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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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음의 벽을 ‘섬’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사람들 저마다가 가진 '취향'이 그 섬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얼마나 자주 '내 취향'이라는 말을 내뱉는가. 내 타입, 내 스타일로도 말해지는 이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공해 진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것 저 것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훈일 뿐 자신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나이쯤이면 나와 공감대를 지닌 묶음에 들어가는 게 속 편해진다. 이제 그 밖의 세상은 굳이 어울릴 필요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여집합이 되고 만다. 꽤 여러 곳에 걸쳐져 있던 공통집합은 갈수록 줄어들어 어느새 작은 섬이 되고 만다.

 

 

 

 

 

<타인의 취향>에 떠 있는 섬들을 살펴보자. 성공한 사업가 카스텔로는 적당한 성공에 안주한 채 늘 먹을 것만 찾는 속물스런 구세대 남성의 전형이다. 이에 반해 그의 아내 앙젤리크는 전문가적인 취향과 품위를 지닌 중년여성임을 자부한다. 불균형, 그러나 뜻밖에도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저속한 취향은 고사하고 아예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일체의 취향조차도 가지지 못한 카스텔라가 그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맞춰주었으며, 아내 역시 오직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가정의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기괴해 보이는 부부의 평온은 카스텔라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취향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카스텔라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실제로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영화나 연극, 시, 음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나 이별, 심지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TV 드라마에서 스치듯 들리는 한 마디 대사로도 영혼을 뒤흔드는 경천지동의 균열은 시작될 수 있다. 조카가 등장하는 연극작품이 상연되는 극장에 가자는 아내의 청이 귀찮다. "지루한 연극을 왜본담". 그의 아내는 올케의 새집 단장을 도와주며 예쁜 인테리어를 싫어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쩜 저런 스타일을 고르지?" 연극배우 클라라는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로 만나게 된 카스텔로가 그냥 싫다. "대머리에 콧수염.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전혀 없고..." 카스텔로의 운전기사도 그의 보디가드도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거지?"하면서.

 

 

 

 

초반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적인 관계 이외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 사이에 사연이 생겨나는 건 카스텔로와 클라라가 만나면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 관객도 깜빡 속을 만큼 무의미하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영어회화 선생으로 면접을 받으러 온 클라라에게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카스텔로는 형식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두 사람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간 카스텔로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클라라를 보게 된다.

 

이제 카스텔로에게 그녀는 그냥 클라라가 아니라 특별한 클라라가 된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것이 된다는 의미다. 문화적인 것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카스텔로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연극을 보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쏟는 그의 정성은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단 한가지이유로 무참히 거부당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그를 밀어낸다.

 

비로 클라라에게 어설픈 영시로 사랑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가슴 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기도 하짐나, 그러는 가운데 차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새삼스레 느끼기 시작한다. 아직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그림을 구입하고, 내친 김에 공장에는 거대한 벽화를 주문한다. 유능한 부하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던 그가 직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고민하며, 벽화를 주문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텔라는 '변화'해간다.

 

 

 

 

하지만 앙젤리크는 남편의 이런 변화를 전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편은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저 자신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분명해서 타인의 입장이나 취향을 배려할 수 잇는 여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이들보다 우월함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취향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급한 것들이고, 이에 따라 세상은 자신의 일방적인 돌봄만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앙젤리크에게 남편은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한 마리 강아치처럼 대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소통의 오만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자초한다.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아내의 무감각함은 역설적으로 카스텔로를 '각성'하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수단'이나 '배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카스텔로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인형'으로 취급받는 삶을 살았던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단 한 점의 그림이 무참히 떼어진 후 결국 카스텔로가 아내를 떠나는 설정은 연극 <인형의 집>의 현대적인 범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처럼 싫던 그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객석을 쳐다보는 클라라. 놓쳐 버린 사랑으로 슬픔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커튼콜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영화 내내 냉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무대 맨 앞에서 카스텔로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취향만큼 견고하게 개인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어디 있을까. 소통의 원천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자기방어, 단지 그것이 취향인데 말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한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간 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 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이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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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8-01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멋진 글을 제가 왜 못보고 지나쳤을까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취향은 서로 닮아가는 것 같아요.
이 영화를 비롯하여 결혼 후 제가 좋아하게 된 영화들은 대부분 아내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물론 절대 닮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지요.
저는 여전히 액션과 공포물도 좋아하지만,
아내는 절대 때려부수는 영화나 피를 튀기는 영화를 보지 않거든요.

