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소르의 이상한 가면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붉은 죽음의 가면』은 왕이 개최한 호화로운 가장무도회에 백성들 사이에 창궐하는 적사병(赤死病) 환자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무언의 도발에 분노한 왕은 돌아선 그의 얼굴을 직면하는 순간 즉사한다. 역병으로 죽은 시체를 모방한 줄 알았던 가면은 가면이 아니었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적사병 그 자체였다.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1860~1949)가 즐겨 그린 가면 쓴 인물들의 초상화가 오싹한 까닭도 그들이 가면을 쓴 인간인지, 가면처럼 변해버린 얼굴을 가진 인간인지 불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앙소르의 그림 속에서는 가면과 얼굴의 구분과 더불어 현실과 환영의 경계도 희미하다.

 

 

 

 

 

 

 

 

 

 

 

 

 

 

 

앙소르는 어두운 도상과 가면 쓴 사람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던 화가였다. 가면은 그의 작품에 중요한 주제로, 자신을 비롯한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앙소르에게 유희의 광기에 달뜬 이방인들의 군상을 표현하는 데에 가면보다 자연스런 오브제는 없다.

 

 

 

 

 

제임스 앙소르  「이상한 가면들」 1892년

 

 

「이상한 가면들」에 도열한 가면들은 축제의 열기에 휩싸여 우연히 노출된 사람들의 진짜 표정처럼 보인다. 안면근육과 주름살, 뺨에 떠오른 홍조는 가면이라기엔 지나치게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부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한 가면들의 포즈는 초현실적이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1890년

 

 

가면이 등장하는 또 다른 그림인 「음모」는 앙소르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이 가면 속에 가려진 실체의 모습들을 드러내지 않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하듯 묘사해내고 있다. 그들 마음속에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서로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으며, 이러한 모습들은 자기 주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 모두에게서 느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기괴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가면 모습은 또 다른 자신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제임스 앙소르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1899년

페터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그늘에서 이사벨라 브란트와 함께 있는 화가의 자화상」 1609년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라는 작품을 보면 중앙에 있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면을 쓰고 있다. 바로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앙소르 자신이다. 그로테스크한 가면들 사이에 커다란 깃털이 달린 바로크식 빨간 모자를 쓴 사람이 화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명한 화가의 얼굴과 상당히 비슷하다. 바로 루벤스다. 사실 앙소르는 이 그림에서 루벤스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대중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앙소르는 같은 출신의 위대한 화가인 루벤스처럼 자신의 예술이 널리 인정받기를 바랐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암울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루벤스의 가면으로 변장하여 자기위안을 하고 싶었던 걸까.

 

 

 

 

 

 

 ♣ 우리가 만드는 가면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였듯, 가면이 실제 얼굴보다 더 진실한 모습일 수도 있다. 가면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비굴한 얼굴, 짜증내는 얼굴, 남을 탓하는 얼굴. 앙소르가 그린 자화상은 비단 중앙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자신은 맨얼굴이고 다른 사람들만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가면의 얼굴들 모두가 바로 화가의 마음속 얼굴들일 수도 있다.

 

집에서 입는 옷과 거리로 나설 때 입는 옷이 다르듯 우리는 군중의 일원이 될 때 가면을 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개인은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타인들의 가면만 본다. 도어즈는 노래했다. “당신이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이상하게 굴고, 당신이 외로울 때 타인의 얼굴은 흉해 보인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가면처럼 경직돼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고 자신도 그렇게나 혐오했던 군중의 일부임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고립은 집단의 존재 목적이나 이상에 종속되는 과정에서 자기 소외에 빠지며 정체성의 상실이 일어난다. 경직되고 냉소적인 군중의 가면은 자기실현에 빠져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페르소나’(persona)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래 그녀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페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진중권 『미학 에세이』27~28쪽)

 

 

오늘날에는 누구나 이미지로 자신의 가면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SNS는 각기 다른 가면들의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덧칠된 이미지 속에서 연기를 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몰락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진중권은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실재와 미디어 사이의 간극이다. “가면 자체가 곧 인격”이 되어버린 시대 속에서 언제까지 허망한 가면을 쓴 채 현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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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무대 위와 무대 아래'가 너무 다른 수많은 광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기 집 문턱만 넘어서면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놓는다'는 식으로(몽테뉴) '자기 집안에서는 엉망진창'인 인물들이 얼마나 많을지가 마침 어제 저녁 식탁 위에 올라운 '두드러진 화제' 가운데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 * *

저마다 광대놀이에 참가하여, 무대 위에서는 점잖은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감추어 두고 있는 가슴속, 마음속에 질서를 세워 보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는 아무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고, 연구도 기교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집에서 평소의 행동에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 때문에 비아스는 가정 생활에서의 훌륭한 태도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가정의 주인은, 그가 밖에서 나라의 법과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서 처신하는 식으로 집안에서도 그대로 행해야 한다."

