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이섭 옮김 / 민음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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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중략)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172~173쪽)

 

 

 

 

 Scene #1  너무 예민했던 젊은 영혼

 

문학 고전을 읽다보면 누구보다도 세상살이가 캄캄하고 답답하게 여겨지는 이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는 인류 역사 이래 어제, 오늘의 화두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세계 속에서 당당히 주체로 서지 못하고, 늘 무언가에 이끌려 사는 듯한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면 사는 데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거기에다 가난과 질병 등의 개인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부여받은 이들에게는 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때로 사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물음에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고, 자신의 전부를 혹독하게 산산조각 내는 이들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은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는 나이와 지위, 시대를 불문하고 늘 따라붙는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누구나 삶에서 가장 예민한 시절이 있다. 하이틴 무렵이다. 영혼과 지혜의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극대로 나타나는 시기면서도 동시에 억압의 굴레를 가장 수치스럽게 느끼는 때다. 순수 영혼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서, 삶의 굴레를 감당하게 되는 성인기로의 통과 과정이기 때문에 하이틴의 촉수는 그만큼 예민하다.

 

한스 기벤라트라는 젊은 영혼이 있었다. 그는 그 전환기의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순수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그에게 억압의 굴레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가중되는 억압의 수레바퀴 아래서 가련한 영혼 한스는 그만 질식하고 만다.

 

책을 덮는데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더니 주인공이 죽은 것이다. 한스의 죽음을 그토록 허무하게 이끌고만 원인이 무엇일까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신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고도의 억압기제가 그를 신경쇠약으로 만들어서 그럴까, 마을에 사는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그를 충격으로 밀어 넣었을까, 급작스레 떠나고만 하일너의 실종이 그의 의지할 바를 없애버려서 그럴까, 자신의 수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하던 교장이 한스의 변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대를 포기하고 말아서일까.

 

어쩌면 그 모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서 생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게 한 건 애정 없는 기대감으로 꽉 찬 억압의 사슬이었으며, 누구나 다 타고난 바가 다르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권위 있는 자들의 경멸에 찬 눈빛이었다. 유일하게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어려서 돌아가셨고, 간신히 마음을 얻고 세상을 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준 시인 친구는 생사를 알 수 없다. 총체적인 질풍노도의 소용돌이는 그를 연못 속으로 밀어 넣어 버렸던 것이다.

 

 

 

 Scene #2  주어진 길을 찾지 못하다 

 

한스는 학교와 사회라는 두개의 큰 수레바퀴 아래 깔려 절망하다가 안타깝게 죽어간 슬픈 영혼의 초상이다. 그가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을 꿈꾸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에게 고통스런 번민이 찾아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역설이다.

 

금단의 정원, 비좁은 새장 안에서는 영혼의 위안을 받을 수 없었던 한스, 그래서 결국 영원히 자유로운 안식의 세계로 서둘러 떠나버린 한스. 학교와 세상에 드리워진 억압의 굴레가 조금만 더 느슨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지평이 좀 더 넓게 펼쳐져 있었더라면, 한스라는 젊은 영혼은 그렇게 죽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우연으로써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헤세의 의도가 아닐 것이다. 한스가 고향에서 발견한 것은 보통 사람 사이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그것과 자기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이 의도한 길이 있다면, 어떤 사람에게는 학문 또는 정신적 추구의 길이 그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높고 낮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각자는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고, 그것을 통하여 모두의 삶에 기여하는 것일 뿐이다.

 

헤세는 자신의 고등학교 중도 퇴학을 설명하면서 자기는 열두 살에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시인을 위한 정해진 길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한스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행복을 발견함과 동시에 정신의 길이 자신의 길임을 새삼 깨닫게 되지만, 그에게 주어진 특정한 길을 찾지 못하다가 죽음의 길로 접어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헤세는 교육을 세속적인 출세에만 연결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통념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 결과 그는 교육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생각한 감이 있다. 그러나 『수레바퀴 아래서』의 체험적 기록이 교육의 근본에 대하여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Scene #3  수레바퀴는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한스는 죽기 전에 갑갑한 세상에 대한 울적한 심정을 못 이긴 나머지, 흐리멍텅한 상태로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 시구를 읊조린다.

 

 

아, 나는 피곤합니다.