[룩엣미]도 보셨나요?
그 영화에 대한 평도 읽고 싶어지는데요.

cyrus 2013-08-02 00:08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특이한데.. 저번 학기 때 현대미술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담당교수님이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다양한 시선과 관점을 강조하다는 취지에서 이 영화를 보여줬어요. 이 영화 말고도 미국 흑인 문제를 다룬 '타임 투 킬'도 보게 되었죠. '룩엣미'는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시간 나면 영화를 많이 보고 싶네요 ^^

감은빛 2013-08-06 02:08   좋아요 0 | URL
[룩엣미]도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영화입니다.
[타인의 취향] 이후에 찍은 작품인데,
거의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 교수님이 강조한 시선과 관점에 대한 부분으로 보면
이 영화 역시 탁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취향]보다 [룩엣미]를 더 좋아합니다.
 
앙리 루소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34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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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피운 화가의 길

 

 

 

 

 

 

앙리 루소  『램프가 있는 자화상』 1900~1903년

 

 

 

보통 아마추어 화가라고 하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정 화가에게 사사를 받고 활동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서구의 경우 아마추어 출신 유명한 화가로는 반 고흐와 앙리 루소가 있다. 특히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피카소, 르동, 마티스 등 화가들과 전위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루소는 살아생전에 일반인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죽어서도 화가의 이름 루소보다는 성()이 같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을 그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과 혼동한다면 루소 입장에서는 통탄한 일이다.

 

 

 

 

 

 

앙리 루소  『세관』 1890년

 

 

루소는 꾸준한 준비로 전업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예술가다. 전직이 세관원이었다. 1871년부터 무려 22년 동안 파리 세관의 세금징수원으로 밥벌이를 했다. 24시간 근무한 후 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었다. 루소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1884년 마흔 살 때였다. 이때 루브르박물관에서 유명한 그림들을 베껴 그릴 수 있는 모사 허가증을 받는다. 그는 직장과 가정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그림을 그렸다. 가슴 한 켠에는 뛰어난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초보자 티를 겨우 벗을 무렵인 1885, 꿈에 그리던 살롱전에 난생 처음 출품한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헤밍웨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을 향해 한발 짝 한발 짝 다가가고 있다’(에디슨)는 말에 공감이라도 한 듯이 다시 캔버스와 씨름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살롱전의 고답적인 스타일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창설한 앙데팡당전은, 루소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 단골 무대였다. 7년 동안 출품한 작품이 20점이나 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루소의 그림을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사실 루소의 그림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을만큼 특이하다. 그 당시 많은 그림들이 유사한 스타일로 세련되게 그려졌던 것과 달리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단순화된 형태와 원근법을 무시한 기묘함, 이질적인 색상 대비 등이 관람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루소가 아니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 만큼 화가로서 자부심은 시들지 않았다.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그를 아마추어 화가, 우스꽝스러운 기인으로 여겼지만 루소 본인은 자신을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진지하게 믿었다. 1893, 루소는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관을 그만둔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듯이 과감하게 전업작가로 나선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열정은 뜨거웠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생활마저 궁핍했다. 그런데 고진감래였다. 1905,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든다. 예전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가을 살롱전에 작가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제도권 비평가들도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화상들도 원시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루소의 그림을 구입해갔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그리다

 

 

 

 

 

 

앙리 루소  『나, 초상-풍경』 1890년

 

 

 

루소는 파리 풍경을 그렸다. 파리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있고, 강변으로 낚싯줄을 드리우거나 산책을 하거나 느린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둔하고 우직하게 그렸다. 루소에게는 낮선 풍경을 제 눈으로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만국박람회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참가국 국민과 신상품이겠지만 박람회에서 제일 떠들썩한 화젯거리는 단연 에펠탑이었다. 센 강변에 우뚝 선 에펠탑은 박람회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그해 처음 전깃불 조명이 박람회에 사용돼 덕분에 늦게까지 입장이 허용되고 에펠탑 위로 설치한 큼직한 조명탑이 파리 시내를 비추는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번영을 누리고 있던 파리는 세상의 중심으로서 당당했다. 루소는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나, 초상-풍경>에서 루소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포기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자화상에 애국심에서 우러나는 프랑스의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두 가지 상징물인 에펠탑과 열기구를 그려 넣었다. 당시 화가들은 에펠탑이 흉물이라고 화면에 그려 넣기를 꺼려했지만 유일하게 쇠라만이 루소보다 1년 앞서 에펠탑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루소는 자신의 그림 속 곳곳에 만국기가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환희를 표현하는 등 신념에 찬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살롱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지식층의 전위미술과 경쟁했다. 이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정글의 세계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  1905년

