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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1001-448] 1984
Scene #1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
며칠 사이로 북한 최고 권부에서 지금 막 진행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의 영상이 실황중계나 하듯 내외신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옛날에도 최고 통치권자가 새로 등장하면 그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까지 몇 차례나 되풀이되는 흔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당사자 측에 의해 그 과정이 외부로 낱낱이 공개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충격적이다. 과연 21세기는 IT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제국가의 권력투쟁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롭다.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의지와 야심, 권모술수와 잔인함, 모략 등 부도덕한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고 하는 마키아벨리즘도 어디까지나 공존을 바탕으로 한 군림이다. 북한은 오직 권력의 유지와 군림만을 위하여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빅브라더는 텔레스크린을 사용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시 통제, 인간성이 머물 곳도 피할 곳도 없게 하였다. 오늘의 북한과 비슷한 상황으로, 실제 배경이 되었던 소련 공산주의는 벌써 붕괴되었으나 북한은 아직도 건재하다.
엄격하고 잔인한 공포 통치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고문, 격리시켜 저항의지를 꺾는다. 불평하는 사람을 밀고하게 만들어 가혹하게 처벌한다. 소수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의 앞잡이가 된다.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역사기록이나 사실을 조작, 윤색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북한만이랴. 전체주의적인 경향은 파편화된 형태, 숨은 형국이라 해도 어디서나 끈질기게 작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기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요즘 우리 사회도 그러하다. 힘 있는 자가 전횡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고의 진영을 궁지에 몰리는 형국을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보게 되면 점점 독재 권력처럼 무서워진다. 게다가 억지 논리를 내세우는 권력자들의 말장난은 이제 ‘힘 있는 자가 말을 지어내고 그들은 그 말장난으로 힘을 유지한다’는 고전적 어록, 즉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권력자들은 말을 지어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격언이 실감난다.
흔히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라고 하는데 새삼 두렵게 들린다. 조지 오웰은 이보다 더 정확한 어법으로 ‘과거를 지배한 사람이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이는 역사의 기록도 결국은 힘 있는 사람들의 기록이 되고 만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면 ‘힘의 세습’, ‘권력의 세습’ 나아가 ‘이익 집단의 세습’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결국 강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역사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기록된다면 엄연한 사실마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Scene #2 『1984』를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
권력의 세습에 기대어 복종을 강요하는 체제와 인생을 감시하고 강요하는 체제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을 설명하고 쉽고 이해할 수 있도록 『1984』에서 나오는 정말 끔찍한 사례 하나 제시한다면 단언컨대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1984』의 오세아니아에선 연애가 금지된다. 사람들은 오직 ‘빅 브라더’(Big Brother)를 사랑해야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윈스턴 스미스는 사상경찰의 고문과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두 가지를 포기한다. 줄리아라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2+2=4’라는 진실이다.
윈스턴을 신문하는 사상경찰관은 ‘2+2=5’를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집요하게 압박한다. 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빅 브라더가 인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2+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명제를 포기하고 ‘2+2는 5이다’고 말한다.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사랑도 사라진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
가상의 1984년 빅 브라더 그리고 (수치상으로) 30년 후 현실의 북한 빅 브라더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하루아침에 북한 최고의 히트곡이 되어 허울뿐인 ‘위대한 영도자’에게만 (억지로) 바치는 찬가가 떠올린다. ‘그이 없인 못살아’, 진실을 포기하고 권력을 향한 충성을 노골적으로 맹세한다면 각인을 위한 강요에 속박당하는 것이다. 노동신문으 시작을 알리는 일면 한가운데에 박힌 위대한 영도자의 얼굴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Big brothet is watching you"(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한 노래를 절절하게 불러 달라고.
『1984』는 언제나 읽어도 암울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다. 안 그래도 지금 ‘갑’들의 횡포가 존재하는 소설 같은 현실 그리고 오웰이 제작한 현실 같은 소설 둘 다 본다는 것도 버겁게만 느껴진다. 거기에 김씨 일가가 만든 우스운 나라의 이야기까지 접하면 평소에 안 나던 싫증도 밀려온다.
빅 브라더가 소설에서만 나올법한 가상의 존재처럼 우리 세상에 유명무실해진다면 그무거운 마음을 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이미 이런 사회를 예언한 오웰의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역겨운 사회를 직시할 수 있는, 올곧은 정신력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 진실을 향해 삶을 바꾸어간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조지 오웰이 이처럼 정확하게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을 예언한 능력은, 그의 문학적 천재성이라기보다는 지적 성실성으로 설명하는 게 맞을 것이다. 사회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페인 내전에 참전, 좌파 편에서 싸웠다. 그는 바르셀로나를 장악한 좌파정권 안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을 목도하였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친소분자들이 동료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일으킨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을 체험하였다. 그 자신도 희생될 뻔하였다.
공산전체주의의 위선을 발견한 그는 죽을 때까지 13년간 수많은 기사, 논평을 통하여 이 진실을 알리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으면서, 객혈을 해가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워가면서 『1984』을 완성하였고 1년 뒤 죽었다. 죽음이 코앞에 두면서도 진실을 본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쇠약해진 몸을 문학의 힘에 의지했다. 그런 점에서 『1984』는 미래의 인류에게 선물한 ‘진실의 눈’인 셈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1984년의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등장하고 있다.