아, 나는 지쳤습니다.

지갑에는 돈 한 푼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습니다.

(183쪽)

 

 

한스는 성공을 강요하는 세상에 지쳤고 피로을 느꼈다. 지갑에는 돈 한 푼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다. 그뿐만 아니다. 한스가 돈이 없어서 슬픈 것이 아니다. 그는 꿈도 없었다. 인생이 달린 입시 제도에 지쳐 열정과 꿈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슬픈 시구다.

 

시대가 변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도식이 있다면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원래의 나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치스런 놀음이며, 우정 또한 성공에 저해가 된다면 끊어야 하는 것이며 오로지 믿을 바는 신격화된 우상에의 복종과 권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우상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권력이거나 돈, 지위나 명예, 인기나 몸과 같은 표면적 허상 같은 것들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고, 그에 따른 불이익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 사회는 그런 자를 신경 쇠약이거나 의지 박약, 정신 착란 등의 이상증후군 환자로 진단하고 판명하여 제 집으로 보내버린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죽음은 우연을 가장한 명확한 사회적 타살이다.

 

독일어의 직업이라는 말, ‘Beruf’에는 부름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교육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부름의 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자기 형성을 꾀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또 직업의 부름에 맞아야 한다. 이 과정은 책만으로 또는 시험공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회와 장인적 수련, 거기에서 오는 삶의 기쁨. 이런 모든 것이 자기형성에 관계된다. ‘수레바퀴’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지만, 우리 형편으로는 아득하기만 한 이야기로 들린다. 수레바퀴는 지금도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 하더라도 꿈을 꾸는 자들의 마음은 늘 따뜻했으면 좋겠다. 인간이 타고난 바가 다 다르듯이 꿈도 사랑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돈이나 지식, 외모만으로 한 인간을 단정 짓지 말고,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자신이 정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새해 소망이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노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나태함의 문제로만 치부해야 할까. 자유로운 꿈을 꾸지 못하도록 눈치를 주는 기성사회의 시선이 열정이 넘치는 젊은 영혼을 무력하고 무능한 몽상가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지지하고 믿는다면 혹독하게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올해 새해 소망으로서 꿈을 꾸는 자는 아름답다는 말이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한낱 구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부모님들, 아니 어른들. 젊은 친구들의 꿈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그걸 이루기 위해서 진심으로 도울 마음이 없다면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제발 젊은 친구들에게 꿈이 뭔지 물어보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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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1-02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건강하고 평온한 새해되세요.

젊은 친구들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꿈이 뭐니... 하고 쉽게 물어볼 문제가 아닌거 같아요.
기성 세대 역시 자신의 꿈을 이루었는가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괴로와하니까요.
그만큼 자신에게 만족하고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날이 화창하고 따스하네요, 올해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cyrus 2014-01-06 02:32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마고님~ 어느 정도 삶의 목표를 잡아야 하는 철들 나이가 되었는데도
가끔 감정이 혼란스러울 때가 찾아오네요. 그래도 스스로 마음 추스리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요즘 날씨가 참 좋네요. 당분간 또 날씨가 춥다던데 감기 조심하세요 ^_^

아이리시스 2014-01-08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이 책 읽었어요, 유년시절에나 읽었을 법한데, 저는 헤세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제야 조금씩 다가오는 걸 보면. 무척 재미있었고, 결말에 놀랐어요,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데미안>은 다시 읽어야 할 것 같고, 다른 작품도 좀 더 천천히 기회를 봐야겠어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다시 한번 인사해요. 감기 조심하구요^^

cyrus 2014-01-08 21:01   좋아요 0 | URL
네, 고맙습니다. 이번에 지금까지 번역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어보려고 해요. 요즘 알라딘 중고샵에 가면 헤세가 쓴 책 몇 권 구입하곤 해요. 이제 <게르트루트>를 읽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 <크눌트><데미안> 순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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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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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그림 보는 안목은 예술적 감동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는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을 맞대면하면 그림 자체에 압도되어 그림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오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는 궁금증에 앞서,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건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궁금증까지 해결이 되었다면 작가가 보일 것이고 그의 삶과 사상이 보일 것이다. 그 이후에나 시대적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림밖에 안 보이겠지만, 알고 나면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인다.