 

 

 

루소는 태어나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파리 밖 지척에 있는 아프리카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파리 사람들에게 마치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곧 돌아와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과장하고 뻥 튀겼다. 사람들은 루소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열대의 정글 원시림에 다녀와서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루소의 타고난 ‘뻥쟁이’ 기질이 한몫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원정을 떠난 일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수도를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선제후 막시밀리안 백작을 멕시코 황제로 임명했다. 뒤이어 멕시코에서 봉기가 일어나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퇴각했다.

루소는 자기가 원정군에 참전해서 싸우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고 허풍을 쳤다. 하급 세관원으로, 아마추어 화가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에게 이렇게라도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어낸 말이었다. 정글 풍경도 루소가 제 입으로 다녀와서 보고 그린 풍경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사실 루소는 열대식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식물원에 가본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루소는 일종의 과대망상증이 있었다. 그 과대망상이 어쩌면 이리 멋진 정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그림의 전달력과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그는 정글의 화가로 굳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상상력이 주는 힘은 예술가로서의 루소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상상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가지고 살았던 화가

 

 

 

 

 

앙리 루소  『꿈』 1910년

 

 

 

루소는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현실과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무의미한 이색적인 세계였다. 대표작의 하나인 <꿈>에도 두 세계는 공존한다. 원시림 한가운데 뜬금없이 알몸의 여인 야드비가가 몸을 돌려 정글을 둘러보고 있다. 숲속에는 사자와 코끼리, 새들이 모두 주시하고, 평화롭게 잠든 야드비가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뱀을 벗처럼 부리는 사람이 부는 피리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빛이 꽃잎과 신록의 나무 위에서 빛날 때 황갈색 뱀이 피리가 내는 선율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루소의 꿈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가시 돋친 질문을 퍼부었다. 루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원시림 풍경에 무슨 붉은 소파냐고요? 야드비가는 소파에서 잠시 잠든 채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요술쟁이가 부는 피리소리를 듣습니다. 구성진 피리 선율이 잠든 숲을 깨웁니다. 야드비가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시림 한복판에다가 소파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의 방에서 본 빨간 의자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의자를 본 순간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폴란드 아가씨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다. 화면 가운데에 멕시코풍의 식물을 빼곡히 그려 넣고, 아름다운 새와 꽃, 과일도 배치했다. 또 수풀 사이에 사자와 코끼리도 더했다. 그런데 야드비가는 누구일까?

 

그림 속 여인의 실제 모델에 대해서 루소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루소가 젊어서 사랑했던 폴란드 여인일까. 루소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했던 시기인 1910년에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평생 마음에 담아뒀던 영원한 사랑 야드비가를 자신의 화폭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기로 마음 속으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진흙구덩이 속을 뒹굴고 산다. 그러나 우리들 중 몇몇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갖고 산다”라고 말했다. 화가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현실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헛된 환상에 살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열대우림 속의 은밀하게 속삭이는 마술과 같은 소박한 자연의 이야기를 앙리 루소는 각박한 현실에서 별을 그리듯이 자신의 세계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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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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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극적 아웃사이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동네 친구들 몇이서 공터에 비밀 본부를 만들곤 했다.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후 사람 인적 드문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 곳에서 모이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지 정한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 곳엔 부모님의 잔소리가 없다. 우리들만을 위한 세상이다. 거기에 앉으면 온갖 즐겁고 기발한 생각들만 떠올랐다. 그 곳은 일탈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과 아웃사이더의 관조적 여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아웃사이더는 내부자를 의미하는 인사이더와 구별되는 인간형으로, 국외자 또는 이단자를 뜻한다. 타의에 의해 어떤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배척되는 경우는 소극적, 수동적 아웃사이더이고, 소속 집단의 규칙이나 질서에서 스스로 벗어난 경우는 적극적, 능동적 아웃사이더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비밀 본부를 만든 것은 적극적 아웃사이더가 되기 위함이었다.

