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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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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에 불기 시작한 '정부재창조' 바람 

 

 

 

 

 

 

미국 연방정부의 구조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환경의 변화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된 초점으로 정부 운용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신보수주의의 물결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 기능의 민영화, 정부지출 삭감, 지방정부 간 관계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클린턴-고어 행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3년 범정부적인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NPR : National Performance Review)을 마련, 관리통제 위주의 업무 직위를 줄이고 능률향상을 통한 ‘일 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Works better and Costs less)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앨 고어의 MPR은1998년 두남이라는 출판사에서 '기업형 정부 재창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이를 위해 1993년 NPR 보고서를 통해 5년간 연방공무원 25만개 직위를 폐지를 권고했다. 이후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 공무원의 수를 클린턴 행정부 출범 초기의 218만 8천 647명에서 집권 말기인 2000년 12월에는 176만 1천 376명으로 42만 7천여명, 19%를 줄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조직도 대대적으로 감축을 시도했다. 과거 30년간 600여명으로 유지돼오던 백악관 인력을 25% 감축, 500명 선으로 줄였다.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이러한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한 정부혁신사업단을 직접 이끌면서 정부실적 및 결과에 관한 법과 정보기술개혁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앨 고어가 주도한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의 중요한 의의는 인사행정 개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민영화를 통한 정부 부문의 독점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 공급자의 역할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1992년에 집필한 오스본과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기업가적 정신이 공공 부문을 어떻게 전환시키는가>는 고어의 NPR 실행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오스본과 게블러는 정부를 기존의 행정 관료제적 접근이 아닌 기업가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가적 정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중점적으로 축약할 수 있다. ① 정부는 과거처럼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을 잡아 주어야(Steering) 한다. ② 정부의 활동으로서 서비스의 독점보다는 서비스 제공에 경쟁 개념을 도입한다. 시장 지향적 정부로 변모해야 한다. ③ 고객(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낭비를 줄이고 고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오스본과 게블러가 주창한 ‘정부재창조론’은 이듬해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기업가 정신을 통한 정부혁신을 주도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적 정부가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오스본 &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그리고 앨 고어의 정부혁신은 경영에서 볼 수 있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조직을 야위게 만드는 경영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슬림화를 통해 능률의 증진을 추구한다. 기업체의 관료화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구를 단순화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화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모할 수 있다. 오스본 & 게블러가 주장한 새로운 정부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정책을 담당하며 제도를 움직이는 정부의 역할은 무조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더 많은 공공 서비스 권한을 이양하는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시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공공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촉진한다. 이는 곧 참여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행정학 전공에서 배우고 있는 정부재창조론의 장점이다. 공무원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정부재창조론은 지금까지도 행정 이론의 발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재창조론 도입에 비롯되는 장점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에 행정학 전공 기초 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정부재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을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 책은 바로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가 함께 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정치학자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 때문에 ‘다운사이징’되었다고 비판한다. 기업가적 정부의 역할이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오스본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시민의 정치 역할이 축소되는 개인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시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통치행위를 할 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자의 임기를 매우 짧게 하고, 추첨의 방법으로 선발과 교체를 빈번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통치자의 전횡 기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통치자의 책임은 사회계약론으로 설명되었다.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시민은 저항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시민 간 계약의 실증적 기초도 없고, 통치자에 대한 시민의 선출권이 전제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소극적 권리 이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접근은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실현된 삼권 분립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가 분할된 국가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의 통제권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의 권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두 권력 기구의 갈등 사이에서 사법부의 힘 역시 커졌다. 이러한 권력 확대의 과정에서 정부 권력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범위가 다시 축소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민주주의가 축소된 결정적인 계기가 클린턴 행정부 때 실행된 앨 고어의 NPR이다. 저자 크렌슨과 긴스버그는 정부 혹은 정치 엘리트들은 더 이상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유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한다.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대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다.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非) 엘리트, 즉 시민의 정치 참여를 종용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민주주의로 변했다. 종래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통해 공론의 장을 형성하던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익(私益)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변화는 민주주의를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익을 위한 참여 범위로 제한을 두는 꼴이 되었다. 정부는 고객이라는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 선택의 기회를 하나의 유인으로 제공한다. 고객은 자신의 공공 서비스 선택 및 참여가 정치적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민의 도움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정치 엘리트의 새로운 기술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축소된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정부 모형을 기반을 둔 정부재창조론은 정부의 목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의 목적만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 목적 또한 점점 격화되고 있다.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정부 혁신은 반쪽짜리 성공

