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년을 향한 '반쪽' 요정의 무모한 욕정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본래 양성을 지녔는데, 신이 반쪽으로 분리한 후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라고 썼다. 곧 사랑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사랑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수한 감정보다 집착의 욕망이 더 앞선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야기는 욕망이 앞선 사랑이 부른 슬픈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호수에 오게 되었는데, 그 호수에는 살마키스라는 님프(Nymph, 요정)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멋진 외모의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눈에 반하여 구혼하였다. 그러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요정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 번 퇴짜 맞은 살마키스의 심장에는 미소년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거절은 욕망으로 지펴진 사랑의 불꽃을 더욱더 피어오르게 하였다.

 

어느 날, 살마키스는 혼자 호수에서 물놀이하고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던 살마키스는 이때를 틈 타서 알몸의 미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자신을 부둥켜안은 살마키스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살마키스는 자신과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한몸이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기도가 이루어져 둘의 몸의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영어에서 ‘암수한몸’, ‘자웅동체’를 뜻하는 ‘Hermaphrodite'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에 살마키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로부터 퇴짜를 맞은 이후에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쳤다면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을까. 헤르마프로디토스 당사자가 살마키스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섣부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욕망의 몸으로 그를 껴안은 살마키스의 행동이 아쉽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가 묘사한 살마키스를 보라. 강한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벗어 던지며 소년을 안으려는 교태 가득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몸짓을 보니 살마키스의 사랑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살마키스에게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의 짧은 만남이 달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그날 사건은 한낮의 봉변이었을 것이며, 살마키스는 욕정에 사로잡힌 여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반쪽을 찾는데도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가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서문 첫 장부터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기술인가?”(p 13)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원인으로 사랑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 대상의 문제,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의 혼돈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이론을 습득 후 실천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성공, 위신, 돈, 권력 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프롬은 우리가 쉽게 범하는 사랑의 오류를 지적한다. 사랑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대상에 의해 성립된다는 점을 믿고, 오직 사랑을 받는 대상 한 명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사랑이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직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나머지는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향한 살마키스의 사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폭발적인 경험과 성애(性愛)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러나 성애에 진짜 '사랑'이 결여된 상태라면 분리 후에 심한 격리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자웅동체 신화를 프롬이 봤다면 공서적(共棲的) 합일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을 사랑의 미숙한 형태로 보고 있다. (<사랑의 기술> p 36)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 - 마조히즘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가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고 말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보호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면서도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의 일부에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무조건 복종, 의존함으로써 고립감에 빠지지 않지만, 독립성이 부족하다.

 

프롬이 보는 마조히즘의 모습은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빗대어 욕망에 점철된 사랑을 은유한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만큼 사도-마조히즘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효시 격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보다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과 젊은 미망인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주종 관계를 모델로 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주종 관계를 증명해주는 두 장의 계약서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작성해서 보낸 계약서 내용만 봐도 소설의 줄거리와 프롬이 정의한 마조히즘을 짐작할 수 있다.

 

 

파니 폰 피스토르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사이의 계약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폰 피스토르 여사의 노예가 되어 그녀의 모든 지시나 명령을 여섯 달 동안 무조건 따를 것임을 맹세한다. (중략) 그녀의 종인 그레고르(=자허마조흐)는 노예로서 여주인을 공손하게 받들어야 하며 그녀가 내리는 어떤 호의도 기쁜 선물이라 여기며 받아야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거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파니 폰 피스토르는 되도록 자주 모피를 입을 것을 약속한다. 특히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렇게 한다.

 

(자허마조흐가 폰 피스토르에게 보낸 계약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230~231)

 

 

 

나의 노예 앞!

내가 귀하를 노예로 받아들여 내 곁에 둠에 있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자신을 무조건 버린다.

귀하는 내 의지 외에는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다.