 

콜린 윌슨은 이 작품에서 하찮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에게서 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도 바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인사이더는 제도권 내 사람이고, 아웃사이더는 제도권 밖의 사람이다. 인사이더는 힘이 있고, 아웃사이더는 힘이 없다. 그래서 인사이더는 이끌고, 아웃사이더는 따른다. 이것이 보통 사회인데, 윌슨은 다른 시각에서 아웃사이더를 바라보았다.

 

 

 

 인사이더 같은 아웃사이더

 

그는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카뮈의 <이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과 니체, 반 고흐 같은 실제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아웃사이더들은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일상이 따분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고역이며 노예들에게나 알맞다고 느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이나 사상가들은 이 감정을 문학과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웃사이더들은 체제 안의 순응자인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능동적, 창조적 아웃사이더들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를 넓혔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향을 창조했다.

 

윌슨은 이 과정에서 문학, 철학, 역사, 신학을 아우르는 고전 작품 속에서 발굴해낸 주인공들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우한다. 상호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답을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대치되는 두 가지 질문들, 예컨대 ‘존재와 무’, ‘현실과 비현실’ 등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본질적으로 ‘실천의 문제’, ‘사고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보통의 소시민들과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되는데 아웃사이더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풀어보자면,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으면 ‘무임승차’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윌슨의 눈은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역할이 역전되는 위치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이더가 스스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아웃사이더가 나설 때 그렇다. 이 상황이 오면 아웃사이더가 사회를 이끌고 인사이더는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한다. 어느 순간 아웃사이더는 윌슨이 활동했던 영국의 문인클럽, ‘분노의 젊은 사람들’(Angry Young Men)처럼 세상을 향해 진실을 토해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그가 지칭하는 ‘아웃사이더’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치적 소외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아웃사이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약자, 소수자란 의미보다는 그 파장이 깊고 넓은 것이다. 글의 모두에 인용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할 정도다.

 

 

 

 아웃사이더가 이끄는 세상

 

공중파 방송의 저녁 아홉시 종합뉴스를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이의 보도 내용들은 부정적인 유형을 이루어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매일 매일의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유형화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향은 거의 무감하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물질과 결부된 것이어서 우리들의 삶에서 물질의 위의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 인사이더는 정치를 주름잡았고, 경제를 주물렀다. 엄청난 돈을 만지며 승자의 축배를 들었다. 정치적으로 인사이더는 리더였고, 아웃사이더는 추종자였다. 경제적으로 인사이더는 가진 자였고, 아웃사이더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사회적으로 인사이더는 갑(甲), 위너(winner)였고, 아웃사이더는 을(乙), 루저(loser)였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힘을 이기적으로 썼을 뿐 사회를 위해 활용하지 못했다. 돈으로 그들만의 아성을 쌓았을 뿐 나누기에 인색했다. 위너였음에도 루저를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문화의 현실적 풍토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과 의식이 그런 것에 침윤되어 허덕거리더라도 이를 당연시하고 거부하는 몸짓조차 짓지 않는 세태 속에서 아웃사이더들은 어쩜 일탈행위자들로만 여겨질 지 모른다. 이러한 모습을 24세 청년 윌슨이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말이다.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 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 (322쪽)

 

 

인구 통계적으로 소수라고 해서 사회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의 소리를 더불어 함께 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진짜 아웃사이더는 일반인도 이해하지 못한 부정의 환상을 볼 줄 알며 창조적이다. 갑의 횡포로 시끌벅적했던 2013년, 곤혹을 치른 갑의 인사이더도 환자임을 자각하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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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옐로 하우스에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을 남긴 두 천재화가의 삶에는 교차점이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시골 아를에서 자리를 잡은 뒤 평소 가장 이상적인 동료라고 생각했던 고갱을 설득해 시작한 약 60일간의 동거 생활이다. 바로 1888년 10월 23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이다. 프로방스 시골 마을 아를에서 이들이 보낸 곳이 바로 고흐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옐로 하우스’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미술사적으로 이 60일은 가장 유명한 동거임에 틀림없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동거는 고흐와 당시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와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고흐가 동생 도움을 받아 아를에 터를 잡으면서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고흐에게 그 대상은 폴 고갱이었다. 테오에게 편지를 써 ‘혹시 고갱이 남쪽으로 올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내비쳤고 이런 생각은 일종의 집착으로 발전됐다.