 

책은 주기적 선거만으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통제권으로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없다. 공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개인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여주는 심각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주의는 잘못된 통치의 책임을 일상적으로 추궁하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정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지루한 성공’만을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매 정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정부 혁신이 관료제적 정부를 변화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시민의 정치적 행사를 축소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힘을 도외시한다면 지루한 성공이 아니라 반은 실패한 반쪽짜리 성공이다. 오늘 당장은 잘못된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해야 하겠지만, 결국엔 힘을 조직하고 대안을 형성하는 시민의 결속력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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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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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의 히마티온을 벗은 그리스의 속살 보기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를 보게 되면 남녀 모두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의 이름은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 남녀 모두 착용한 전통 의상 중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복장과 비슷해서 똑같이 히마티온을 입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과 형태에서 히마티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도 다르다. 고대 로마인의 전통 의상은 토가(toga)라고 부른다.

 

예전에 ‘그리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 햇살을 듬뿍 받은 채 자라는 올리브 나무, 히마티온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리고 옛날 그들이 숭배했던 올림포스의 신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서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상에 떠돌던 신들의 이야기를 故 이윤기 선생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상상력이 메마른 우리나라의 땅에 안착시켰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는 변방의 유럽 국가가 아닌 ‘신화의 나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신화의 나라’라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고대인들처럼 히마티온을 입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경배할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의 그리스를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하면서도 영원불멸한 신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경제 파탄 국가’, ‘경기침체의 화약고’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거론된다. 지금의 그리스는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최고의 관광국가로 손꼽을 정도로 살기 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치안마저도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은 생뚱맞게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리고 그리스 땅에서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시골의사의 그리스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여행 안내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인도해준다는 신계의 헤르메스가 아닌 진짜 그리스 인 카잔차키스와 동행을 선택했다. 시골의사의 여행 안내자 선택은 탁월하다. 만약에 헤르메스였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의 흔적만 쫓는 고리타분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시골의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모습은 ‘히마티온’을 벗은 나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라는 이름의 히마티온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크 안티시쥐지’,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그리스인

 

시골의사는 현재 그리스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생각했던 그리스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신화의 나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확 깨는 순간이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 35)

 

 

그리스인은 ‘안티시쥐지’(antisyzygy),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시골의사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면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를 동경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리스의 속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리스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장난이 잦을 정도로 바람기 많은 제우스처럼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의 축제가 열렸는데 지중해를 드나드는 남정네 마음에 유혹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향락의 축제였다.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를 다스렸던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리크 안티시쥐지’(Greeks

antisyzygy)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경제학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노예제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훌륭한 통치술을 펼쳐 7대 현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공(功)보다 과(過)가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악명 높았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코린토스의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겨 불로 태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칼리굴라 뺨칠 정도다. 후대의 평가 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포함된 것도 있지만, 우리는 페리안드로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스스로 몰아세우는 이중적 자아의 위험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경제 침체 이후 자아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보는 듯하다.

 

 

 

 낭만적 정열과 고요한 명상을 동시에 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인류애’와 ‘야만’이 충돌하는 안티시쥐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리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침략자의 불의에 맞서 투항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의 낭만적 정열이 남아 있으며 세속을 피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고요한 명상을 하는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다.

 

 

 

 

그리스 테르베나키아에 위치한 콜로코트로니스의 동상

 

 