 

여기서 '시대적인 관점'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대의 문화·경제·정치·일상 등의 관점으로 또는 관점과 함께 그림을 보는 것일 게다. 즉, 그림이라는 프레임(창)을 통해 당대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는데, 바로 그 대화의 방법론으로 그림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상법을 어디 가서도 배우기 힘들기 마련인데 그림의 세상으로 향하게 만들도록 우리들 마음의 문을 열어 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유홍준 명지대 교수다. 그는 고마운 분이다. 우리 것을 대하는 대중의 문화적 눈높이를 한껏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작품을 보는 자신만의 눈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안목이라고 한다. 안목을 기르는 방법으로 명작을 많이 대하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안목 높은 사람들의 작품 보는 법을 자신의 시각과 비교해봄으로써 예술 감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4쪽)

 

이 책 한 권에는 그동안 가치를 몰랐던 명작, 그 명작들에 드리운 아름다움, 새기지 못했던 감흥, 가늠하지 못했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안목을 틔워주는 설명, 길라잡이가 돼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만 읽는다고 해서 예술 감상의 안목이 한순간에 기를 수 없다. 어떤 사물을 두 눈으로 본다는 건 눈의 숫자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걸 보는 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아는 만큼만 보인다.

 

명작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림이거나 글씨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감탄을 자아낼 서정적 극치의 아름다움과 보석보다도 값진 실물적 가치가 보이게 된다. 그러기에 명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명작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한다. 특히 그 안목은 실제 작품에서 받은 예술적 감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림 속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그걸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Scene #2  험준한 산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는 있었다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부분) 18세기 후반

 

 

사방이 온통 험한 절벽으로 막혀 있는 이곳은 걸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들어와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였다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다고도 하는 걸 보면 꽤 오래전부터 이곳 산 속에 들어와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육대 조 할아버지가 경치 좋은 곳을 찾다 이곳에 반해 눌러 앉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물론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외줄에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도르래밖에 없는 곳이 좋아 눌러 앉을 바보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곳 사람들을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위험하지만 절벽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바깥세상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낯설어한다.

 

아무리 험준한 지형이라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고 바위가 앞을 막으면 바위를 뚫는다. 계곡 위로는 다리를 짓고 절벽 위로는 잔도를 꽂는다. 비탈길에는 계단을 만들고 언덕위에는 누각을 짓는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는 탑을 쌓고 계곡과 계곡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걸친다. 그렇게 자연을 달래고 타협하고 부탁하며 살아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림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다. 강산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끝이 없고 영원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고송(古松) 이인문이 끝없이 계속된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강산무진도’ 속에 담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과 바다와 호수가 있듯 그림 속에도 다채로운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험준한 기암괴석이 나그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 자연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줌의 흙만 있어도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듯 한 치의 땅만 있어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강산무진도’는 8m가 넘는 대작이다. 아무리 좋은 화보집이라 해도 8m 그림이 온전하게 실려 있는 책은 없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화보집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감상자들은 그림의 일부만 보고 만족해야 한다. 부분도는 전체 그림 중에서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클라이맥스가 실려 있다. 작가의 필력이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제작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림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를 다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이 한 페이지에 실린 그림 일부의 아쉬움을 고송의 다른 그림과 고송의 벗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 몇 점으로 달래본다.

 

 

 

 

 

김홍도 「송석원시회도」 1791년

 

 

고송과 단원은 동갑내기 궁중 화원으로서 서로 자웅을 겨룰 정도로 절친한 관계이다. 그렇지만 두 화가의 산수화를 비교해보면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에 확연히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고송은 시각을 넓게 잡아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압축하여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

 

 

 

 

 Scene #2  춘화도 명작이다

 

 

 

 

김홍도 「춘화(운우도첩 중)」 18세기 후반

 

 

엉덩이만 깐 채 맨바닥에 질펀하게 앉은 남자가 여인을 뒤에서 품에 안고 있다. 영화 '취화선'에서, 전통사극에서 패러디되는 도상이기도 하다. 자리도 깔지 않고 옷을 입은채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젊은 양반댁 자제들이 봄 풍류를 나섰다가 눈이 맞은 여인과 은밀한 곳을 찾아든 모양이다.

