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열 달 넘게 엄마 뱃속에서 준비를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오면 1년이 넘도록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뿐이랴. ‘아기’라고 불리는 동안은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아기들이 사랑을 받으며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무기는 우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어디가 아플 때,'응가'를 해서 뒤가 축축할 때, 심지어는 익숙지 않은 환경에 처하면 어김없이 운다. 사실 이것 하나로도 아기가 원하는 ‘응급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비장의 무기는 웃음이다.  필요한 게 없어 울지 않는데도 식구들이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고 시간이 나면 ‘까꿍’하면서 놀아주는 것은 아기가 방긋거리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을 읽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정신과 의사인 꾸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찾은 환자들에게 늘 ‘왜 아기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침묵이 흐른다. 그것은 아기들은 잘 알지만 어른들은 잊어버리고 사는 그 무엇이었다. 잠시 후 꾸뻬가 일러주는 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사람들이 웃은 아이에게 더 다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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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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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마시는 공기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이 들어있다. 병을 일으키는 세균도 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이물질들을 모두 뺀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어질까? 아니다. 오히려 면역력이 사라져 인간의 몸은 더 큰 질병에 노출된다. 이 무결점 공기 이론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고통과 상처없이 순전 무결한 사랑. 세상의 모든 연인이 바라는 것일 테지만, 그 완벽한 커플에 우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질문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다.

 

밸런타인데이.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출근길을 서둘던 사내. 자신의 차에는 흠집이 나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밸런타인데이’라는 사실이 우울하다. 그는 사랑을 고백할 여인이 없었다. 건너편 모타우크로 가는 기차. 출발 전이다. 남자는 무작정 건너가 기차에 오른다. 출근길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왜 충동적으로 그랬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덧 그는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람과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바닷가의 한 편에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와 같은 칸에 탔다. 소심한 남자와 달리 여자는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여자는 남자 옆에 가 앉는다. 착하고 소심한 조엘(짐 캐리 분)과 당당하고 자유로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은 그렇게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계속되는 말다툼 끝에 이별에 이르고야 만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희한한 병원. 이 사실을 안 조엘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삭제시킨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조엘은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진다. 지워질수록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의 기억은 그 어떤 질서도 가지지 않은 채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가 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지워가면서 조엘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무의식의 무덤에서 파내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경험했던 일들은 시간과 중요도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따라 기억 속에서 다른 선명도를 갖는다. 최근의 일들은 또렷하고 과거의 일들은 흐릿하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무의식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삭제작업들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상처없이 안전하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연인들의 욕망이다. 헤어진 경우에는 마음에 문신처럼 남겨진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워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랑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든다. 누구에게나 사랑보다 그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아픈 순간이 있다. 시간은 모든 연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인들은 서로에게 흠뻑 빠져 들기도 하지만 때론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을 후회 섞인 탄식을 되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때 사랑했던 그 혹은 그녀와의 기억을 쉽게 지울 수는 없다. 주고받았던 선물, 편지는 없애버리면 되고, 사랑을 나눴던 장소는 찾지 않으면 되지만 ‘내 머릿속의 메모리’는 ‘리셋’(reset) 다고 될 것이 아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내장된 기억장치의 용량 차이로 그 속도가 문제일 뿐이다.그래서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까?’ ‘그럼 한 번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지워져가는 두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터널 선샤인>은 결국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것, 아픈 기억까지도 포함한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자세라는 함의다. 또한 사랑의 추억이란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영화는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란 의식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의식의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주변 인물들도 추억을 삭제했지만 우연한 순간에 동일한 상대를 향해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의 눈에 비친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시시각각 바뀌어 있다. 사랑은 질투와 욕망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연인과 헤어진 후의 사무치는 마음을 그의 시 '빈집'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중략)'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난 후에, 오히려 그 기억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을 다시 재생하면서 그는 연인을 잊으려 했다. 조엘이 사랑의 기억을 소거하면서 잊으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방법이야 무엇이든,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에서 지우는 과정조차 달콤하고도 쓰라린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사랑하면서 만나게 된 눈물, 상처, 웃음, 행복은 사랑에 관한 모든 순간과 과정을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훗날 잔잔한 추억이 되어 감동으로 재생된다. 첫 만남의 설렘이 영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느끼는 이 딜레마를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와 그로 인한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사랑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진정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면 어떤 상처가 있다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 상처들을 다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설렘의 기억을 얼마나 자주 재생버튼을 누르느냐, 그것이 사랑을 유지시켜나가는 관건인 것이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이 영화에서 몇 번 인용되는 니체의 잠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에 저항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니체의 명언을 살짝 바꿔봤다. “망각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용감하게 시간의 무자비함에 맞서 사랑의 정수를 맛보려 하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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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미하다.