아게실라오스가 여행할 때에 항상 그의 숙소를 사원 안에 정하며, 사람들이나 신들이 모두 그의 개인적인 행동까지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칭송할 만한 일로 주목된다. 자기 아내와 하인이 보아도 별로 눈에 띌 일이 없게 살아간 자는 세상에서도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 사람들에게 숭배받았던 인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공적 행동으로는 황공해서 저자를 그의 집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 그 자는 그의 옷과 더불어 역할도 벗어 놓는다. 그는 높게 올라갔던 정도로 낮게 내려온다. 그는 자기 집안에서는 모든 일이 엉망진창이다. 질서가 서 있다고 해도 이런 변변찮은 행동 속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예민하게 식별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뿐더러 질서는 침침하고 희미한 덕성이다.

성벽을 무찌른다, 외국으로 사절단을 데려 간다, 한 국민을 다스린다 하는 것은 혁혁한 행동들이다. 자기 집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과 부드럽고 올바르게 꾸지람하고 웃으며, 팔고 사며, 사랑하고 미워하고, 교섭하고 되는 대로 일하지 않고, 자기 말을 어기지 않는 것 등은 눈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더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cyrus 2013-10-23 18:41   좋아요 0 | URL
oren님이 인용해서 소개한 몽테뉴의 글을 읽으면서 저 또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데 무척 피곤한 일인데 참고 지낸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오늘 김주하 앵커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방송에서는 남편이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오랫동안 얼굴에 씌여있는 가면을 한번에 완전히 벗는 것도 쉽지 않고요.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개정판 틱낫한 스님 대표 컬렉션 1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마음의 불(火)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119소방센터의 벽면 현수막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월화수목금토일, 화내지 맙시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물론 불(火)이다. 소방당국이 불조심 생활화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문구가 이색적이다. 그 표어대로 불조심은 어느 하루, 어느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에서 일반에 먼저 와 닿는 화는 불보다는 우리 일상에 흔한 화(Anger)다. 일주일 내내 경계해야 할 건 불조심뿐만이 아니다. 화(火)는 내 마음에 생길 수 있는 불이다. 화를 다스려야 삶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런데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정말 성질 죽이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누구는 성질 없어서 조용히 있나. 혈압 오르는 일들이 한두 번이어야지. 가끔은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큰소리 지르며 성질 한 번 내보고 싶은 날이 있다.

 

요즘엔 사소한 이유로 시작한 우발적 싸움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성질과 핏대를 억누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급해지고 화를 참지 못하는 현대인의 성격 탓이다. 예기치 못한 일이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화를 내고 살아간다. 화를 낸다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다. 하지만 물건을 내팽개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 화가 풀릴까. 아니다. 화는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분풀이할 대상을 찾는데, 이는 결국 화의 악순환만 더할 뿐이다. 그렇다면 화를 참아야 하는 걸까.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야 하는 걸까. 그것 또한 역시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다. 개인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고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며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치솟지만 집단적 요구는 더 늘어간다. 왜소한 개인의 자아는 거대한 세계와 맞부딪치면서 보이지 않게 피를 흘린다. 우리는 모두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다.

 

 

 

 ♣ 마음의 씨앗을 다스리기

 

틱낫한 스님의 책 『화』가 제목만으로도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던 이유가 있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화』의 부제다. 여기서 언급되는 ‘화(Anger)’는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 나는 성’을 뜻하는 한자어 ‘화(火)’를 지칭한다. 틱낫한 스님은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얘기한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나타난다. 화가 나 있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악담을 퍼붓게 된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스스로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다. 화가 나는 이유는 자기중심주의에서 출발한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 무엇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님은 화를 표출하는 것도, 화를 참고 속으로 삭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스님은 우리 신체와 오장육부처럼 화도 우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고 없애려 하지 말라고 한다. 마치 우는 아기라고 생각하며 화를 보듬고 달래야 한다는 거다. 화가 났을 때는 남을 탓하거나 스스로 자책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랴. 그래서 화를 다스리는 게 우리 인생에서 평생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화’는 화를 ‘마음의 씨앗’으로 본다. 우리 마음에는 기쁨 사랑 같은 긍정의 씨앗과 미움 절망 같은 부정의 씨앗이 있다. 평상시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 지는 바로 자신에게 달렸다. ‘마음의 씨앗’인 화를 인정하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국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를 스님은 ‘마음 밭 갈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남 탓하지 말고 자책하지도 말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다. 스님은 마음을 다스리려면 어떠한 자극이 와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평생 전쟁과 폭력의 중심에서 온몸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체득한 결과라고 한다.

