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34
코르넬리아 슈타베노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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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게 피운 화가의 길

 

 

 

 

 

 

앙리 루소  『램프가 있는 자화상』 1900~1903년

 

 

 

보통 아마추어 화가라고 하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정 화가에게 사사를 받고 활동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서구의 경우 아마추어 출신 유명한 화가로는 반 고흐와 앙리 루소가 있다. 특히 앙리 루소는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미학의 길을 열었고, 원시주의 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피카소, 르동, 마티스 등 화가들과 전위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 루소는 살아생전에 일반인들로부터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죽어서도 화가의 이름 루소보다는 성()이 같은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널리 알려져 있다. 본인을 그 유명한 사상가의 이름과 혼동한다면 루소 입장에서는 통탄한 일이다.

 

 

 

 

 

 

앙리 루소  『세관』 1890년

 

 

루소는 꾸준한 준비로 전업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예술가다. 전직이 세관원이었다. 1871년부터 무려 22년 동안 파리 세관의 세금징수원으로 밥벌이를 했다. 24시간 근무한 후 쉬기 때문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있었다. 루소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1884년 마흔 살 때였다. 이때 루브르박물관에서 유명한 그림들을 베껴 그릴 수 있는 모사 허가증을 받는다. 그는 직장과 가정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그럼에도 시간을 쪼개서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그림을 그렸다. 가슴 한 켠에는 뛰어난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초보자 티를 겨우 벗을 무렵인 1885, 꿈에 그리던 살롱전에 난생 처음 출품한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자 노력하는 것’(헤밍웨이)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나는 실험에 실패할 때마다 성공을 향해 한발 짝 한발 짝 다가가고 있다’(에디슨)는 말에 공감이라도 한 듯이 다시 캔버스와 씨름을 계속했다.

 

이듬해인 1886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한다. 살롱전의 고답적인 스타일에 반기를 든 젊은 화가들이 창설한 앙데팡당전은, 루소가 새로운 그림을 선보인 단골 무대였다. 7년 동안 출품한 작품이 20점이나 된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루소의 그림을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사실 루소의 그림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을만큼 특이하다. 그 당시 많은 그림들이 유사한 스타일로 세련되게 그려졌던 것과 달리 아마추어가 그린 듯한 단순화된 형태와 원근법을 무시한 기묘함, 이질적인 색상 대비 등이 관람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루소가 아니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 만큼 화가로서 자부심은 시들지 않았다. 그 시대 대부분 사람들이 그를 아마추어 화가, 우스꽝스러운 기인으로 여겼지만 루소 본인은 자신을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진지하게 믿었다. 1893, 루소는 그림에만 전념하기 위해 세관을 그만둔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듯이 과감하게 전업작가로 나선다.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열정은 뜨거웠지만 반응은 냉담했고, 생활마저 궁핍했다. 그런데 고진감래였다. 1905, 뜻밖의 희소식이 날아든다. 예전에 낙선의 고배를 마셨던 가을 살롱전에 작가로 초대를 받은 것이다. 마침내 제도권 비평가들도 그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화상들도 원시적인 동시에 몽환적인 루소의 그림을 구입해갔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그리다

 

 

 

 

 

 

앙리 루소  『나, 초상-풍경』 1890년

 

 

 

루소는 파리 풍경을 그렸다. 파리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있고, 강변으로 낚싯줄을 드리우거나 산책을 하거나 느린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둔하고 우직하게 그렸다. 루소에게는 낮선 풍경을 제 눈으로 읽어내는 안목이 있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만국박람회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참가국 국민과 신상품이겠지만 박람회에서 제일 떠들썩한 화젯거리는 단연 에펠탑이었다. 센 강변에 우뚝 선 에펠탑은 박람회장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였다. 그해 처음 전깃불 조명이 박람회에 사용돼 덕분에 늦게까지 입장이 허용되고 에펠탑 위로 설치한 큼직한 조명탑이 파리 시내를 비추는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했다. 번영을 누리고 있던 파리는 세상의 중심으로서 당당했다. 루소는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나, 초상-풍경>에서 루소는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포기했다. 루소는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자화상에 애국심에서 우러나는 프랑스의 기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두 가지 상징물인 에펠탑과 열기구를 그려 넣었다. 당시 화가들은 에펠탑이 흉물이라고 화면에 그려 넣기를 꺼려했지만 유일하게 쇠라만이 루소보다 1년 앞서 에펠탑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다.

