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미하다.

 

 

 

 

 

 

 

 

 

 

 

 

 

 

 

앙소르는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화가였다. 가면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  「이상한 가면들」 1892년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가면들은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1890년

 

 

가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인 「음모」는 앙소르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하듯 묘사해내고 있다. 그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괴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가면 모습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페터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에서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화가의 자화상」 1609년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앙소르 자신이다.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바로크식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화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명한 화가의 얼굴과 상당히 비슷하다. 바로 루벤스다. 사실 앙소르는 이 그림에서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대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앙소르는 같은 출신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처럼 자신의 예술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암울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루벤스의 가면으로 변장하여 자기위안을 하고 싶었던 걸까.

 

 

 

 

 

 

 ♣ 우리가 만드는 가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고립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기 소외에 빠지며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경직되고 냉소적인 군중의 가면은 자기실현에 빠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녀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페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진중권 『미학 에세이』27~28쪽)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SNS는 각기 다른 가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몰락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진중권은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실재와 미디어 사이의 간극이다. “가면 자체가 곧 인격”이 되어버린 시대 속에서 언제까지 허망한 가면을 쓴 채 현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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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너무 다른 수많은 광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기 집 문턱만 넘어서면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놓는다'는 식으로(몽테뉴) '자기 집안에서는 엉망진창'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마침 어제 저녁 식탁 위에 올라운 '두드러진 화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 * *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cyrus 2013-10-23 18:41   좋아요 0 | URL
oren님이 인용해서 소개한 몽테뉴의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척 피곤한 일인데 참고 지낸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 김주하 앵커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송에서는 남편이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오랫동안 얼굴에 씌여있는 가면을 한번에 완전히 벗는 것도 쉽지 않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