 

 

 

 ♣ 아이처럼 화를 끌어안기

 

스님은 화가 났을 때 이를 부인하지 말고, 화 난 자신을 인정하고 맞이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분노하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마음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단다. 마음에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일단 모든 것을 중단하고, 우선 그 아이를 먼저 달래야 한다는 것이다. 칭얼대는 화라는 아이를 잘 달래지 못할 때 그 아이는 실제 아이가 아니라 힘을 가진 어른일 경우가 많아서 언제 어느 때 치명적인 폭력을 휘두르게 될지 모른다는 게 스님의 우려였을 것이다.

 

어찌됐든 스님의 지적대로 일시적으로 아이를 달랬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생각의 변화가 와야 한다. ‘생각이 즉 에너지’이기 때문에 생각이 화로 들끓고, 그 에너지가 또 다른 화를 재생산하는 것을 멈추려면 ‘분노를 가져왔던 생각의 변화’, 즉 ‘신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과도한 분노의 뒤엔 ‘절대적 신념’이 감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절대 이래선 안 된다’,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분노의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한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본다면 화를 훨씬 더디게 낼 수 있다. 또한 화가 나더라도 다른 이의 허물을 덜어주고 용서해 준다면 결국 자신에게 유익함으로 돌아올 것이다.

 

화를 분출시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화 풀기는 행동에 대한 결과를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눈앞의 만족을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야만사회의 전형이다. 화를 평화롭고 긍정적으로 풀 것이냐, 아니면 비이성적으로 폭발시킬 것이냐. 그 통제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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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수록 더하는 ‘빈익빈 부익부’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이들의 2000배가 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대 80’을 넘어 ‘0.1대 99.9’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위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최하위 빈자들이 더 가난해지는 상황을 “협력, 상호 신뢰, 공유, 인정, 존중 등을 토대로 하는, 공생에 대한 인간적인 갈망을 경쟁과 경합으로 대체한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플루토크라트(Plutocrat)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그리스어로 부를 의미하는 plutos와 권력을 의미하는 kratos가 합쳐진 말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뜻한다. 전 세계 상위 0.1%를 차지하는 글로벌 슈퍼리치(Super rich)가 플루토크라트다.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있고, 점점 더 끼리끼리 뭉치며, 갈수록 그 나머지 사람들과 동떨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점점 이들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로 나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격차를 통해 슈퍼리치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데, 더욱 커진 파이로부터 이익을 얻을 뿐 아니라 그 파이에서 다른 동료들에 비해 더욱 큰 조각을 차지한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이 이런 현실에 별 불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인데, 왜냐면 그들도 슈퍼리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 개인화된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

 

 

 

 

 

 

 

극심한 불평등의 현장, 인도 뭄바이의 빈민촌 안나와디에 사는 주민들도 그렇다. 안나와디는 새로운 부의 상징이 된 뭄바이 사하르 공항 인근, 초특급 호텔 5개가 에워싸고 있는 빈민촌이다. 이곳에 사는 누군가는 “우리 주변은 온통 장미 꽃밭이고 우리는 그 사이에 있는 똥 같은 존재”라고 자조한다. 대부분은 넝마주의로 생계를 이어간다.

 

아침마다 공항 일대에 넓게 흩어져, 내다팔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넝마주이는 수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뭄바이에서 매일 쏟아지는 8000톤의 쓰레기에서 다만 몇 킬로그램을 건지려고 돌아다닌다. 까만 차장 안에서 내던지는 구겨진 담뱃갑을 주우러 달려가고, 물통과 맥주병을 찾아 하수구를 훑고 쓰레기 하치장을 뒤진다. 저녁이 되어 폐품을 담은 삼베 포대를 짊어지고 빈민촌으로 돌아오는 모습은 흡사 돈벌이에 이가 다 빠지도록 혈안이 된 산타 행렬 같았다. (캐서린 부 『안나와디의 아이들』반비, 15쪽)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이자 그만큼 불평등도 심각한 도시, 인도의 뭄바이. 뭄바이의 화려한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공항과 특급 호텔들의 그림자 뒤에는 그 성장과 발전에서 비껴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토착민과 이주민, 무슬림과 힌두교도 간의 갈등이 곳곳에 도사리고, 전통과 현대 사이에 낀 여성들의 젠더 갈등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고속 성장시대 특유의 한탕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신분 승상을 위해 극우 정당의 하수인이 된 여성 아샤, 폐품 분류에 대한 천부적 재능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무슬림 소년 압둘,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인재가 되고자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대학생 만주 등 안나와디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놓인 삶을 버티기 위해 모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빈곤의 고통에 벗어나 '중산층'이 되길 바라는 '야망'도 있다.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쓰레기를 줍는 생활로 연명하는 것도 버거운데 신분 상승까지는 힘들다.