Scene #3 ‘자신의 언어’로 거대한 세상과 맞서다
‘1984년의 세계’에 사는, 아니 갇혀 있는 사람들은 외부뿐 아니라 과거와도 단절되어 있다. 권력은 과거로부터도 단절되어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선조들보다 자신들이 잘 살고 있으며, 물질적 풍요가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대중에게 강요에 가까운 강조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과거를 재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 기록은 지속적으로 수정된다. 진실성에서 오늘의 필요에 맞추어 과거를 조작하는 것은, 애정성에서 하는 주민감시나 억압만큼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필요하다. 과거는 기록 및 기억과 부합해야 한다. 권력이 모든 역사기록과 주민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므로 과거는 권력 체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향에만 맞추어진다.
언어를 지배하는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되기에 오세아니아에서 '존재'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며 점점 희미해져만 간다. 이러한 삼엄한 통제 가운데 윈스턴은 용기를 내어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하고 1984년 4월4일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조심스럽게 펜을 든다. 체제에 반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행위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직조하려는 것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윈스턴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윈스턴이 느끼는 한없는 무력감은 언어의 불능이 사고의 마비, 존재의 무기력임을 뜻한다. 그간 당국의 통제 아래 생활하던 윈스턴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낯설고도 괴로운 변신 과정이다.
그래도 윈스턴은 점점 더 자신의 언어를 토하며 일기를 써내러 가고, 막연하기만 하던 그의 불만과 의문 역시 차츰 구체화된다. 하지만 거대한 세상과 맞서기에는 ‘자신의 언어’로 구체화된 생각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윈스턴의 반발은 당국의 체포로 끝난다. 고문과 세뇌를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 윈스턴은 자신을 포기하고 체제에 순응한다.
Scene #4 “빅 브라더가 아직도 건재하는 세상, 안녕하지 못하다!”
우리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사소한 일탈을 저지르고, 실수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정상적인 삶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고 그게 바로 삶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하나 세밀하게 기록으로 남고, 그 기록과 정보를 특정한 누군가가 열람하고 데이터화하여 다른 목적으로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이런 일은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느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다. 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적되어 이용 가능한 개인정보들, 안전을 명분으로 한 무작위 감시 등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 나가야 할 핵심 화두가 될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오웰이 쓴 소설 속의 ‘오세아니아’에 사는 사람들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미스터 오웰 그리고 빅 브라더.
여러분은 이제 정확히 30년이 흐른 '1984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백남준 「Good Morning, Mr. Orwell」장면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30년 전,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암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비디오 아트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3년 12월 31일부터 1984년 1월 1일 사이 TV로 미국, 유럽, 한국 등의 현재 모습을 동시 분할 화면 등의 표현 방법을 통해 실시간 보여줌으로써 전 세계가 매체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는 TV의 긍정성, 또는 인터넷 네트워크를 예견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오웰의 영혼을 향해 우주적 인사를 건넨 백남준은 이 세상에 없다. 역사적인 비디오 아트가 공개된 지 어느덧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낙관적 예언은 일부 맞다. 하지만 오웰이 진짜로 경계할 것은 경고했던 빅 브라더의 존재를 간과했다. 스마트폰, 인터넷,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이 낳은 신기술이 전통적인 권력구조를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빅 브라더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른바 빅브라더의 감시를 용이하게 해준다. 10면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더라. 빅 브라더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빅 브라더는 백남준이 좋아했던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은밀하게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거대 권력이 인터넷과 핸드폰을 감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나의 머리와 마음까지도 통제하는 빅 브라더의 세상이다. 끔찍하다.
만약에 지금 백남준의 영혼이 하늘에서 오웰의 영혼을 만나 인사를 건넨다면 오웰은 그의 인사를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쌀쌀 맞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Mr Paik, It is unpleasant!’,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백남준의 인사를 이렇게 맞받아쳤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지 못하다’라고. 이런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21세기 고도의 정보사회를 향해 던진 오웰의 디스토피아인가. 이 물음에 우리는 응답할 때가 됐다.
Scene #5 우리 국민들은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다
바야흐로 겁박의 시대다. 권력을 쥔 자들이 힘없는 국민들에게 으르렁대고 민중의 지팡이를 휘둘러 댄다. 겁이 없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져야 할 정치를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감시와 개입을 시도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권력의 횡포와 오만이 판을 친다.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했는데 국가 권력은 여전히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하늘에 있는 오웰이 이런 세상을 보고 있다면, 안녕하지 못하는 세상에 분노와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도둑질 하지 마라”와 함께,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는 것이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을 내세운 권력의 감시와 개입은 비윤리적인 범죄 행위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다. 권력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민들이 멍청하지 않다, 그런 걸 깨닫게 해줘야 한다. 그것이 국가권력의 잠재적 위협에서 국민 각자의 프라이버시와 인권을 지키는 길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된 암울한 세상을 보여주는 조지 오웰의 『1984』는 단언컨대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상은 오웰의 소설과 너무나도 비슷하다. 설마 이 소설이 권력 유지를 위해서든 개인을 감시, 통제하고 싶은 권력자들끼리 공유하고 읽는 지침서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책 읽을 수 있는 한가로운 여유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을 키워 나가고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악취미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1984』는 소설이다. 빅 브라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지 마라. 독자에게 양보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