오랜 굴종의 끈을 단칼에 자르려 했던 그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p 147)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그리스에는 혁명 영웅 콜로코트로니스가 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1822년에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콜로코트로니스는 게릴라 독립군 8000명을 이끌어 이보다 다섯 배 많은 3만 6000여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파한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 중심부에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고요한 정교회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처럼 속세의 발길이 드물고 정진과 수행에 집중하는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절벽이 깎아 내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며 세속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들이 신앙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세속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수도원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성스러운 심장 속에 국가를 위해 몸 바칠 줄 아는 정열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필요하지 않아 퇴화하게 되는데, 그 탯줄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에 생기는 것이 배꼽이다. 배꼽은 태어나기 전,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태어나고 나서는 인체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배꼽에는 피부의 다른 부위와 같이 피부 분비물, 각질의 죽은 세포 등이 뭉쳐서 때가 생기고, 주름이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때가 쌓이기 쉽다. 또한, 주름에 의해서 습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세균이 번식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문명의 배꼽’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분열을 거듭한 문명의 배꼽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가 아니다. ‘판데모스(Pandemos, 세속)’의 그리스가 있다. 문명의 배꼽 안에는 세속과 홍진의 때가 쌓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속의 그리스를 외면해야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사의 여행안내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p 7) 과거에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양피지처럼 지금의 그리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변화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한 역사의 지층 속에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에 남아 있는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우라니아’의 그리스로 만들기 위해 ‘판데모스’의 그리스를 외면한다는 것은 히마티온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예민한 문명의 배꼽에 편견의 자극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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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연히 출판사 '열린책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진짜 고전 돋는 고전게임 <위대한 개츠비>! shift와 z키만 누르면 될 정도로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줄거리에 맞춰 게임이 진행된다. 개츠비는 옛 연인 데이지와의 재회를 위해서 주류 밀매로 막대한 부를 가진 재벌이 되지만 결국에는 끝내 사랑에 실패하고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배경은 원작과 똑같이 1920년대 미국. 그런데 게임 캐릭터는 닉 캘러웨이다. 레벨 1의 첫 스테이지부터 닉은 개츠비를 만나기 위해서 온갖 적들을 무찌른다. 게임을 클리어하면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소설 속 장면이 나온다. 게임이 허접해 보이지만 나름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게임 속에 200점짜리 ‘황금 모자’가 나오는데 개츠비가 이걸 먹으면 황금색 옷을 입으면서 변신한다. 무기도 장거리에 있는 적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된다. 여기서 '황금모자'의 유래가 재미있다. 피츠제럴드는 원래 소설 제목을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로 정하려고 했다.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토머스 파크 딘빌리어스라는 허구의 인물이 쓴 짧은 시가 나온다. 시에 언급되는 ‘그녀’는 개츠비가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 데이지를 가리킨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을 차지하기 위해 상류 사회로 진출하는 개츠비를 상징한다. (그런데 게임상에서는 '황금 모자를 쓴 닉 캘러웨이'가 된다. 개츠비를 주인공으로 설정해서 게임을 만들었다면 진짜 원작 싱크로율 100%였을텐데...)

 

“그럼 황금 모자를 쓰려무나.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높이 뛰어오를 수 있거들랑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오르려무나.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모든 게임이 클리어하면 엔딩 장면에 소설 결말에 나오는 문장이 영어로 나온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소설 엔딩 장면이다.

 

개츠비는 그 초록색 불빛을, 해마다 우리 눈앞에서 뒤쪽으로 물러가고 있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피래 갔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맑게 갠 아침에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민음사, p 255)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을 한 번이라고 읽은 사람이라면 게임 화면 속에 숨겨진 '개츠비 코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판 게임 <The Great Gatsby>를 할 수 있는 링크

 

http://greatgatsbygame.com/

 

 

 

 

 

게임 오프닝. 게임을 시작하려면 Enter키를 누르면 된다.

 

 

 

 

 

게임 첫 번째 스테이지. Gatsby's Party.

소설을 읽어보면 개츠비는 자신의 저택에서 수백명의 손님들과 함께

호화스러운 파티를 여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게임 속 닉은 파티를 준비하는 웨이터와 파티에 온 손님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을 한다.

 

 

 

 

황금 모자 보너스 먹고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가 아니라 '닉 캘러웨이'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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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2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픽을 보니 상당히 오래전 게임 같네요^^

cyrus 2013-03-24 19:26   좋아요 0 | URL
ㅎㅎ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게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어요 ㅋㅋㅋ
 

 

 

 미소년을 향한 '반쪽' 요정의 무모한 욕정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본래 양성을 지녔는데, 신이 반쪽으로 분리한 후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라고 썼다. 곧 사랑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사랑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수한 감정보다 집착의 욕망이 더 앞선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야기는 욕망이 앞선 사랑이 부른 슬픈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호수에 오게 되었는데, 그 호수에는 살마키스라는 님프(Nymph, 요정)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멋진 외모의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눈에 반하여 구혼하였다. 그러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요정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 번 퇴짜 맞은 살마키스의 심장에는 미소년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거절은 욕망으로 지펴진 사랑의 불꽃을 더욱더 피어오르게 하였다.