 

그 곳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희망’과 ‘욕망’ 그리고 '야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집단의 정체성이 희미해지면서, 안나와디 사람들의 공통된 ‘희망’과 ‘욕망’이 개인화되었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타인에게 무심할 정도로 고통에 공감할 여지가 없을 만큼 참혹한 삶이 빈민촌 사람들의 도덕관념을 위축시켰다.

 

 

  

 ♣ 낯익은 세상

 

 

 

 

 

 

 

 

 

 

 

 

 

못 쓰는 물건들과 못 쓰는 물건을 수집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인도 안나와디 사람들의 삶은 남의 나라 이야기는 아니다. 흉물스러운 쓰레기매립지 ‘꽃섬’에도 자본주의 욕망과 그로 인한 희생의 현실을 볼 수 있다. 정말 ‘낯익은 세상’이다.

 

인도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대한민국, 그것도 쓰레기매립지 그곳에서도 사람이 산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주워 먹을 것을 찾아 달려드는 사람들이다. 반입되는 쓰레기차에 따라 구획이 나뉘어져 있어 권리금을 내야하고 등록증도 갖춰야 한다. 치열한 경쟁은 물론이고 권력의 질서마저 존재한다. 우리가 버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사람이 살고 있다.

 

쓰레기를 뒤져본 적이 있는 자는 안다. 악취 나는 오물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꽃섬’ 오두막 동네는 버려진 각목과 판자, 깔판으로 만든 집이 많다. ‘꽃섬’ 사람들은 구역별로 나눠 쓰레기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재활용품을 모아, 이를 되판다. 그 돈으로 하루를 일하고 하루를 먹고 산다.

 

"내가 도시 외곽의 쓰레기장에 주목한 것은 지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이 끝없이 만들어서 쓰고 버리는 욕망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다 더 많은 생산과 소비는 삶의 목적이 되었고 온 세계가 그것을 위하여 모든 역량과 꿈까지도 탕진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드러나 있는 풍경은 세계의 여느 도시 외곽에서도 만날 수 있는 매우 낯익은 세상이다."

 

그렇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풍경은 인도 안나와디에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황석영 작가의 말처럼 『낯익은 세상』을 읽는 동안 우리는 지속적으로 ‘낯익은 세상’과 만난다. 단지, 그 불편한 세상을 일부러 외면해서 못 보고 있을 뿐이다. 난지도와 같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없어졌지만 지금도 우리는 쓰고 버리고, 재생하고, 쓰고 버리고 또 재생하고. '꽃섬'에는 꽃이 없다. 그 주변에만 온통 장미 꽃밭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가 만들어 낸 영양분으로 '행복'이라는 장미가 자라나고 있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자주 입에 꺼내기가 쉽지 않은 ‘쓰레기’ 얘기. 새로운 제품 광고와 소비 욕구가 판을 치는 환락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얘기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바로 우리들 얘기다. 우리 주변의 낯익은 세상이다.

 

쓸모 때문에 생겨난 게 쓰레기다. 당초에는 긴요한 물건이었을 테고 사랑도 받았을 것이다. 버려지기 전까지 최적의 효용을 자랑했겠지만 쓸모를 잃어버린 순간, 쓰레기가 되고 만다. 쓰레기 없는 세상이 있겠는가. 문명은 풍요를 가져다주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폐기물 더미에 인간을 몰아넣고 운명처럼 살아가도록 했다.

 

종전까지 인간은 쓰레기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이 쓰레기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 모든 상품이 1회용으로 둔갑하면서 1회용 사랑과 1회용 만남이 끊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입양한 아이조차 버리는 일도 발생한다. 아무런 역할도 담당하지 못한 채 과잉, 잉여, 초과 인구가 되는 인간이 늘고 있다. 말 그대로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우만은 ‘버려지는 쓰레기화되는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은 디지털 첨단화와 자본주의로 인한 지구화의 필연적 결과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자본의 눈에 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인간은 불량품이나 쓰레기로 비친다. 쓰레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점차 배제되고 격리된다.