 

조선 최고의 춘화첩 운우도첩(雲雨圖帖)에서 만난 그림이다. 운우는 성희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조선시대 에로티시즘의 절정, 춘화의 백미가 담긴 운우도첩과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은 조선후기 춘화 가운데 가장 회화성이 뛰어나고 격조를 갖춘 작품집이다.

 

우리 춘화첩에는 남녀노소와 신분고하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그려 유교의 도덕개념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당대 사회의 성문란을 보여준다.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와 농담이 짙게 깔려 있는데, 춘화가 중세의 유교적 엄격주의를 깨는 일에 더없이 좋은 예술적 소재였음을 시사한다. 때로는 해학적이면서 낭만이 흐르고, 때론 점잖은 듯 하며 가식 없는 에로티시즘의 감칠맛이 우리 춘화의 아름다움이다.

 

춘화는 그 옛날 거의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집가던 일반 가정의 규수들의 첫날밤 두려움을 좀 덜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활량들이 기방 같은 곳에서 새로운 체위를 섭렵하기 위해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빨리 왕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어린 왕비나 세자빈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시각교재로 많이 사용됐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남기도 했다.

 

분명치 않은 춘화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는 다른 화가의 작품의 모작도 있고 조잡한 것들도 있다. 현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정재 최우석 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한 두 권씩의 화첩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위 여부가 계속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들의 예술성으로 보아 위작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조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일반에게 잘 공개가 되지 않았다. 다락방 깊은 곳 같은 데에 숨겨져 있다가 없어진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유교사상으로 생긴 성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이런 그림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체면의식 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몰래 보고 즐기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우리네 내숭문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성 높은 춘화 중에는 야한 내용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서정적이다. 그러니까 그림을 볼 때 배경을 꼭 같이 봐야 한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곳이나 물이 한껏 오른 버드나무 옆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무대로서(?) '세팅'이 아주 기가 막히다. 주인공과 무대를 같이 보라는 것이다. 자연 풍경의 운치 즐길 줄 아는 선조의 센스 있는 멋을 엿볼 수 있다. 의외로 이런 미적 감각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자 행위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건전한 성(sex)이 아닌가. 물과 버드나무가 없었다면 그저 남녀가 질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야한 행위’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그래피'나 '야사'에 빗댈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고 있자니 운치와 함께 유머가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춘화도 떳떳이 명작이 될 수 있다.

 

 

 

 Scene #3  조선 최후 화원의 슬픈 자존심

 

 

 

 

안중식 「백악춘효(가을본)」 1915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바로 앞에는 두 마리해태상이 놓여 있다. 해태는 갑옷처럼 두꺼운 외피와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입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다. 보기에 따라 숫사자 같기도 하나 그와 꼭 닮은 현실의 동물은 찾기 어렵다. 해태는 불을 먹고 산다는 말도 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얘기도 있다.

 

광화문에 해태상을 둔 이유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쪽 멀리의 관악산은 엄청난 화기를 머금은 불의 산이다. 도중에 한강이 가로질러 흐르지만 불기운이 워낙 드세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목멱산(木覓山ㆍ남산)을 불쏘시개삼아 도성을 단숨에 불지를 태세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를 궁궐 앞에 파수꾼처럼 세웠다는 것이다.

 

화가 안중식이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는 해태상의 과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광화문, 경회루, 근정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은 물론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선 북악산과 북한산의 봉우리들을 부감법으로 고스란히 묘사했다. 안중식은 해태상을 맨 앞에 두고 경복궁 일대를 작품화해 해태상의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해태상과 경복궁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했을까? 풍성했던 존재들이 시들고, 저물어가는 가을 분위기와 맞게 문 닫힌 광화문 등의 묘사에서 망국의 설움이 느껴진다.

 

안중식은 근대화가의 아버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전통 기법을 지키기 위해 애쓴 조선 최후의 화원이기도 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생업을 잃자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를 설립해 제자를 키웠다. 그가 고수한 기법은 한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승업으로부터 비롯된 중국 장식화풍이었다. 비록 전통 계승의 의지와 항일의식까지 뚜렷이 갖고 있었지만 기법상으로는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안중식의 회화는 단순히 화원으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기법의 정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시대 화원이 가져야했던 망국의 근심이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최고의 실력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915년, 이미 경술국치(1910년)가 지난 시기에 그려진 '백악춘효'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새로운 기법 모색의 한계 사이에서 갈등했고 고뇌와 절망, 참여와 은둔의 복잡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화원의 고고한 예술적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점점 외세로 인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슬픔을 심키고 있는 자존심이다.