 

어느 날, 살마키스는 혼자 호수에서 물놀이하고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던 살마키스는 이때를 틈 타서 알몸의 미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자신을 부둥켜안은 살마키스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살마키스는 자신과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한몸이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기도가 이루어져 둘의 몸의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영어에서 ‘암수한몸’, ‘자웅동체’를 뜻하는 ‘Hermaphrodite'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에 살마키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로부터 퇴짜를 맞은 이후에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쳤다면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을까. 헤르마프로디토스 당사자가 살마키스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섣부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욕망의 몸으로 그를 껴안은 살마키스의 행동이 아쉽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가 묘사한 살마키스를 보라. 강한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벗어 던지며 소년을 안으려는 교태 가득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몸짓을 보니 살마키스의 사랑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살마키스에게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의 짧은 만남이 달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그날 사건은 한낮의 봉변이었을 것이며, 살마키스는 욕정에 사로잡힌 여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반쪽을 찾는데도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가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서문 첫 장부터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기술인가?”(p 13)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원인으로 사랑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 대상의 문제,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의 혼돈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이론을 습득 후 실천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성공, 위신, 돈, 권력 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프롬은 우리가 쉽게 범하는 사랑의 오류를 지적한다. 사랑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대상에 의해 성립된다는 점을 믿고, 오직 사랑을 받는 대상 한 명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사랑이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직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나머지는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향한 살마키스의 사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폭발적인 경험과 성애(性愛)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러나 성애에 진짜 '사랑'이 결여된 상태라면 분리 후에 심한 격리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자웅동체 신화를 프롬이 봤다면 공서적(共棲的) 합일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을 사랑의 미숙한 형태로 보고 있다. (<사랑의 기술> p 36)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 - 마조히즘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가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고 말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보호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면서도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의 일부에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무조건 복종, 의존함으로써 고립감에 빠지지 않지만, 독립성이 부족하다.

 

프롬이 보는 마조히즘의 모습은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빗대어 욕망에 점철된 사랑을 은유한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만큼 사도-마조히즘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효시 격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보다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과 젊은 미망인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주종 관계를 모델로 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주종 관계를 증명해주는 두 장의 계약서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작성해서 보낸 계약서 내용만 봐도 소설의 줄거리와 프롬이 정의한 마조히즘을 짐작할 수 있다.

 

 

파니 폰 피스토르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사이의 계약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폰 피스토르 여사의 노예가 되어 그녀의 모든 지시나 명령을 여섯 달 동안 무조건 따를 것임을 맹세한다. (중략) 그녀의 종인 그레고르(=자허마조흐)는 노예로서 여주인을 공손하게 받들어야 하며 그녀가 내리는 어떤 호의도 기쁜 선물이라 여기며 받아야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거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파니 폰 피스토르는 되도록 자주 모피를 입을 것을 약속한다. 특히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렇게 한다.

 

(자허마조흐가 폰 피스토르에게 보낸 계약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230~231)

 

 

 

나의 노예 앞!

내가 귀하를 노예로 받아들여 내 곁에 둠에 있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자신을 무조건 버린다.

귀하는 내 의지 외에는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다.

귀하는 내 손아귀에 든 눈먼 도구로서 어떤 거역도 없이 내 명령을 모두 이행해야 한다. 귀하가 나의 노예임을 망각하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든지 무조건 복종을 하지 않을 경우 나는 귀하를 완전히 내 임의로 처벌하고 징계할 권리를 갖는다. 이때 귀하는 어떤 불평불만도 해서는 안 된다. (하략)

 

(폰 피스토르가 자허마조프에게 보낸 계약서, 같은 책, p 232)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 - 사디즘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가학성 음란증인 사디즘(Sadism)이다. 앞에서 언급한 ‘피학성 음란증-마조히즘’과 대응되며 마조히스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귀속해서 명령, 복종하려고 한다. 자신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 역시 이러한 관계를 통해 고독감을 피하려고 한다. 사디즘은 악명 높은 소설가 마르키드 데 사드 후작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유명하다. 마조히스트의 원형은 자허마조흐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실 사드의 소설 속 등장하는 비이성적인 인물들은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과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이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된 사드의 단편소설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는 불운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끔찍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인 팍스랑즈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기병대 장교 고에가 있음에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빼어난 외모를 지닌 프랑로 남작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결혼의 축복을 받으며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사실은 프랑로 남작이 치밀하게 꾸민 간계의 함정이었다. 프랑로 남작은 잔인하게 인질을 살해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도적의 소굴에 갇혀버린 팍스랑즈는 그곳에서 끔찍한 경험과 수모를 겪는다. 프랑로가 부재일 경우 그녀가 대신 인질을 살해해야 한다. 프랑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임무를 팍스랑즈에게 강요한다.

