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요, 옐로 하우스에

 

 

 

 

 

 

 

 

 

 

 

 

 

 

 

 

 

 

 

 

 

 

 

 

 

 

 

 

반 고흐, 그리고 폴 고갱.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을 남긴 두 천재화가의 삶에는 교차점이 있다. 고흐가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프랑스 남부의 따뜻한 시골 아를에서 자리를 잡은 뒤 평소 가장 이상적인 동료라고 생각했던 고갱을 설득해 시작한 약 60일간의 동거 생활이다. 바로 1888년 10월 23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일이다. 프로방스 시골 마을 아를에서 이들이 보낸 곳이 바로 고흐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옐로 하우스’다.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년

 

 

미술사적으로 이 60일은 가장 유명한 동거임에 틀림없다.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작품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동거는 고흐와 당시 미술상이었던 동생 테오와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살면서 하나의 예술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했던 두 사람은 고흐가 동생 도움을 받아 아를에 터를 잡으면서 그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 고흐에게 그 대상은 폴 고갱이었다. 테오에게 편지를 써 ‘혹시 고갱이 남쪽으로 올 수 있을까?’라는 기대를 내비쳤고 이런 생각은 일종의 집착으로 발전됐다.

 

고흐는 5월 말부터 다섯 달 동안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 아를에 와서 자신과 함께 살 것을 종용했다. 자신을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있던 테오도 동원했다. 가난한 고갱이 옐로 하우스에서 자신과 같이 살면서 그림을 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데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고갱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출발은 계속 연기했다고 한다.

 

그 전 해 겨울 파리에서 직접 만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이를 통해 훨씬 친밀해졌다. 편지 안에는 아이디어를 나누는 두 사람 얘기도 나오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다. 그런 과정 이후에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 오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거의 이틀 동안의 여행 끝에 아를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됐다. 고흐는 고갱을 위해 방을 준비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그림 <해바라기>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6년 후 고갱은 이에 대해 시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나의 노란 방에는 해바라기들이 노란색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노란 테이블 위의 노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그림의 한 귀퉁이에는 화가의 서명인 ‘빈센트’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내 방의 노란색 커튼을 통해 들어왔던 노란 해는 방을 황금색으로 가득 채웠다. 아침에 침대에서 깰 때면 나는 이 모든 것에서 정말 좋은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너무나 달랐던 작품 성향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흐는 성격이 예민한 데다 작업 환경이 지저분하고 산만했다. 여기에 대해 고갱은 간섭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은 불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화에 대한 열정과 불굴의 신념을 갖고 있는 고갱은 인간의 본성을 파괴하는 문명을 비판하며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때묻지 않은 소박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들을 그렸다. 고갱과 달리 자신을 중생구제를 위해 나선 수도자에 비유한 고흐는 불행한 사람들을 동정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난한 시골농부들의 삶을 정열적인 붓터치로 그려냈다.

 

 

 

 나 이제 그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9년

 

 

고갱과 비극적인 이별을 하고 나서, 요양원에 치료를 받은 후 고흐는 이 때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그리게 된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고흐는 자신이 없는 방 안을 혼령처럼 쳐다본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주인이 방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음을 나타난다. 살짝 열린 환한 창은 고갱과 함께했던 따뜻한 여름날의 추억을 암시한다. 그림 속 많은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양쪽 끝의 문,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의자, 두 짝의 창문, 두 개의 초상화 등. 그건 고흐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다. 어쩌면 고갱을 생각해서인지 그가 떠나간 쓸쓸한 빈자리를 물감으로 채색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의 방」 1888년

 

 

재미있게도 고흐는 옐로 하우스에 있는 자신의 방을 이미 두 점을 그린 적이 있었다. 첫 번째 아를의 방 그림은 고갱이 아를에 오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다. 고갱이 온다는 설렘도 있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영감이 떠올리게 하는 고장에서 갖게 된 멋진 ‘자기만의 방’이었다.