 

고흐는 5월 말부터 다섯 달 동안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 와서 자신과 함께 살 것을 종용했다. 자신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테오도 동원했다. 가난한 고갱이 옐로 하우스에서 자신과 같이 살면서 그림을 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고갱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출발은 계속 연기했다고 한다.

 

그 전 해 겨울 파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이를 통해 훨씬 친밀해졌다. 편지 안에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두 사람 얘기도 나오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그런 과정 이후에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의 이틀 동안의 여행 끝에 아를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방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그림 <해바라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6년 후 고갱은 이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너무나 달랐던 작품 성향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흐는 성격이 예민한 데다 작업 환경이 지저분하고 산만했다. 여기에 대해 고갱은 간섭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은 불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화에 대한 열정과 불굴의 신념을 갖고 있는 고갱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때묻지 않은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고갱과 달리 자신을 중생구제를 위해 나선 수도자에 비유한 고흐는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시골농부들의 삶을 정열적인 붓터치로 그려냈다.

 

 

 

 나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9년

 

 

고갱과 비극적인 이별을 하고 나서, 요양원에 치료를 받은 후 고흐는 이 때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그리게 된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고흐는 자신이 없는 방 안을 혼령처럼 쳐다본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주인이 방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음을 나타난다. 살짝 열린 환한 창은 고갱과 함께했던 따뜻한 여름날의 추억을 암시한다. 그림 속 많은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양쪽 끝의 문,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의자, 두 짝의 창문, 두 개의 초상화 등. 그건 고흐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쩌면 고갱을 생각해서인지 그가 떠나간 쓸쓸한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색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8년

 

 

재미있게도 고흐는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이미 두 점을 그린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아를의 방 그림은 고갱이 아를에 오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고갱이 온다는 설렘도 있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영감이 떠올리게 하는 고장에서 갖게 된 멋진 ‘자기만의 방’이었다.

 

1888년 12월, 무슨 마음의 심경이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자르게 했는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당시 고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고갱에게 화가 나 있었고, 친구들은 일 때문에 아를을 떠나갔고, 동생 테오는 약혼을 한 상태였다. 고흐는 외로웠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고갱은 바로 떠나 버린다. 고흐는 아를의 병원을 거쳐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요양원에 나온 이후 그는 자신의 방을 세 번째 그리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예전에 그 행복했던 옐로 하우스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쓸쓸한 고독만 남아 있을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 그리고 숨은 우정

 

 

 

 

 

 

 

 

 

 

 

 

 

 

 

 

고흐와 고갱은 신기하게도 평행선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화가로서의 삶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그리고 둘 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고 아를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고갱은 35세 때 주식 중매인에서 화가로 전업한다. 몇 년이 지나, 파리를 떠나 이곳 그림 같은 시장 도시 퐁타벤에 반해 동료 화가들과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황색 그리스도>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년

 

 

그리스도가 브르타뉴 주변의 가을 들판처럼 황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이 그림은 퐁타벤 근처에 있는 성당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십자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다. 고갱의 자화상 후경에 나타나는 <황색 그리스도>는 그림의 좌우가 뒤바뀌어져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년

 

 

'자화상' 오른쪽에 고갱이 만든, 담배 넣는 항아리인 '괴물 형상을 한 폴 고갱의 얼굴'이다. 고갱은 그림뿐만 아니라 도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악마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성과 악마성 가운데 자신이 있다. 자신과 오른쪽 항아리는 왼쪽의 그림에 대조적으로 어둡다. 그건 자신의 마음 속 모습과 갈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방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기보다는 자화상을 위한 의도적인 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고갱의 얼굴에 작은 빛이 머물고 있다. 고갱의 표정을 보면 진지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냘픈 그리스도의 몸에 비해 덩치 큰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고흐의 방과 고갱의 방은 사뭇 달라 보인다.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흐의 방,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조로 살았고 원시주의적인 것에 경도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거칠었을 고갱의 방.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흐와 비참한 결과로 헤어진 후이고, 그림의 완성은 고흐가 죽은 후다. 고갱의 마음에 고흐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을 테이고 혹시 이 '자화상'에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갱은 고흐가 귀를 자른 이후 자살할 때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보살펴 준 고흐와 테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으며 병마에 괴로워하는 고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에 대해서 예술 전문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사건 전날 밤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크게 다퉜으며 다음날 아침 고갱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고갱이 경찰에게 한 초기 진술에는 고흐 자신이 귀를 잘랐다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고갱이 사건 당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에 머물고 다음날 파리로 서둘러 떠난 것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주장이 진실일지 명확하게 판단할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고흐와 고갱, 애증의 관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과 증오와 우정이 숨어있다.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미궁 속으로 엉뚱하게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과장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고흐와 고갱. 이 두 화가는 생애 마지막까지 서로를 의식하며 최선의 창작을 더해가며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해주는 최고의 육상선수들처럼, 그들은 반세기 동안 상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도록 서로의 예술관을 자극했다.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두 사람이 비슷한 연대에 출생하고, 작품 활동을 벌인 자체가 예술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장면이다. 그리고 고흐가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 사이에 한가람미술관을 들렀고 이번에는 고갱이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두 사람의 위대한 작품을 일 년도 채 안 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언젠가 다음에 또 한 번 한국에 찾아오게 되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꿈꿔본다.