 

작품의 완성도만 높다고 해서 '명작'인가. 그림은 때로 관객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림을 제작할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망국의 슬픔을 달래고자 했던 화가의 정서가 관람객의 마음에 온전하게 전달되고 느껴진다면 두고두고 봐야할 명작이다.

 

 

 

 Scene #4   그림 감상에도 미메시스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을 의미한다. 예술은 자연이나 위대한 작품 같은 훌륭한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양의 미메시스에 해당되는 행위를 동양화에서는 ‘방작(倣作)’이라 부른다. 옛 대가의 그림을 본 떠 그리는 것이 방작이다.

 

비슷한 단어로 ‘임모(臨模)’가 있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놓고 보고 그리는 것이고, ‘모(模)’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해 윤곽을 본뜨는 것이다. 임모의 목적은 앞 시대 사람들이 그림 그릴 때의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본뜬다는 점에서는 방작이나 임모나 오십보백보지만, 방작은 겉모습만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이나 뜻을 살리는 점이 임모보다 창작에 더 가깝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뿐 임모와 방작을 거듭했다. 대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미메시스 그리고 임모와 방작는 일종의 선별과 선택의 작업이다. 그림의 형태만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있는 예술적 본질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기법으로 만들 수 있도록 체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 뭔가를 배워나가기 위한 인간 고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여기서도 미메시스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림을 보면서 명작으로서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유홍준 교수, 저자가 선별한 그림 설명으로 이루어진 글의 순례길에만 쫓아간다면 정작 독자(또는 그림을 보는 관객)는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내용만 이해하는데 그친다. 반면 저자의 순례길을 따라가면서도 가끔 정해진 방향과 반대로 가보거나 순례길에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 본다. 결국, 전문가가 만든 순례길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이런 순례의 경험과 그 느낌을 살려서 순례길을 만든다면 자기만의 명작순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쓰는 서평으로 기록한다면 순례의 감동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이번에 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작성한 것이다.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쓴 서평에서 벗어나 명작순례를 통해서 느낀 감동과 정서를 최대한 드러내어 나만의 글길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나 스스로 명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쓰고자 했던 저자 유홍준 교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빗나가거나 저자가 명작을 보는 안목이 다르더라도 독자로서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꼈다면 나만의 명작순례가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명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은 작품의 객관적 아름다움에 있지만, 우리는 그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조건은 주관적인 감동이다. 전문가가 제공하는 그림의 기본 정보를 이해하고, 그걸 암기하듯이 알려고 한다면 절대로 그림 속에 숨어있는 본질인 예술적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전문가의 감상을 관람객 자신의 감상과 비교한다면 그동안 자세히 보지 못했던 세밀한 묘사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 예술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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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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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 속 모모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로자 아줌마를 잃을까봐서다. 더 이상 창녀의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아이들도 다 떠났고, 모모 혼자서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킬 뿐이다. 모모는 어느 날, 로자 아줌마의 처녀 시절 사진을 보고 슬픔에 잠긴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던 로자 아줌마, 이제는 늙고 병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한 때를 기억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잊혀야 할까.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로자 아줌마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둘만이 아는 지하실 방에서 잠자듯 조용히. 모모는 지하실에서 로자 아줌마의 시신과 함께 3주를 더 지낸다. 아직 어린 모모에게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와 관심을 끌기 위해 물건을 훔치는 모모가 점점 애틋한 사랑을 깨닫고 행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원초적 의문이 든다.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서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타인을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모는 열 살인 줄 알고 살아가다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 온 아버지에 의해 갑자기 열네 살이 된다. 모모 역시 신이 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마침내 열네 살임을 자각하는 것이 사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모가 자신의 나이를 깨닫듯이 갑자기 훌쩍 커버리는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은 어리둥절하고 설레지만 아픈 것이다. ‘1년’이라는 길면서도 적지 않은 세월의 횟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제야 느끼게 되는 은밀하고 위대한 삶의 변화.