귀하는 내 손아귀에 든 눈먼 도구로서 어떤 거역도 없이 내 명령을 모두 이행해야 한다. 귀하가 나의 노예임을 망각하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든지 무조건 복종을 하지 않을 경우 나는 귀하를 완전히 내 임의로 처벌하고 징계할 권리를 갖는다. 이때 귀하는 어떤 불평불만도 해서는 안 된다. (하략)

 

(폰 피스토르가 자허마조프에게 보낸 계약서, 같은 책, p 232)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 - 사디즘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가학성 음란증인 사디즘(Sadism)이다. 앞에서 언급한 ‘피학성 음란증-마조히즘’과 대응되며 마조히스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귀속해서 명령, 복종하려고 한다. 자신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 역시 이러한 관계를 통해 고독감을 피하려고 한다. 사디즘은 악명 높은 소설가 마르키드 데 사드 후작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유명하다. 마조히스트의 원형은 자허마조흐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실 사드의 소설 속 등장하는 비이성적인 인물들은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과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이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된 사드의 단편소설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는 불운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끔찍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인 팍스랑즈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기병대 장교 고에가 있음에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빼어난 외모를 지닌 프랑로 남작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결혼의 축복을 받으며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사실은 프랑로 남작이 치밀하게 꾸민 간계의 함정이었다. 프랑로 남작은 잔인하게 인질을 살해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도적의 소굴에 갇혀버린 팍스랑즈는 그곳에서 끔찍한 경험과 수모를 겪는다. 프랑로가 부재일 경우 그녀가 대신 인질을 살해해야 한다. 프랑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임무를 팍스랑즈에게 강요한다.

 

나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부인, 그러나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의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망각하지 않는 직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여인도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직분을 수행하는 방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죄악>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 중에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무조건 완벽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에서 나오는 이 빠진 동그라미와 같다.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동그라미는 이가 빠졌기 때문에 떼굴떼굴 빨리 구를 수 없어서 벌레를 만나면 잠시 멈춰 이야기하고 꽃을 만나면 향기를 맡기도 하고 둥실둥실 바다도 건너며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게 되지만 완벽한 원이 된 동그라미는 너무 빨리 구르게 돼서 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할 수도, 뜻대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다른 조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완전한 형태의 원과 같은 사랑이 무조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랑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즉, 쉽게 말하면 성숙한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을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의 사랑이라고 했다. 프롬이 말하는 긍정적 상태의 ‘완전한 사랑’은 바로 남녀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관하여 - 성 역할, 섹슈얼리티,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마리 루티는 동등한 남녀 관계 성립을 강조하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성 친구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여자친구나 아내가 전구 가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으냐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이성 친구의 답장은 의외였다. 마리의 이성 친구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며 그들을 무능력자로 여기길 좋아하는 보수주의적 남자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p 50~53)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다. 사랑을 논하는 데 강자는 뭐고 약자는 뭐냐 싶겠으나, 실제로 어떤 이들은 연인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곤 한다. 스스로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 관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쪽이 기울면 균형은 깨진다. 그리하여 그 숭고하다는 사랑에도 권력 구도는 형성되고, 감정의 문제는 욕망의 해소로 무게 중심을 옮겨간다. 그리고 연인 관계의 본질은 왜곡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比翼鳥)라는 새와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를 합친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을 때 서로 속삭이며                          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했었네                               在地願爲連理枝

영원한 하늘과 땅도 언제가 없어질 때가 있겠지만          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끊임없어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                       比恨緜緜無絶期

 

              (<당시선 下> '장한가' 중에서, p 271)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연리지를 보면 한쪽 나무가 말라 죽은 상태를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하나의 나무줄기로 합쳐져도 두 개의 나무의 상태는 멀쩡하다. 백낙천과 프롬이 말한 완전한 사랑은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만들어낸 사랑이리라.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는 '연리지 사랑'을 주목하자.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결혼에 대한 오해, 배우자에 대한 기대, 자기중심적 대화 등으로 소리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서로 다른 환경, 성격이더라도 한 몸을 이루어 사랑으로 서로 부족한 점은 채워주고 나누고 베푸는 감정의 공명이 필요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서로 무반응이나 독백하지 말고 상대가 듣고 싶은 답변으로 반응하는 공감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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