 

 

 

 

 

 

 

 

 

 

 

 

 

 

 

앙소르는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화가였다. 가면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  「이상한 가면들」 1892년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가면들은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1890년

 

 

가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인 「음모」는 앙소르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하듯 묘사해내고 있다. 그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괴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가면 모습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페터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에서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화가의 자화상」 1609년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앙소르 자신이다.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바로크식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화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명한 화가의 얼굴과 상당히 비슷하다. 바로 루벤스다. 사실 앙소르는 이 그림에서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대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앙소르는 같은 출신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처럼 자신의 예술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암울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루벤스의 가면으로 변장하여 자기위안을 하고 싶었던 걸까.

 

 

 

 

 

 

 ♣ 우리가 만드는 가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고립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기 소외에 빠지며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경직되고 냉소적인 군중의 가면은 자기실현에 빠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녀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페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진중권 『미학 에세이』27~28쪽)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SNS는 각기 다른 가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몰락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진중권은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실재와 미디어 사이의 간극이다. “가면 자체가 곧 인격”이 되어버린 시대 속에서 언제까지 허망한 가면을 쓴 채 현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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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너무 다른 수많은 광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기 집 문턱만 넘어서면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놓는다'는 식으로(몽테뉴) '자기 집안에서는 엉망진창'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마침 어제 저녁 식탁 위에 올라운 '두드러진 화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 * *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cyrus 2013-10-23 18:41   좋아요 0 | URL
oren님이 인용해서 소개한 몽테뉴의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척 피곤한 일인데 참고 지낸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 김주하 앵커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송에서는 남편이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오랫동안 얼굴에 씌여있는 가면을 한번에 완전히 벗는 것도 쉽지 않고요.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개정판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1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마음의 불(火)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119소방센터의 벽면 현수막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월화수목금토일, 화내지 맙시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물론 불(火)이다. 소방당국이 불조심 생활화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문구가 이색적이다. 그 표어대로 불조심은 어느 하루, 어느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에서 일반에 먼저 와 닿는 화는 불보다는 우리 일상에 흔한 화(Anger)다.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건 불조심뿐만이 아니다. 화(火)는 내 마음에 생길 수 있는 불이다. 화를 다스려야 삶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정말 성질 죽이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누구는 성질 없어서 조용히 있나. 혈압 오르는 일들이 한두 번이어야지. 가끔은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큰소리 지르며 성질 한 번 내보고 싶은 날이 있다.

 

요즘엔 사소한 이유로 시작한 우발적 싸움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질과 핏대를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급해지고 화를 참지 못하는 현대인의 성격 탓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화를 내고 살아간다. 화를 낸다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다. 하지만 물건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화가 풀릴까. 아니다. 화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분풀이할 대상을 찾는데, 이는 결국 화의 악순환만 더할 뿐이다. 그렇다면 화를 참아야 하는 걸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야 하는 걸까. 그것 또한 역시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다. 개인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며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치솟지만 집단적 요구는 더 늘어간다. 왜소한 개인의 자아는 거대한 세계와 맞부딪치면서 보이지 않게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다.