 

 

 

* 2013년 9월 2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전시회가 열린다.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고갱의 최고 걸작인 <설교 후의 환상><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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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DNA에서 양자 컴퓨터까지 미래 정보학의 최전선 카이스트 명강 1
정하웅.김동섭.이해웅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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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사람만 거치면 세계와 엮인다  

 

1967년 하버드대 스탠리 밀그램 교수는 무작위로 선택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미국 내 특정 지역 주민 160명을 무작위로 뽑아 매사추세츠 주에 사는 A와 B에게 전달하는 편지를 보낸다. 친구 중 A와 B를 알고 있거나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실험의 규칙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편지 160통 중 42통이 목표 인물에게 배달됐는데 평균 경유 횟수는 5.5명에 불과했다. 6명만 건너면 미국인은 자국 내 누구와도 연결된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부분을 알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세계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금은 이른바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이 등장하면서 미시세계부터 거시세계까지 아우르는 네트워크 개념으로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말해진다. 이른바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은 서로 영향 받는다. ‘링크’(Link)의 세계다.

 

밀그램의 ‘여섯 단계의 분리’ 법칙은 세상이 촘촘하게 연결된 네트워크라는 사실에 대한 놀라운 증거다. ‘네트워크 이론’식 용어로 표현하자면 노드(Nod)는 고작 몇 개의 링크를 거쳐 완전히 다른 노드에 닿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의 세계는 진정 ‘좁은 세상’이 된 것이다. 개인 간 연결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세계는 이제 온라인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의 개념을 온라인으로 도입한 것이 현재의 SNS라고 일컫는 서비스다. SNS는 단순히 사람 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넘어 비즈니스 분야에서의 인맥관리와 전문 분야에 대한 정보의 생산 및 탐색 등을 기제로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점차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중의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이 그물망의 속성을 파악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네트워크에서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허브와 척도 없는 네트워크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조직하고, 방대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효과적으로 서핑하도록 하는 작동 원리, 즉 ‘좁은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바로 허브(Hub)의 존재다. 1880년대 무성 영화부터 올해 나오는 영화까지 모든 헐리우드 영화배우들이 장르를 넘나들어 같이 출연한 영화작품까지 알 수 있는 영화 사이트의 네트워크는 허브의 역할이 크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영화배우 한 사람 콕 집으면 그와 같이 찍은 영화배우가 누구이며 같이 출연했던 영화작품 수마저 알 수 있다. 과거에 화제가 되었던 미국의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과 다른 배우 사이의 상관관계를 수치화해 계수로 산출해내는 ‘베이컨 게임’의 원리와 유사하다. 허브의 존재는 세포 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이나 ATP 등 몇몇 분자들은 세포내 분자들 간 상호작용 네트워크 내에서 수많은 분자와 동시에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세포 내에서 케빈 베이컨의 역할을 담당한다.