 

루소는 자신의 그림 속 곳곳에 만국기가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의 환희를 표현하는 등 신념에 찬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살롱전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지식층의 전위미술과 경쟁했다. 이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정글의 세계

 

 

 

 

 

 

앙리 루소  『굶주린 사자』  1905년

 

 

 

루소는 태어나 한 번도 프랑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파리 밖 지척에 있는 아프리카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파리 사람들에게 마치 아프리카 탐험을 마치고 곧 돌아와 그린 것처럼 생생하게 과장하고 뻥 튀겼다. 사람들은 루소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열대의 정글 원시림에 다녀와서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루소의 타고난 ‘뻥쟁이’ 기질이 한몫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 원정을 떠난 일이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수도를 함락하고 오스트리아 선제후 막시밀리안 백작을 멕시코 황제로 임명했다. 뒤이어 멕시코에서 봉기가 일어나 주둔한 프랑스 군대가 퇴각했다.

루소는 자기가 원정군에 참전해서 싸우다가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고 허풍을 쳤다. 하급 세관원으로, 아마추어 화가로 아무런 영향력이 없던 그에게 이렇게라도 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지어낸 말이었다. 정글 풍경도 루소가 제 입으로 다녀와서 보고 그린 풍경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사실 루소는 열대식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는 식물원에 가본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루소는 일종의 과대망상증이 있었다. 그 과대망상이 어쩌면 이리 멋진 정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에 그림의 전달력과 흡입력은 더욱 강력해졌고, 결국 그는 정글의 화가로 굳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상상력이 주는 힘은 예술가로서의 루소에게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상상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가지고 살았던 화가

 

 

 

 

 

앙리 루소  『꿈』 1910년

 

 

 

루소는 시대적인 흐름과 무관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현실과 형이상학적인 구별이 무의미한 이색적인 세계였다. 대표작의 하나인 <꿈>에도 두 세계는 공존한다. 원시림 한가운데 뜬금없이 알몸의 여인 야드비가가 몸을 돌려 정글을 둘러보고 있다. 숲속에는 사자와 코끼리, 새들이 모두 주시하고, 평화롭게 잠든 야드비가의 아름다운 꿈속에서 뱀을 벗처럼 부리는 사람이 부는 피리소리에 귀 기울인다. 달빛이 꽃잎과 신록의 나무 위에서 빛날 때 황갈색 뱀이 피리가 내는 선율에 귀 기울인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루소의 꿈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그렇게 그렸는지 가시 돋친 질문을 퍼부었다. 루소의 대답은 간단했다.

 

 

“원시림 풍경에 무슨 붉은 소파냐고요? 야드비가는 소파에서 잠시 잠든 채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요술쟁이가 부는 피리소리를 듣습니다. 구성진 피리 선율이 잠든 숲을 깨웁니다. 야드비가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원시림 한복판에다가 소파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의 방에서 본 빨간 의자가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의자를 본 순간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폴란드 아가씨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다. 화면 가운데에 멕시코풍의 식물을 빼곡히 그려 넣고, 아름다운 새와 꽃, 과일도 배치했다. 또 수풀 사이에 사자와 코끼리도 더했다. 그런데 야드비가는 누구일까?

 

그림 속 여인의 실제 모델에 대해서 루소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루소가 젊어서 사랑했던 폴란드 여인일까. 루소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이 그림을 완성했던 시기인 1910년에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평생 마음에 담아뒀던 영원한 사랑 야드비가를 자신의 화폭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기로 마음 속으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진흙구덩이 속을 뒹굴고 산다. 그러나 우리들 중 몇몇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꿈을 갖고 산다”라고 말했다. 화가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현실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헛된 환상에 살면서 일반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열대우림 속의 은밀하게 속삭이는 마술과 같은 소박한 자연의 이야기를 앙리 루소는 각박한 현실에서 별을 그리듯이 자신의 세계를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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