 

 

 

 ♣ 마음의 씨앗을 다스리기

 

틱낫한 스님의 책 『화』가 제목만으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이유가 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의 부제다. 여기서 언급되는 ‘화(Anger)’는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나는 성’을 뜻하는 한자어 ‘화(火)’를 지칭한다. 틱낫한 스님은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나타난다. 화가 나 있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악담을 퍼붓게 된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스스로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다. 화가 나는 이유는 자기중심주의에서 출발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 무엇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님은 화를 표출하는 것도, 화를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스님은 우리 신체와 오장육부처럼 화도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없애려 하지 말라고 한다. 마치 우는 아기라고 생각하며 화를 보듬고 달래야 한다는 거다.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그래서 화를 다스리는 게 우리 인생에서 평생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화’는 화를 ‘마음의 씨앗’으로 본다. 우리 마음에는 기쁨 사랑 같은 긍정의 씨앗과 미움 절망 같은 부정의 씨앗이 있다. 평상시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 지는 바로 자신에게 달렸다. ‘마음의 씨앗’인 화를 인정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를 스님은 ‘마음 밭 갈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남 탓하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다. 스님은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떠한 자극이 와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평생 전쟁과 폭력의 중심에서 온몸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체득한 결과라고 한다.

 

 

 

 ♣ 아이처럼 화를 끌어안기

 

스님은 화가 났을 때 이를 부인하지 말고, 화 난 자신을 인정하고 맞이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분노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음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단다. 마음에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일단 모든 것을 중단하고, 우선 그 아이를 먼저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칭얼대는 화라는 아이를 잘 달래지 못할 때 그 아이는 실제 아이가 아니라 힘을 가진 어른일 경우가 많아서 언제 어느 때 치명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될지 모른다는 게 스님의 우려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스님의 지적대로 일시적으로 아이를 달랬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생각의 변화가 와야 한다. ‘생각이 즉 에너지’이기 때문에 생각이 화로 들끓고, 그 에너지가 또 다른 화를 재생산하는 것을 멈추려면 ‘분노를 가져왔던 생각의 변화’, 즉 ‘신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도한 분노의 뒤엔 ‘절대적 신념’이 감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이래선 안 된다’,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분노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화를 훨씬 더디게 낼 수 있다. 또한 화가 나더라도 다른 이의 허물을 덜어주고 용서해 준다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화를 분출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화 풀기는 행동에 대한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눈앞의 만족을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야만사회의 전형이다. 화를 평화롭고 긍정적으로 풀 것이냐, 아니면 비이성적으로 폭발시킬 것이냐. 그 통제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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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수록 더하는 ‘빈익빈 부익부’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이들의 2000배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대 80’을 넘어 ‘0.1대 99.9’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최하위 빈자들이 더 가난해지는 상황을 “협력, 상호 신뢰, 공유, 인정, 존중 등을 토대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으로 대체한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s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가 합쳐진 말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뜻한다. 전 세계 상위 0.1%를 차지하는 글로벌 슈퍼리치(Super rich)가 플루토크라트다.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고, 점점 더 끼리끼리 뭉치며, 갈수록 그 나머지 사람들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점점 이들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로 나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격차를 통해 슈퍼리치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더욱 커진 파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그 파이에서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큰 조각을 차지한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별 불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인데, 왜냐면 그들도 슈퍼리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 개인화된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

 

 

 

 

 

 

 

극심한 불평등의 현장, 인도 뭄바이의 빈민촌 안나와디에 사는 주민들도 그렇다. 안나와디는 새로운 부의 상징이 된 뭄바이 사하르 공항 인근, 초특급 호텔 5개가 에워싸고 있는 빈민촌이다. 이곳에 사는 누군가는 “우리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있는 똥 같은 존재”라고 자조한다. 대부분은 넝마주의로 생계를 이어간다.

 

