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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신화’의 히마티온을 벗은 그리스의 속살 보기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를 보게 되면 남녀 모두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의 이름은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 남녀 모두 착용한 전통 의상 중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복장과 비슷해서 똑같이 히마티온을 입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과 형태에서 히마티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도 다르다. 고대 로마인의 전통 의상은 토가(toga)라고 부른다.

 

예전에 ‘그리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 햇살을 듬뿍 받은 채 자라는 올리브 나무, 히마티온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리고 옛날 그들이 숭배했던 올림포스의 신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서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상에 떠돌던 신들의 이야기를 故 이윤기 선생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상상력이 메마른 우리나라의 땅에 안착시켰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는 변방의 유럽 국가가 아닌 ‘신화의 나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신화의 나라’라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고대인들처럼 히마티온을 입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경배할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의 그리스를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하면서도 영원불멸한 신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경제 파탄 국가’, ‘경기침체의 화약고’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거론된다. 지금의 그리스는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최고의 관광국가로 손꼽을 정도로 살기 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치안마저도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은 생뚱맞게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리고 그리스 땅에서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시골의사의 그리스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여행 안내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인도해준다는 신계의 헤르메스가 아닌 진짜 그리스 인 카잔차키스와 동행을 선택했다. 시골의사의 여행 안내자 선택은 탁월하다. 만약에 헤르메스였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의 흔적만 쫓는 고리타분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시골의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모습은 ‘히마티온’을 벗은 나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라는 이름의 히마티온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크 안티시쥐지’,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그리스인

 

시골의사는 현재 그리스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생각했던 그리스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신화의 나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확 깨는 순간이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 35)

 

 

그리스인은 ‘안티시쥐지’(antisyzygy),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시골의사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면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를 동경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리스의 속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리스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장난이 잦을 정도로 바람기 많은 제우스처럼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의 축제가 열렸는데 지중해를 드나드는 남정네 마음에 유혹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향락의 축제였다.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를 다스렸던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리크 안티시쥐지’(Greeks

antisyzygy)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경제학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노예제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훌륭한 통치술을 펼쳐 7대 현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공(功)보다 과(過)가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악명 높았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코린토스의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겨 불로 태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칼리굴라 뺨칠 정도다. 후대의 평가 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포함된 것도 있지만, 우리는 페리안드로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스스로 몰아세우는 이중적 자아의 위험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경제 침체 이후 자아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보는 듯하다.

 

 

 

 낭만적 정열과 고요한 명상을 동시에 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인류애’와 ‘야만’이 충돌하는 안티시쥐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리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침략자의 불의에 맞서 투항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의 낭만적 정열이 남아 있으며 세속을 피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고요한 명상을 하는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다.

 

 

 

 

그리스 테르베나키아에 위치한 콜로코트로니스의 동상

 

 

오랜 굴종의 끈을 단칼에 자르려 했던 그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p 147)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그리스에는 혁명 영웅 콜로코트로니스가 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1822년에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콜로코트로니스는 게릴라 독립군 8000명을 이끌어 이보다 다섯 배 많은 3만 6000여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파한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 중심부에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고요한 정교회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처럼 속세의 발길이 드물고 정진과 수행에 집중하는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절벽이 깎아 내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며 세속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들이 신앙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세속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수도원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성스러운 심장 속에 국가를 위해 몸 바칠 줄 아는 정열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필요하지 않아 퇴화하게 되는데, 그 탯줄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에 생기는 것이 배꼽이다. 배꼽은 태어나기 전,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태어나고 나서는 인체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배꼽에는 피부의 다른 부위와 같이 피부 분비물, 각질의 죽은 세포 등이 뭉쳐서 때가 생기고, 주름이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때가 쌓이기 쉽다. 또한, 주름에 의해서 습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세균이 번식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문명의 배꼽’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분열을 거듭한 문명의 배꼽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가 아니다. ‘판데모스(Pandemos, 세속)’의 그리스가 있다. 문명의 배꼽 안에는 세속과 홍진의 때가 쌓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속의 그리스를 외면해야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사의 여행안내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p 7) 과거에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양피지처럼 지금의 그리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변화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한 역사의 지층 속에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에 남아 있는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우라니아’의 그리스로 만들기 위해 ‘판데모스’의 그리스를 외면한다는 것은 히마티온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예민한 문명의 배꼽에 편견의 자극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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