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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ㅣ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평점 :
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복잡하다. 현 상황은 과연 자연스러운 전환기의 모습일까, 아니면 심각한 사회 해체의 과정일까? 어떤 때는 지나친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적으로 문명이 인간의 의식 구조보다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사회가 급격히 변동하는 과정 속에는 어느 정도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연약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발전의 동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구성원들 간의 가치 합의와 상호 신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사회적 신뢰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과 규정을 어기고 공익을 해치는 행동을 예사롭게 여긴다. 개인주의에 매몰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결국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침해함으로써 어떠한 형태로든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게 된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서로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전제되는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사회 속에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회나 공동체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하고, 개인은 사회에 대하여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사회의 부당한 요구나 권리 침해에 대하여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시민의식이 형성되었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기주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은 다하지 않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면 사회 속에서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서로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여 배척하는 것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시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는 데 전념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사회의 부당한 행태를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가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오로지 나 자신의 이익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 개인주의의 성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들이 서로 믿을 수 없게 되며, 또한 사회공동체의 과제에 협력하지도, 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게 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말》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냉전은 끝났으며, 21세기에 인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십 년이 지난 후에 후쿠야마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시대가 역사의 최종 종착지로 실현되면 역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멈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만한 선택지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신이 《역사의 종말》을 썼을 때,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즉 과학기술이 계속 발전하지 않는 한 역사의 종말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앞으로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장기간 군림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대가 이대로 계속 유지되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희망을 받아들일 때 정말로 곤혹스러운 것은 공산주의가 한물간 체제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역사의 마지막 단계로 인정하기에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현실이 너무 각박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극단적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하는 사회를 바라보며 이것을 인류 역사의 최종 단계라고 낙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인류로선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자유 시장경제의 장점만 부각하는 건 ‘희망 고문’일 뿐이다.
서평의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한 필자의 염려와 《역사의 종말》의 한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한 이유는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약칭 ‘21가지 제언’)의 서문에 대한 부연 설명을 미리 하기 위해서였다. 하라리는 이 책에서 ‘혼미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는 책의 서문에 자유주의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예상 밖의 선회를 했고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붕괴한 후 지금 자유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12쪽)
이 책은 단순히 인류의 미래를 논하는, 그저 그런 미래학적 예언서는 아니다. 저자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개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가 근대 세계로 향하면서 개발한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말한다. 인간 자신이 바로 앎과 사람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은 근대성을 특징짓는 한 기준이 됐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반을 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규정하는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인류에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자유주의가 불변의 진리라든가, 완벽한 사상인 것처럼 믿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21가지 제언》의 부제를 빌려서 이 책의 주제를 단 한 줄로 표현하자면, ‘더 나은 자유주의 시대는 어떻게 가능한가’로 볼 수 있겠다. 하라리는 변화에 적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새로운 자유주의 모델을 제시한다.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이룬다고 해서 썩을 대로 썩은 자유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부정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유주의에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공산주의를 제안한 마르크스의 ‘처방’은 틀렸어도 그의 진단에 주목하듯이, 자유주의 역시 여러 모로 한계가 있어도 새롭게 고쳐 나갈 수 있다면 지금도 유효하다.
자유주의와 인류는 ‘기술적 도전’과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술적 도전’은 인공지능(AI)과 알고리즘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알고리즘의 결정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며,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이 위태로울 수 있다. ‘정치적 도전’이란 민족주의의 과잉과 종교 근본주의의 부활로 인해 일어나는 국제적 분쟁이다. 민족주의자와 종교 근본주의자는 국가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환경 문제나 핵전쟁 같은 복잡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 이러한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통해서 해결하기 어렵다. 사회 분위기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만들어지는 가짜 뉴스와 (보이지 않는) 테러의 공포는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사회적 분위기에 속절없이 갇힌 개인들의 ‘각자도생’을 이제 어찌할 것인가. 하라리는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나에 대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라는 주체는 합리적이지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의외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살면서 느끼는 나쁜 마음, 슬픈 마음 등 내면의 고통을 용감하게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관찰’하면서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관찰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의 환경이나 타인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하라리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순간순간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가 제시한 21가지 제언은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상식적인 ‘제안’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을 푸짐한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것처럼 늘어놓았는데, 음식 가짓수가 많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을 ‘종이’라는 식탁 위에 차려진 21가지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음식 가짓수는 많은데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는 평범한 식탁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 내린 음식 '처방'은 구체적이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종이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에 먹을 만했던 것은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서문이었다. 눈으로 먹고 난 뒤에 자유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 메뉴가 아쉽다. 먹을 게 별로 없는 마당에 마지막에 ‘명상’이라니. 책을 다 읽어도 다시 허기를 지게 만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