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인의 취향
아네스 자우이 감독, 알랭 샤바 외 출연 / 마루엔터테인먼트 / 2011년 4월
평점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마음의 벽을 ‘섬’으로 표현했다. 프랑스 영화 <타인의 취향>은 사람들 저마다가 가진 '취향'이 그 섬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살면서 얼마나 자주 '내 취향'이라는 말을 내뱉는가. 내 타입, 내 스타일로도 말해지는 이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공공해 진다. 이 사람 저 사람, 이 것 저 것 다 경험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교훈일 뿐 자신을 살아내기도 버거워지는 나이쯤이면 나와 공감대를 지닌 묶음에 들어가는 게 속 편해진다. 이제 그 밖의 세상은 굳이 어울릴 필요도 어울리고 싶지도 않은 여집합이 되고 만다. 꽤 여러 곳에 걸쳐져 있던 공통집합은 갈수록 줄어들어 어느새 작은 섬이 되고 만다.
<타인의 취향>에 떠 있는 섬들을 살펴보자. 성공한 사업가 카스텔로는 적당한 성공에 안주한 채 늘 먹을 것만 찾는 속물스런 구세대 남성의 전형이다. 이에 반해 그의 아내 앙젤리크는 전문가적인 취향과 품위를 지닌 중년여성임을 자부한다. 불균형, 그러나 뜻밖에도 둘의 관계는 원만하다. 저속한 취향은 고사하고 아예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일체의 취향조차도 가지지 못한 카스텔라가 그저 부인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맞춰주었으며, 아내 역시 오직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벽하게 구축해놓은 가정의 적잖은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기괴해 보이는 부부의 평온은 카스텔라가 뜻밖의 계기를 통해 ‘취향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카스텔라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것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실제로 한 점의 그림, 한 편의 영화나 연극, 시, 음악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나 이별, 심지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TV 드라마에서 스치듯 들리는 한 마디 대사로도 영혼을 뒤흔드는 경천지동의 균열은 시작될 수 있다. 조카가 등장하는 연극작품이 상연되는 극장에 가자는 아내의 청이 귀찮다. "지루한 연극을 왜본담". 그의 아내는 올케의 새집 단장을 도와주며 예쁜 인테리어를 싫어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쩜 저런 스타일을 고르지?" 연극배우 클라라는 영어회화 아르바이트로 만나게 된 카스텔로가 그냥 싫다. "대머리에 콧수염. 문학적인 소양이라곤 전혀 없고..." 카스텔로의 운전기사도 그의 보디가드도 저마다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왜 저들은 저렇게 살고 있는 거지?"하면서.
초반 영화는 누가 주인공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등장인물 각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사회적인 관계 이외에는 모래알처럼 흩어진 이들 사이에 사연이 생겨나는 건 카스텔로와 클라라가 만나면서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 관객도 깜빡 속을 만큼 무의미하게 지나친다는 점이다.
영어회화 선생으로 면접을 받으러 온 클라라에게 공부에 별 관심이 없던 카스텔로는 형식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두 사람은 이토록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조카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간 카스텔로는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클라라를 보게 된다.
이제 카스텔로에게 그녀는 그냥 클라라가 아니라 특별한 클라라가 된다. 누군가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인다는 건 그 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특별한 것이 된다는 의미다. 문화적인 것들에는 전혀 무관심하던 카스텔로는 클라라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연극을 보고 예술가들을 만난다. 하지만 클라라에게 쏟는 그의 정성은 "내 타입이 아니야"라는 단 한가지이유로 무참히 거부당한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콧수염을 밀어 버리고 사랑을 고백하던 날 그녀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그를 밀어낸다.
비로 클라라에게 어설픈 영시로 사랑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가슴 아픈 거절의 상처를 받기도 하짐나, 그러는 가운데 차츰 그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가를 새삼스레 느끼기 시작한다. 아직 잘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드는 그림을 구입하고, 내친 김에 공장에는 거대한 벽화를 주문한다. 유능한 부하직원의 말을 무시하고 매사에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진행하던 그가 직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고민하며, 벽화를 주문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카스텔라는 '변화'해간다.
하지만 앙젤리크는 남편의 이런 변화를 전혀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편은 변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저 자신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분명해서 타인의 입장이나 취향을 배려할 수 잇는 여지가 전혀 없다. 모든 이들보다 우월함을 확신하는 그녀에게 있어, 타인의 취향이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저급한 것들이고, 이에 따라 세상은 자신의 일방적인 돌봄만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 그런 앙젤리크에게 남편은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는 한 마리 동물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에게 머리를 기대고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토닥거리며 마치 한 마리 강아치처럼 대하는 것뿐이었다.
이렇듯 타인과의 만남에 있어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소통의 오만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파국을 자초한다.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아내의 무감각함은 역설적으로 카스텔로를 '각성'하게 한다. 아내에게 있어서 자신이란 존재는 한 '인간'이 아닌 일종의 '수단'이나 '배경'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카스텔로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이기적인 남편으로부터 '인형'으로 취급받는 삶을 살았던 <인형의 집> 주인공 '로라'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아내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신이 선택한 단 한 점의 그림이 무참히 떼어진 후 결국 카스텔로가 아내를 떠나는 설정은 연극 <인형의 집>의 현대적인 범주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의 예술이라던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벌레처럼 싫던 그가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무대에 올라 끊임없이 객석을 쳐다보는 클라라. 놓쳐 버린 사랑으로 슬픔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커튼콜을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영화 내내 냉정함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무대 맨 앞에서 카스텔로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취향만큼 견고하게 개인을 싸고 있는 껍질이 어디 있을까. 소통의 원천은 마음이라는 걸 잊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자기방어, 단지 그것이 취향인데 말이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이 ‘운명’이라는 단독 엔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라는 수동 기어와 핸들링으로 선택되고 작동된다고 암시한다. 그렇다면 연애한다는 것은 너와 나, 두 사람 간 취향의 선택과정이 아닐까. '나의 취향’이란 스스로를 남 앞에서 표현할 줄 알고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결국 나의 취향이란 나의 존재방식이다. 나의 취향을 인정받고 관계의 만족감을 느끼려면 바로 타인의 취향과 교감했을 때 가능하다. ‘타인의 취향’을 수용하여야 나의 취향이 자라고 성숙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