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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ㅣ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적극적 아웃사이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동네 친구들 몇이서 공터에 비밀 본부를 만들곤 했다.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후 사람 인적 드문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 곳에서 모이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지 정한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 곳엔 부모님의 잔소리가 없다. 우리들만을 위한 세상이다. 거기에 앉으면 온갖 즐겁고 기발한 생각들만 떠올랐다. 그 곳은 일탈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과 아웃사이더의 관조적 여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아웃사이더는 내부자를 의미하는 인사이더와 구별되는 인간형으로, 국외자 또는 이단자를 뜻한다. 타의에 의해 어떤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배척되는 경우는 소극적, 수동적 아웃사이더이고, 소속 집단의 규칙이나 질서에서 스스로 벗어난 경우는 적극적, 능동적 아웃사이더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비밀 본부를 만든 것은 적극적 아웃사이더가 되기 위함이었다.
콜린 윌슨은 이 작품에서 하찮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에게서 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도 바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인사이더는 제도권 내 사람이고, 아웃사이더는 제도권 밖의 사람이다. 인사이더는 힘이 있고, 아웃사이더는 힘이 없다. 그래서 인사이더는 이끌고, 아웃사이더는 따른다. 이것이 보통 사회인데, 윌슨은 다른 시각에서 아웃사이더를 바라보았다.
인사이더 같은 아웃사이더
그는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카뮈의 <이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과 니체, 반 고흐 같은 실제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아웃사이더들은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일상이 따분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고역이며 노예들에게나 알맞다고 느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이나 사상가들은 이 감정을 문학과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웃사이더들은 체제 안의 순응자인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능동적, 창조적 아웃사이더들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를 넓혔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향을 창조했다.
윌슨은 이 과정에서 문학, 철학, 역사, 신학을 아우르는 고전 작품 속에서 발굴해낸 주인공들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우한다. 상호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답을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대치되는 두 가지 질문들, 예컨대 ‘존재와 무’, ‘현실과 비현실’ 등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본질적으로 ‘실천의 문제’, ‘사고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보통의 소시민들과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되는데 아웃사이더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풀어보자면,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으면 ‘무임승차’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윌슨의 눈은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역할이 역전되는 위치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이더가 스스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아웃사이더가 나설 때 그렇다. 이 상황이 오면 아웃사이더가 사회를 이끌고 인사이더는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한다. 어느 순간 아웃사이더는 윌슨이 활동했던 영국의 문인클럽, ‘분노의 젊은 사람들’(Angry Young Men)처럼 세상을 향해 진실을 토해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그가 지칭하는 ‘아웃사이더’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치적 소외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아웃사이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약자, 소수자란 의미보다는 그 파장이 깊고 넓은 것이다. 글의 모두에 인용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할 정도다.
아웃사이더가 이끄는 세상
공중파 방송의 저녁 아홉시 종합뉴스를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이의 보도 내용들은 부정적인 유형을 이루어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매일 매일의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유형화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향은 거의 무감하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물질과 결부된 것이어서 우리들의 삶에서 물질의 위의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 인사이더는 정치를 주름잡았고, 경제를 주물렀다. 엄청난 돈을 만지며 승자의 축배를 들었다. 정치적으로 인사이더는 리더였고, 아웃사이더는 추종자였다. 경제적으로 인사이더는 가진 자였고, 아웃사이더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사회적으로 인사이더는 갑(甲), 위너(winner)였고, 아웃사이더는 을(乙), 루저(loser)였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힘을 이기적으로 썼을 뿐 사회를 위해 활용하지 못했다. 돈으로 그들만의 아성을 쌓았을 뿐 나누기에 인색했다. 위너였음에도 루저를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문화의 현실적 풍토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과 의식이 그런 것에 침윤되어 허덕거리더라도 이를 당연시하고 거부하는 몸짓조차 짓지 않는 세태 속에서 아웃사이더들은 어쩜 일탈행위자들로만 여겨질 지 모른다. 이러한 모습을 24세 청년 윌슨이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말이다.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 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 (322쪽)
인구 통계적으로 소수라고 해서 사회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의 소리를 더불어 함께 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진짜 아웃사이더는 일반인도 이해하지 못한 부정의 환상을 볼 줄 알며 창조적이다. 갑의 횡포로 시끌벅적했던 2013년, 곤혹을 치른 갑의 인사이더도 환자임을 자각하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이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