 

1888년 12월, 무슨 마음의 심경이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자르게 했는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당시 고흐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고갱에게 화가 나 있었고, 친구들은 일 때문에 아를을 떠나갔고, 동생 테오는 약혼을 한 상태였다. 고흐는 외로웠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고갱은 바로 떠나 버린다. 고흐는 아를의 병원을 거쳐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요양원에 나온 이후 그는 자신의 방을 세 번째 그리게 된다. 그러나 고흐는 예전에 그 행복했던 옐로 하우스의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아니, 쓸쓸한 고독만 남아 있을 그 곳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 그리고 숨은 우정

 

 

 

 

 

 

 

 

 

 

 

 

 

 

 

 

고흐와 고갱은 신기하게도 평행선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화가로서의 삶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그리고 둘 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고 아를에서 드디어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고갱은 35세 때 주식 중매인에서 화가로 전업한다. 몇 년이 지나, 파리를 떠나 이곳 그림 같은 시장 도시 퐁타벤에 반해 동료 화가들과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황색 그리스도>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1889년

 

 

그리스도가 브르타뉴 주변의 가을 들판처럼 황색으로 그려져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이 그림은 퐁타벤 근처에 있는 성당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십자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리게 되었다. 고갱의 자화상 후경에 나타나는 <황색 그리스도>는 그림의 좌우가 뒤바뀌어져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1889년

 

 

'자화상' 오른쪽에 고갱이 만든, 담배 넣는 항아리인 '괴물 형상을 한 폴 고갱의 얼굴'이다. 고갱은 그림뿐만 아니라 도기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악마주의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신성과 악마성 가운데 자신이 있다. 자신과 오른쪽 항아리는 왼쪽의 그림에 대조적으로 어둡다. 그건 자신의 마음 속 모습과 갈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신의 방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기보다는 자화상을 위한 의도적인 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고갱의 얼굴에 작은 빛이 머물고 있다. 고갱의 표정을 보면 진지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냘픈 그리스도의 몸에 비해 덩치 큰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고흐의 방과 고갱의 방은 사뭇 달라 보인다.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흐의 방,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조로 살았고 원시주의적인 것에 경도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거칠었을 고갱의 방.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흐와 비참한 결과로 헤어진 후이고, 그림의 완성은 고흐가 죽은 후다. 고갱의 마음에 고흐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을 테이고 혹시 이 '자화상'에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갱은 고흐가 귀를 자른 이후 자살할 때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보살펴 준 고흐와 테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으며 병마에 괴로워하는 고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도저히 거스를 수가 없다."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에 대해서 예술 전문가인 한스 카우프만과 리타 빌데간스는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사건 전날 밤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크게 다퉜으며 다음날 아침 고갱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고갱이 경찰에게 한 초기 진술에는 고흐 자신이 귀를 잘랐다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고갱이 사건 당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아니라 호텔에 머물고 다음날 파리로 서둘러 떠난 것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 주장이 진실일지 명확하게 판단할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고흐와 고갱, 애증의 관계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경쟁과 증오와 우정이 숨어있다. 단편적인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를 추리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미궁 속으로 엉뚱하게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며 과장 해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고흐와 고갱. 이 두 화가는 생애 마지막까지 서로를 의식하며 최선의 창작을 더해가며 예술혼을 불태웠으며 이를 위해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의 페이스를 유지하게 해주는 최고의 육상선수들처럼, 그들은 반세기 동안 상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도록 서로의 예술관을 자극했다.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두 사람이 비슷한 연대에 출생하고, 작품 활동을 벌인 자체가 예술사에 있어서는 위대한 장면이다. 그리고 고흐가 작년 겨울부터 올해 초 사이에 한가람미술관을 들렀고 이번에는 고갱이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두 사람의 위대한 작품을 일 년도 채 안 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다. 언젠가 다음에 또 한 번 한국에 찾아오게 되면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동시에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꿈꿔본다.

 

 

 

* 2013년 9월 29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전시회가 열린다. <황색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뿐만 아니라 고갱의 최고 걸작인 <설교 후의 환상><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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