아침마다 공항 일대에 넓게 흩어져, 내다팔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넝마주이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뭄바이에서 매일 쏟아지는 8000톤의 쓰레기에서 다만 몇 킬로그램을 건지려고 돌아다닌다. 까만 차장 안에서 내던지는 구겨진 담뱃갑을 주우러 달려가고, 물통과 맥주병을 찾아 하수구를 훑고 쓰레기 하치장을 뒤진다. 저녁이 되어 폐품을 담은 삼베 포대를 짊어지고 빈민촌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흡사 돈벌이에 이가 다 빠지도록 혈안이 된 산타 행렬 같았다.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반비, 15쪽)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자 그만큼 불평등도 심각한 도시, 인도의 뭄바이. 뭄바이의 화려한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공항과 특급 호텔들의 그림자 뒤에는 그 성장과 발전에서 비껴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토착민과 이주민,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갈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 낀 여성들의 젠더 갈등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고속 성장시대 특유의 한탕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신분 승상을 위해 극우 정당의 하수인이 된 여성 아샤, 폐품 분류에 대한 천부적 재능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무슬림 소년 압둘,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인재가 되고자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대학생 만주 등 안나와디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삶을 버티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빈곤의 고통에 벗어나 '중산층'이 되길 바라는 '야망'도 있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쓰레기를 줍는 생활로 연명하는 것도 버거운데 신분 상승까지는 힘들다.

 

그 곳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집단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면서, 안나와디 사람들의 공통된 ‘희망’과 ‘욕망’이 개인화되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타인에게 무심할 정도로 고통에 공감할 여지가 없을 만큼 참혹한 삶이 빈민촌 사람들의 도덕관념을 위축시켰다.

 

 

  

 ♣ 낯익은 세상

 

 

 

 

 

 

 

 

 

 

 

 

 

못 쓰는 물건들과 못 쓰는 물건을 수집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인도 안나와디 사람들의 삶은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흉물스러운 쓰레기매립지 ‘꽃섬’에도 자본주의 욕망과 그로 인한 희생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정말 ‘낯익은 세상’이다.

 

인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대한민국, 그것도 쓰레기매립지 그곳에서도 사람이 산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주워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드는 사람들이다. 반입되는 쓰레기차에 따라 구획이 나뉘어져 있어 권리금을 내야하고 등록증도 갖춰야 한다. 치열한 경쟁은 물론이고 권력의 질서마저 존재한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

 

쓰레기를 뒤져본 적이 있는 자는 안다. 악취 나는 오물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만든 집이 많다. ‘꽃섬’ 사람들은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풍경은 인도 안나와디에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우리는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단지, 그 불편한 세상을 일부러 외면해서 못 보고 있을 뿐이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 쓰고 버리고 또 재생하고. '꽃섬'에는 꽃이 없다. 그 주변에만 온통 장미 꽃밭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가 만들어 낸 영양분으로 '행복'이라는 장미가 자라나고 있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자주 입에 꺼내기가 쉽지 않은 ‘쓰레기’ 얘기. 새로운 제품 광고와 소비 욕구가 판을 치는 환락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바로 우리들 얘기다. 우리 주변의 낯익은 세상이다.

 

쓸모 때문에 생겨난 게 쓰레기다. 당초에는 긴요한 물건이었을 테고 사랑도 받았을 것이다. 버려지기 전까지 최적의 효용을 자랑했겠지만 쓸모를 잃어버린 순간, 쓰레기가 되고 만다. 쓰레기 없는 세상이 있겠는가. 문명은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폐기물 더미에 인간을 몰아넣고 운명처럼 살아가도록 했다.

 

종전까지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 쓰레기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 모든 상품이 1회용으로 둔갑하면서 1회용 사랑과 1회용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입양한 아이조차 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 채 과잉, 잉여, 초과 인구가 되는 인간이 늘고 있다. 말 그대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버려지는 쓰레기화되는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은 디지털 첨단화와 자본주의로 인한 지구화의 필연적 결과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자본의 눈에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불량품이나 쓰레기로 비친다. 쓰레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점차 배제되고 격리된다.

 

저자에 따르면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쓰레기화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국가의 난민들이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향해 합법적 혹은 불법적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국가는 이 이주민들을 이른바 게토(Getto)로 몰아내거나 통제하는 등 영토를 요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안나와디와 한국의 꽃섬과 같은 빈민촌이 늘어난다. 반면 자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러니다.

 

자본주의는 빈민촌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으며 전 세계적 불황과 비정규직화, 무한 경쟁은 안 그래도 불안한 빈민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인간마저 쓰레기가 되는 이 낯익은 세상에 인간은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서 있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여겨졌던 이와 같은 현상은 이제 ‘일상’이 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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