직 배를 가르지 않은 산모도 내버려두지 않고 공격하였습니다. 에스빠냐인들은 누가 단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는지 혹은 말뚝으로 머리를 자를 수 있는지 창자를 들어내는지 내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젖을 먹고 있는 젖먹이를 두 발을 잡고서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떼어내어 바위에 머리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뒤로 강에 던지고서는 웃고 조롱하면서 어서 발부둥치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갓난아이들을 그 어머니와 함께 칼로 찔렀습니다. 구세주와 12사도를 기념하여 거의 땅에 발이 닿도록 13개씩 교수대를 설치해놓고 장작에 불을 지펴 산 채로 태워 죽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몸을 마른 짚과 함께 묶고는 불을 질러 태웠습니다.

 

(『에스빠뇰라 섬에 대해』 중에서, 23쪽) 

 

 

에스파냐인들의 ‘원주민 씨 말리기’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믿음을 강요했고,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복음과 총칼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탐욕 앞에 공존은 없었다. 사실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에는 서구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인에겐 새로운 대륙이지만, 그 땅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전통과 문화를 가꾸며 살아왔다. 유럽인들은 십자가와 총포를 들고 땅에 ‘상륙’했지,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라스 카사스의 책은 유럽 중심의 잘못된 세계관과 편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항해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1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3 08:15   좋아요 0 | URL
그렇죠. 라스 카사스 신부가 유럽의 식민지 약탈 문제를 공론화해도 정복자들은 침략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어요.
 
얼굴은 예술이 된다 - 셀피의 시대에 읽는 자화상의 문화사
제임스 홀 지음, 이정연 옮김 / 시공아트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자화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화가의 의도, 구성 방식 등 여러 사항이 있지만,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상투적이지만, 그냥 천천히 하나하나씩 세심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자화상에는 화가의 기술적 숙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성격이나 관심 그리고 화가가 속한 한 시대의 풍경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자화상은 화가 개인의 얼굴이고, 역사이고, 기억이다. 화가가 살아온, 살아낸 자취들로 자욱하다. 따라서 자화상은 책이다. 《얼굴은 예술이 된다》는 예술가의 ‘얼(spirit: 정신)과 ‘굴(form: 형상)을 담는 미적 표현으로 예술가의 자화상에 초점을 두고, 중세부터 시작된 ‘셀피(selfie)’ 문화 읽기를 시도한다. 이 책이 주목한 것은 자화상에 남아있는 예술가의 흔적, 즉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표현했고, 어떻게 자기 삶을 살고 갔을까? 예술도 적어도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동시에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한 방식이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의 발전은 거울의 발명과 기술력에 의존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에는 은이나 청동, 금속을 가공해서 거울을 만들었고, 오늘날에 쓰이는 유리 거울은 17세기 유럽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림과 거울은 의미적인 면에서 다양함을 전해준다. 인간 존재와 거울의 갈등 관계, 즉 선악의 문제,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양면적 관계 속에서 늘 화가들은 고민해 왔으며 자화상을 통해 내면적 자아를 표출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유리 거울에 비친 상(象)을 똑같이 그리는 자화상의 일반적 정의가 자화상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가의 다양한 변주를 축소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저자는 자화상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하여 접근한다. 그는 또 거울 기술의 발달과 자화상은 크게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제까지 통용되어 온 ‘거울 신화’는 자화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중세 시대 미술의 참모습을 가려왔다. 그래서 이 책은 흔히 ‘암흑의 시대’로 알려진 유럽 중세를 찬란한 빛의 미술을 꽃피운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중세에 나온 자화상들을 소개한다. 중세의 자화상은 수도원에서 제작한 필사본에 많이 등장한다.

 

책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예술가들의 ‘자신’에 대한 인식과 표현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보여준다. 대부분 예술가는 아틀리에에 있는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똑같이 재현한 건 아니었다. 15세기까지 예술가들은 자화상에 자신을 드러내더라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주변 인물로 등장하거나 심지어 다른 인물로 위장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이 시대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자신의 재능과 명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자화상이 등장한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화가로서 분명한 자의식이 담긴 자화상을 그렸다.

 

‘얼’, 즉 정신(영혼, 기분,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것을 시각화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림이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일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시각화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화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재능보다 혼(spirit)이 담긴 걸작이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엄청난 작업의 진행 계획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나갔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누운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눈과 목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했다. 몸을 혹사할 정도로 힘든 작업에 불만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한껏 몸을 뒤틀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의 캐리커처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카라바조(Caravaggio)는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살인자 혹은 살해당한 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을 보면 다윗이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다. 다윗은 젊은 카라바조를, 골리앗은 중년 카라바조를 의미한다. 젊은 카라바조가 타락한 중년 카라바조를 살해하는 의미로 해석되는 이 그림 속에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던 화가의 참회가 반영되어 있다.

 

온전히 ‘나’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아무래도 어렵다. 수많은 자화상을 남긴 고흐(Gogh)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리기도 어렵다”고 고백했다[주].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울은 내 외모를 잠깐 확인하게 해줄 뿐이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는 ‘굴’만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 즉 ‘얼’은 이미 거울 속에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자화상 대부분은 전통적인 자화상과 거리가 멀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그리기보다는 참신하고 개성 있는 형태(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거나, 가면을 쓰거나, 얼굴 형태를 변형하는 방식)로 구현하면서 내면의 깊이를 전달하려고 했다. 따라서 자화상은 끊임없이 거울을 깨고 변화하지 않으면 틀(거울에 비친 상)에 갇히고 마는 장르이다. 자화상이 참된 예술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예술가 자신만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훌륭한 자화상이란 완성되었어도 ‘지금도 나를 찾고 있는’ 그림이다. 자화상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면의 감정을 가시화하는 현재진행형 예술이다.

 

 

 

[주] 제임스 홀, 이정연 옮김, 《얼굴은 예술이 된다》, 시공아트, 374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09 16: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2 12:5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게다가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북플 접속이 뜸해졌어요. ^^;;

페크pek0501 2018-11-1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인에 대해 알기 어려운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경험을 하면서 또는 책을 읽으면서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을 뿐, 다 알았다고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겠지요.
어제와 다른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과 다른 내일의 내가 있을 테니까요.

cyrus 2018-11-12 12:57   좋아요 0 | URL
글을 쓰면서 과거에 했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나‘에 대해서 글을 쓰려면 자서전 같은 글 한 편으로는 안 되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