 

누구에게나 갑자기 열네 살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 내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었고 그 나이가 아니었으면, 알고 있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모모가 자신이 난쟁이가 아닐까 의심하듯 우리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 볼 수 있다. 그런 단계를 밟으면서, 그제야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이 자연히 저절로 자라나고 삶에 대한 통찰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생은 자기 앞에 놓여있다. 로자 아줌마의 시체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모모에게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모의 말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싸늘해진 로자 아줌마 곁에 누워있던 열네 살 모모는 결코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으며 단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저 로자 아줌마가 보고 싶을 뿐이라고. 어떤 사랑이든 간에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보고, 아프게 헤어져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건 마치 물에 들어가 본 사람과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물의 감촉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차이만큼 엄청나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가 얘기해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모모가 의지하고 사랑한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한 해가 끝나갈 무렵에 서먹해진 친구, 곁에 있는 동반자, 점점 주름 깊어가는 부모님까지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소한 감정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게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말 소중한 삶의 감각이다. 그들 중에는 하밀 할아버지처럼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는 관계도 있어서 행복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게 모모가 말해 준 삶의 진리이니까.

 

결국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14세 소년 모모가 하는 말이다. 차마 부끄러워 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소설 속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해야겠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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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검색창 밑에 뜨는 검색어에 ‘연가시 생김새’라는 문구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척 궁금해서 그 검색어를 클릭해서 확인해봤는데 검색어를 확인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연가시’, ‘기생충’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종편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뉴스까지 대부분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기생충을 ‘연가시’로 소개하고 있다. 오보의 일차적인 원인은 모든 언론매체들이 인용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글에 있다. 사람의 발에서 나오는 하얀 실처럼 생긴 기생충을 연가시로 착각한 것이다.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채 그걸 그대로 인용해서 소개하니까 한순간에 기생충이 연가시가 된 것이다.

 

문제의 기생충은 연가시의 생태 습성과 유사한 메디나충이다. 주로 깨끗한 식수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주로 발견되는 메디나충은 사람 몸을 숙주로 삼아 1년 정도 지나면 다리나 발 쪽 피부 조직 밑에 모인다. 이 때 메디나충 유충이 밖으로 나오는 시기다. 감염자는 심한 가려움, 매스꺼움, 타는 듯한 통증을 못 이겨서 스스로 물을 찾게 된다. 감염자가 물가에 환부를 집어넣는 순간 메디나충 유충이 물속으로 뛰쳐나가고, 그 물을 식수로 마신 사람은 또 다른 감염자가 된다.

 

 

 

 

 

영화 <연가시> 한 장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공개된 문제의 사진만 본다면 영화 <연가시>처럼 메디나충이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나오면서 사망하는 감염자의 모습이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물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있는 메디나충이 입이나 항문을 통해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며, 감염자는 끔찍하게 죽지 않는다. 언론매체가 인용하고 있는 사진은 메디나충 감염자들이 치료받고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장면이다.

 

메디나충은 몸의 내장 기관뿐만 아니라 살갗 밑에서 살기 때문에 물을 마신다고 해서 유충이나 성충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물통에 환부를 담가야만 기다란 하얀 실 같은 메디나충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메디나충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까지 몸 속에 있는 메디나충을 박멸하는 치료제는 없다. 성충은 최소 길어야 20cm 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꺼내야 한다. 기생충을 빼내는 과정에 중간에 끊어져버리면 환부에 남아 있는 기생충 일부가 그 안에서 썩기 때문이다. 이러면 최악의 경우에는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

 

 

 

* 참고자료: EBS 다큐프라임 ‘기생寄生 PARASITE' 1부 보이지 않는 손. 올해 여름에 방영되었는데 EB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링크) http://www.ebs.co.kr/replay/show?prodId=348&lectId=10136540

 

방송 보기 전에 주의할 점. 식사 전후에 보지 마시길. 훌륭한 내용의 다큐이기는 하지만, 메디나충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상이 상당히 충격적이다. 좋은 다큐로 연일 계속되는 폭음 때문에 계속되는 구역질을 유도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구역질은 연말 술자리 이후에 해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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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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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Scene #1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

 

며칠 사이로 북한 최고 권부에서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의 영상이 실황중계나 하듯 내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옛날에도 최고 통치권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몇 차례나 되풀이되는 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당사자 측에 의해 그 과정이 외부로 낱낱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충격적이다. 과연 21세기는 IT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제국가의 권력투쟁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의지와 야심, 권모술수와 잔인함, 모략 등 부도덕한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고 하는 마키아벨리즘도 어디까지나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군림이다. 북한은 오직 권력의 유지와 군림만을 위하여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시 통제, 인간성이 머물 곳도 피할 곳도 없게 하였다. 오늘의 북한과 비슷한 상황으로, 실제 배경이 되었던 소련 공산주의는 벌써 붕괴되었으나 북한은 아직도 건재하다.

