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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소설 속 모모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세상에 하나뿐인 로자 아줌마를 잃을까봐서다. 더 이상 창녀의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아이들도 다 떠났고, 모모 혼자서 로자 아줌마 곁을 지킬 뿐이다. 모모는 어느 날, 로자 아줌마의 처녀 시절 사진을 보고 슬픔에 잠긴다.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던 로자 아줌마, 이제는 늙고 병들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한 때를 기억하는 자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잊혀야 할까.
주변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로자 아줌마도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다. 둘만이 아는 지하실 방에서 잠자듯 조용히. 모모는 지하실에서 로자 아줌마의 시신과 함께 3주를 더 지낸다. 아직 어린 모모에게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창녀의 아이들을 돌보는 늙은 창녀 로자 아줌마와 관심을 끌기 위해 물건을 훔치는 모모가 점점 애틋한 사랑을 깨닫고 행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원초적 의문이 든다. 타인을 타인 그 자체로서 사랑하면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타인을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모는 열 살인 줄 알고 살아가다가 너무 오랜만에 찾아 온 아버지에 의해 갑자기 열네 살이 된다. 모모 역시 신이 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마침내 열네 살임을 자각하는 것이 사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모가 자신의 나이를 깨닫듯이 갑자기 훌쩍 커버리는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은 어리둥절하고 설레지만 아픈 것이다. ‘1년’이라는 길면서도 적지 않은 세월의 횟수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이제야 느끼게 되는 은밀하고 위대한 삶의 변화.
누구에게나 갑자기 열네 살이 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사는 것이 힘들어 내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었고 그 나이가 아니었으면, 알고 있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모모가 자신이 난쟁이가 아닐까 의심하듯 우리 역시 나이에 걸맞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어 볼 수 있다. 그런 단계를 밟으면서, 그제야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람의 영혼이 자연히 저절로 자라나고 삶에 대한 통찰을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경계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생은 자기 앞에 놓여있다. 로자 아줌마의 시체를 떠나지 못하는 것도 모모에게는 사랑하는 자기 자신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모의 말처럼 아름답다는 것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싸늘해진 로자 아줌마 곁에 누워있던 열네 살 모모는 결코 사랑이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으며 단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저 로자 아줌마가 보고 싶을 뿐이라고. 어떤 사랑이든 간에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해보고, 아프게 헤어져 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건 마치 물에 들어가 본 사람과 들어가 보지 않은 사람이 물의 감촉과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차이만큼 엄청나다.
그리고 하밀 할아버지가 얘기해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말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그것은 부모나 형제자매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모모가 의지하고 사랑한 사람은 부모가 아니다.
이상하게도 한 해가 끝나갈 무렵에 서먹해진 친구, 곁에 있는 동반자, 점점 주름 깊어가는 부모님까지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소한 감정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게 쓸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말 소중한 삶의 감각이다. 그들 중에는 하밀 할아버지처럼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는 관계도 있어서 행복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관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사랑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는 게 모모가 말해 준 삶의 진리이니까.
결국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14세 소년 모모가 하는 말이다. 차마 부끄러워 내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소설 속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해야겠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