 

 

 

 

 

섹스 네트워크의 기본적인 그래프 (46쪽,

이미지 출처: 사이언스북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허브의 예는 난잡한 성관계로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섹스광이나 사교계의 꽃을 찾는다거나 검색엔진 구글에 이용한다. 사람들의 섹스 상대 및 횟수를 조사하여 ‘섹스 네트워크’로 체계화하면 누가 성병이나 에이즈를 감염되고 어떻게 퍼지는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허브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정보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척도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망은 ‘무작위 네트워크’의 형태를 띤 반면 항공노선은 소수의 허브공항을 기점으로 다수의 공항들이 연결돼 있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형태를 띠고 있다. 척도가 될만한 중간 모델이 없다는 뜻으로 멱함수 법칙을 따른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소수의 링크를 받는 노드는 아주 많고, 무수히 많은 링크를 받는 노드는 소수에 불과하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발견이 중요한 것은 웹과 할리우드, 세포, 항공 노선을 포괄하는, 다시 말하자면 생물학과 사회학, 컴퓨터 공학을 아우르는 공동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생물 정보학과 양자 정보학

 

막대한 양의 정보, 즉 빅 데이터(Big data)를 분석하기 위해 생물 정보학과 물리학 연구방법을 융합하는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생물 정보학이란 DNA 정보로부터 생명체의 생물학적 의미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생물 정보학은 대중에게는 여전히 낯선 학문으로 여겨지지만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를 열거하면 실로 엄청나다. 인간의 유전체 전부를 분석하는 휴먼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유전자 차이에 따라 개인 맞춤형 약을 처방하고 99달러라는 적은 돈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놀라운 세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인류는 생명 정보로 질병을 치료 전에 예방하는 새로운 의학을 이끌고, 원하는 외모와 지능을 가진 아이를 만들려 한다. 심지어는 자동차를 만들 듯 생물학적 부품을 결합해 인공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합성 생물학으로 창조주의 위치마저 넘보고 있다.

 

정보를 이용한 새로운 과학으로 양자 역학을 접목한 양자 정보학도 눈여겨봐야 한다. 양자 역학의 원리를 통해 풀 수 없는 암호를 해독하고 위조가 불가능한 화폐를 식별할 수 있다. 최근에는 1000년 걸릴 계산을 5분 만에 할 수 있는 양자 컴퓨터가 각광받고 있다. 양자 암호와 컴퓨터 장비가 실험용으로 이미 판매되고 있는 현재, 양자 정보학에 주목해 세계 시장에서 국가 경쟁력이 필요하다.

 

 

 

 네트워크 세계의 양면성

 

그러나 날로 발전하는 미래 정보학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앞에서 신중해야 한다. 네트워크의 진화 과정에서 새로 등장한 노드는 링크가 많은 기존 노드에 다시 링크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래서 링크를 독점한 소수가 링크 빈곤 계층인 다수를 지배하는 네트워크의 ‘하후 상박’ 구조가 생긴다. 링크가 많아서 다시 새로운 링크를 받아들이게 되는 이런 빈익빈 부익부를 통해 ‘척도 없는 네트워크’는 공고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심지어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노드가 생길 수 있다.

 

네트워크의 치명적인 약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좁은 세계에서의 상호연계가 불러오는 연쇄반응은 끔찍할 정도다. 인터넷의 복잡한 구조는 잘못된 부분이 나오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바로 그 점이 또 다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연결이 몰리는 대형 노드는 이를 사이버 테러리스트가 발견할 경우 웹 네트워크가 끊길 수 있을 정도로 취약하다. 네트워크의 ‘아킬레스 건’이 바로 그 부분이다. 어느 노드가 아킬레스 건인지 찾기 쉽지 않지만 한번 찾기만 하면 전체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검증이 안 된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쉽게 전달되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보 전염병'(infodemics)도 조심해야 한다.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이 복잡한 세계가 가장 강력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취약하다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글은 이미 링크와 허브의 중요성을 미리 파악하고 이를 하나의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로 구축했다. 사소하고 하찮은 정보까지 검색하면 단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구글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정보 통신 기술과 생명 공학의 지식이 필요한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기본적인 정보 과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생물학, 수학을 공부해야 할 융합의 학습이 필요하다. 학문의 경계선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정보량을 따라가기가 현실적으로 버겁다. KAIST 강연을 준비한 정하웅, 김동섭, 이해웅 교수는 입 모아 하나의 분야에 능통하기 위해서 학습하기보다는 자신이 탐구하고 싶은 대상의 중심으로 공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구글 신이 될 필요가 없다. 기본적인 최첨단 과학 지식을 서핑 보드 삼아 거대한 네트워크의 바다에서 안전하게 서핑을 즐기고 있다면 우리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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