 

엄격하고 잔인한 공포 통치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고문, 격리시켜 저항의지를 꺾는다. 불평하는 사람을 밀고하게 만들어 가혹하게 처벌한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역사기록이나 사실을 조작, 윤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북한만이랴. 전체주의적인 경향은 파편화된 형태, 숨은 형국이라 해도 어디서나 끈질기게 작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기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그러하다. 힘 있는 자가 전횡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고의 진영을 궁지에 몰리는 형국을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게 되면 점점 독재 권력처럼 무서워진다. 게다가 억지 논리를 내세우는 권력자들의 말장난은 이제 ‘힘 있는 자가 말을 지어내고 그들은 그 말장난으로 힘을 유지한다’는 고전적 어록, 즉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격언이 실감난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라고 하는데 새삼 두렵게 들린다. 조지 오웰은 이보다 더 정확한 어법으로 ‘과거를 지배한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이는 역사의 기록도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되고 만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힘의 세습’, ‘권력의 세습’ 나아가 ‘이익 집단의 세습’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역사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기록된다면 엄연한 사실마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Scene #2 『1984』를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

 

권력의 세습에 기대어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와 인생을 감시하고 강요하는 체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설명하고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1984』에서 나오는 정말 끔찍한 사례 하나 제시한다면 단언컨대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1984』의 오세아니아에선 연애가 금지된다. 사람들은 오직 ‘빅 브라더’(Big Brother)를 사랑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사상경찰의 고문과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를 포기한다. 줄리아라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2+2=4’라는 진실이다.

 

윈스턴을 신문하는 사상경찰관은 ‘2+2=5’를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빅 브라더가 인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포기하고 ‘2+2는 5이다’고 말한다.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진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

가상의 1984년 빅 브라더 그리고 (수치상으로) 30년 후 현실의 북한 빅 브라더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북한 최고의 히트곡이 되어 허울뿐인 ‘위대한 영도자’에게만 (억지로) 바치는 찬가가 떠올린다. ‘그이 없인 못살아’, 진실을 포기하고 권력을 향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맹세한다면 각인을 위한 강요에 속박당하는 것이다. 노동신문으 시작을 알리는 일면 한가운데에 박힌 위대한 영도자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노래를 절절하게 불러 달라고.

 

『1984』는 언제나 읽어도 암울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안 그래도 지금 ‘갑’들의 횡포가 존재하는 소설 같은 현실 그리고 오웰이 제작한 현실 같은 소설 둘 다 본다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김씨 일가가 만든 우스운 나라의 이야기까지 접하면 평소에 안 나던 싫증도 밀려온다.  

 

빅 브라더가 소설에서만 나올법한 가상의 존재처럼 우리 세상에 유명무실해진다면 그무거운 마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이미 이런 사회를 예언한 오웰의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역겨운 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올곧은 정신력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삶을 바꾸어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이 이처럼 정확하게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을 예언한 능력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지적 성실성으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 좌파 편에서 싸웠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좌파정권 안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목도하였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친소분자들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일으킨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체험하였다. 그 자신도 희생될 뻔하였다.

 

공산전체주의의 위선을 발견한 그는 죽을 때까지 13년간 수많은 기사, 논평을 통하여 이 진실을 알리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으면서, 객혈을 해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가면서 『1984』을 완성하였고 1년 뒤 죽었다. 죽음이 코앞에 두면서도 진실을 본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쇠약해진 몸을 문학의 힘에 의지했다. 그런 점에서 『1984』는 미래의 인류에게 선물한 ‘진실의 눈’인 셈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1984년의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하고 있다.

