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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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마시는 공기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이 들어있다. 병을 일으키는 세균도 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이물질들을 모두 뺀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어질까? 아니다. 오히려 면역력이 사라져 인간의 몸은 더 큰 질병에 노출된다. 이 무결점 공기 이론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고통과 상처없이 순전 무결한 사랑. 세상의 모든 연인이 바라는 것일 테지만, 그 완벽한 커플에 우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질문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다.

 

밸런타인데이.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출근길을 서둘던 사내. 자신의 차에는 흠집이 나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밸런타인데이’라는 사실이 우울하다. 그는 사랑을 고백할 여인이 없었다. 건너편 모타우크로 가는 기차. 출발 전이다. 남자는 무작정 건너가 기차에 오른다. 출근길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왜 충동적으로 그랬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덧 그는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람과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바닷가의 한 편에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와 같은 칸에 탔다. 소심한 남자와 달리 여자는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여자는 남자 옆에 가 앉는다. 착하고 소심한 조엘(짐 캐리 분)과 당당하고 자유로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은 그렇게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계속되는 말다툼 끝에 이별에 이르고야 만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희한한 병원. 이 사실을 안 조엘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삭제시킨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조엘은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진다. 지워질수록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의 기억은 그 어떤 질서도 가지지 않은 채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가 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지워가면서 조엘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무의식의 무덤에서 파내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경험했던 일들은 시간과 중요도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따라 기억 속에서 다른 선명도를 갖는다. 최근의 일들은 또렷하고 과거의 일들은 흐릿하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무의식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삭제작업들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상처없이 안전하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연인들의 욕망이다. 헤어진 경우에는 마음에 문신처럼 남겨진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워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랑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든다. 누구에게나 사랑보다 그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아픈 순간이 있다. 시간은 모든 연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인들은 서로에게 흠뻑 빠져 들기도 하지만 때론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을 후회 섞인 탄식을 되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때 사랑했던 그 혹은 그녀와의 기억을 쉽게 지울 수는 없다. 주고받았던 선물, 편지는 없애버리면 되고, 사랑을 나눴던 장소는 찾지 않으면 되지만 ‘내 머릿속의 메모리’는 ‘리셋’(reset) 다고 될 것이 아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내장된 기억장치의 용량 차이로 그 속도가 문제일 뿐이다.그래서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까?’ ‘그럼 한 번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지워져가는 두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터널 선샤인>은 결국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것, 아픈 기억까지도 포함한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자세라는 함의다. 또한 사랑의 추억이란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영화는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란 의식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의식의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주변 인물들도 추억을 삭제했지만 우연한 순간에 동일한 상대를 향해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의 눈에 비친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시시각각 바뀌어 있다. 사랑은 질투와 욕망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연인과 헤어진 후의 사무치는 마음을 그의 시 '빈집'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중략)'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난 후에, 오히려 그 기억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을 다시 재생하면서 그는 연인을 잊으려 했다. 조엘이 사랑의 기억을 소거하면서 잊으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방법이야 무엇이든,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에서 지우는 과정조차 달콤하고도 쓰라린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사랑하면서 만나게 된 눈물, 상처, 웃음, 행복은 사랑에 관한 모든 순간과 과정을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훗날 잔잔한 추억이 되어 감동으로 재생된다. 첫 만남의 설렘이 영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느끼는 이 딜레마를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와 그로 인한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사랑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진정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면 어떤 상처가 있다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 상처들을 다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설렘의 기억을 얼마나 자주 재생버튼을 누르느냐, 그것이 사랑을 유지시켜나가는 관건인 것이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이 영화에서 몇 번 인용되는 니체의 잠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에 저항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니체의 명언을 살짝 바꿔봤다. “망각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용감하게 시간의 무자비함에 맞서 사랑의 정수를 맛보려 하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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