 

나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부인, 그러나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의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망각하지 않는 직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여인도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직분을 수행하는 방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죄악>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 중에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무조건 완벽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에서 나오는 이 빠진 동그라미와 같다.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동그라미는 이가 빠졌기 때문에 떼굴떼굴 빨리 구를 수 없어서 벌레를 만나면 잠시 멈춰 이야기하고 꽃을 만나면 향기를 맡기도 하고 둥실둥실 바다도 건너며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게 되지만 완벽한 원이 된 동그라미는 너무 빨리 구르게 돼서 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할 수도, 뜻대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다른 조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완전한 형태의 원과 같은 사랑이 무조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랑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즉, 쉽게 말하면 성숙한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을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의 사랑이라고 했다. 프롬이 말하는 긍정적 상태의 ‘완전한 사랑’은 바로 남녀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관하여 - 성 역할, 섹슈얼리티,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마리 루티는 동등한 남녀 관계 성립을 강조하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성 친구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여자친구나 아내가 전구 가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으냐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이성 친구의 답장은 의외였다. 마리의 이성 친구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며 그들을 무능력자로 여기길 좋아하는 보수주의적 남자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p 50~53)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다. 사랑을 논하는 데 강자는 뭐고 약자는 뭐냐 싶겠으나, 실제로 어떤 이들은 연인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곤 한다. 스스로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 관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쪽이 기울면 균형은 깨진다. 그리하여 그 숭고하다는 사랑에도 권력 구도는 형성되고, 감정의 문제는 욕망의 해소로 무게 중심을 옮겨간다. 그리고 연인 관계의 본질은 왜곡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比翼鳥)라는 새와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를 합친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을 때 서로 속삭이며                          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했었네                               在地願爲連理枝

영원한 하늘과 땅도 언제가 없어질 때가 있겠지만          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끊임없어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                       比恨緜緜無絶期

 

              (<당시선 下> '장한가' 중에서, p 271)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연리지를 보면 한쪽 나무가 말라 죽은 상태를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하나의 나무줄기로 합쳐져도 두 개의 나무의 상태는 멀쩡하다. 백낙천과 프롬이 말한 완전한 사랑은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만들어낸 사랑이리라.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는 '연리지 사랑'을 주목하자.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결혼에 대한 오해, 배우자에 대한 기대, 자기중심적 대화 등으로 소리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서로 다른 환경, 성격이더라도 한 몸을 이루어 사랑으로 서로 부족한 점은 채워주고 나누고 베푸는 감정의 공명이 필요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서로 무반응이나 독백하지 말고 상대가 듣고 싶은 답변으로 반응하는 공감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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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3월 중순이 지나가는데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네요. 독자 분들 환절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번에 새로 나올 민음사 신간 도서『침대』서평단을 모집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가디언》, 《선데이타임스》, 《인디펜던트》, 《에스콰이어》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David Whitehouse) 신간입니다.

이 책은 ‘이십 년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남자’, ‘세상에서 가장 뚱뚱한 남자’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어른이 되는 것=특별함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식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부모의 헌신, 젊은 세대의 사회적 무기력을 은유하는 맬컴의 삶, 특별함에 대한 동경과 형제 사이의 애증, 자족적인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어른이 되어 똑같이 생활에 치이면서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두려웠던 맬컴의 삶을 먼저 엿보게 되실 분들을 찾습니다.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3.03.15 - 2012.03.25(열흘 간)

- 추첨 인원: 20명

- 서평단 발표: 2013.03.26(화) 오후

- 서평 기간: 2013.03.27-2013.04.10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쉽게 읽지 않을 정도로 독서 편력이 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하게 될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소설 줄거리를 보고 나서 주인공 맬컴에 대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정신적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한 헌신'이라는 이름 하에 과잉보호하는 부모 그리그 그런 부모 속에 자라면서 정신이 무기력해지고 어른으로서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식. 이러한 관계의 설정은 단지 허구 속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볼 수 있습니다. 저널리스트가 젊은 세대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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