 

 

 

 Scene #3  ‘자신의 언어’로 거대한 세상과 맞서다

 

‘1984년의 세계’에 사는, 아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외부뿐 아니라 과거와도 단절되어 있다. 권력은 과거로부터도 단절되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선조들보다 자신들이 잘 살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대중에게 강요에 가까운 강조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 기록은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진실성에서 오늘의 필요에 맞추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애정성에서 하는 주민감시나 억압만큼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과거는 기록 및 기억과 부합해야 한다. 권력이 모든 역사기록과 주민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과거는 권력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향에만 맞추어진다.

 

언어를 지배하는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되기에 오세아니아에서 '존재'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며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이러한 삼엄한 통제 가운데 윈스턴은 용기를 내어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하고 1984년 4월4일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조심스럽게 펜을 든다. 체제에 반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행위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직조하려는 것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윈스턴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윈스턴이 느끼는 한없는 무력감은 언어의 불능이 사고의 마비, 존재의 무기력임을 뜻한다. 그간 당국의 통제 아래 생활하던 윈스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낯설고도 괴로운 변신 과정이다.

 

그래도 윈스턴은 점점 더 자신의 언어를 토하며 일기를 써내러 가고, 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불만과 의문 역시 차츰 구체화된다. 하지만 거대한 세상과 맞서기에는 ‘자신의 언어’로 구체화된 생각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윈스턴의 반발은 당국의 체포로 끝난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 윈스턴은 자신을 포기하고 체제에 순응한다.

 

 

 

 

 Scene #4   “빅 브라더가 아직도 건재하는 세상, 안녕하지 못하다!”

 

우리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사소한 일탈을 저지르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정상적인 삶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고 그게 바로 삶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과 정보를 특정한 누군가가 열람하고 데이터화하여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이런 일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적되어 이용 가능한 개인정보들, 안전을 명분으로 한 무작위 감시 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 나가야 할 핵심 화두가 될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오웰이 쓴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에 사는 사람들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미스터 오웰 그리고 빅 브라더.

여러분은 이제 정확히 30년이 흐른 '1984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Good Morning, Mr. Orwell」장면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3년 12월 31일부터 1984년 1월 1일 사이 TV로 미국, 유럽, 한국 등의 현재 모습을 동시 분할 화면 등의 표현 방법을 통해 실시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TV의 긍정성, 또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견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오웰의 영혼을 향해 우주적 인사를 건넨 백남준은 이 세상에 없다. 역사적인 비디오 아트가 공개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낙관적 예언은 일부 맞다. 하지만 오웰이 진짜로 경계할 것은 경고했던 빅 브라더의 존재를 간과했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이 낳은 신기술이 전통적인 권력구조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빅 브라더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른바 빅브라더의 감시를 용이하게 해준다. 10면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더라. 빅 브라더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빅 브라더는 백남준이 좋아했던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은밀하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거대 권력이 인터넷과 핸드폰을 감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나의 머리와 마음까지도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세상이다. 끔찍하다.

 

만약에 지금 백남준의 영혼이 하늘에서 오웰의 영혼을 만나 인사를 건넨다면 오웰은 그의 인사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쌀쌀 맞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Mr Paik, It is unpleasant!’,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백남준의 인사를 이렇게 맞받아쳤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21세기 고도의 정보사회를 향해 던진 오웰의 디스토피아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응답할 때가 됐다.

 

 

 

 Scene #5  우리 국민들은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다 

 

바야흐로 겁박의 시대다.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국민들에게 으르렁대고 민중의 지팡이를 휘둘러 댄다. 겁이 없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할 정치를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감시와 개입을 시도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권력의 횡포와 오만이 판을 친다.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했는데 국가 권력은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늘에 있는 오웰이 이런 세상을 보고 있다면, 안녕하지 못하는 세상에 분노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도둑질 하지 마라”와 함께,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는 것이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운 권력의 감시와 개입은 비윤리적인 범죄 행위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멍청하지 않다, 그런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권력의 잠재적 위협에서 국민 각자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지키는 길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된 암울한 세상을 보여주는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언컨대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오웰의 소설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설마 이 소설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든 개인을 감시, 통제하고 싶은 권력자들끼리 공유하고 읽는 지침서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책 읽을 수 있는 한가로운 여유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키워 나가고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악취미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1984』는 소설이다. 빅 브라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지 마라. 독자에게 양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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