 

저자에 따르면 심각한 문제는 또 있다. ‘쓰레기화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국가의 난민들이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향해 합법적 혹은 불법적으로 몰려들고 있지만, 국가는 이 이주민들을 이른바 게토(Getto)로 몰아내거나 통제하는 등 영토를 요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안나와디와 한국의 꽃섬과 같은 빈민촌이 늘어난다. 반면 자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아이러니다.

 

자본주의는 빈민촌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으며 전 세계적 불황과 비정규직화, 무한 경쟁은 안 그래도 불안한 빈민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인간마저 쓰레기가 되는 이 낯익은 세상에 인간은 뒷전으로 물러난 채 물질이 주체의 자리에 올라서 있다. 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여겨졌던 이와 같은 현상은 이제 ‘일상’이 돼버린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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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하는 사회

 

 

 

 

 

 

 

최근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많은 사람이 피부나 몸매 관리에 정성을 쏟고 성형수술도 쉽게 한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75% 이상이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라고 답했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만족도는 떨어진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맑고 하얀 피부, 즉 피부미인이라면 아름다움의 70%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자극 천연소재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유기농화장품을 사용하는 등 곱고 맑은 피부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남성도 이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여성 못지않다. 주름과 여드름과 기미가 있는 피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성실한 자기 관리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성이 자신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은 이미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화장품 회사도 각양각색의 남성화장품을 출시하고 있다. 얼굴이 하얘진다는 화이트 스킨로션이 있는가 하면 색조화장품까지 있다. 얼굴에서 남성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꽃미남 열풍과도 관련이 깊다. 과거 남성은 근육질을 남성미로 생각했다. 최근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서 다양한 남성성이 출현을 하고 있다. 요즘은 멋진 근육에 남성스러운 이미지의 ‘짐승남’ 열풍이 있긴 하지만, 꽃미남(또는 얼짱)과 같은 고운 남성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란 것이 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주의를 일컫는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시킨 외모지상주의는 차별 요소로 지목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외모가 곧 처세, 사교, 결혼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돼 일상생활에서도 외모를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 하얀 피부에 대한 인류의 열망

 

과거에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수은이나 납 성분이 포함된 화장품을 장기적으로 피부에 도포해 중독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무허가로 시판되는 화장품의 상당수가 이러한 성분들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귀족층에선 창백한 얼굴이 인기였다. 핏기 없는 얼굴의 결핵 환자가 ‘낭만의 징표’로 여겨졌을 정도다.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로 ‘상류층’과 ‘평민’이 구분됐다. 대부분의 평민은 돈을 벌기 위해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했고, 얼굴이 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상류층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은 태양아래서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고난 피부의 색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대개 하얀 피부를 타고난 이를 부러워한다.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면 좀 더 밝고 환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피부색은 멜라닌의 종류가 다르고 양이 많고 적음 때문이지, 미(美)의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구분은 생물학적 차이일 뿐, 그것이 사회적인 차별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은 백인이 우월하다는 잘못된 통념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작품 #1  반(反) 자화상 1 :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왼쪽) 살바도르 달리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년 작)

(오른쪽)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그림 대체 사진 이미지 차용)

 

 

 

 

 

자화상은 흔히 자아의식의 발로라는 지표 아래 화가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라는 차원에서 개성이나 내면의 성격의 입증과 함께 서양 예술의 흐름에서 흥미 있는 장르로서 계속 그려져 왔다.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는 자신의 영혼을 반영코자한 반면, 표현에 있어서는 실제의 구체적 형상으로 겉모양만 표현한 ‘반(反) (심리학적) 자화상’을 그리고 싶어 했다. 긴 상자 위에는 잘 구워진 베이컨을 올려놓고 지팡이로 세워져 부드럽게 늘어진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내가 생각한 자화상 역시 ‘반(反) 자화상’에 가깝다. 내 얼굴에는 하얀 마스크 팩을 씌운다. 피부의 잡티를 제거하고, 하얀 피부를 위한 미용을 위해서 하루에 한 장씩 마스크 팩을 사용한다. 마스크 팩을 한 나의 얼굴은 잡티가 없고,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피부 미남’이 되기 위한 외모의 열망을 상징한다.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포토샵으로 하얀 피부색으로 처리된 미남 연예인의 얼굴처럼 되고 싶어한다. 멋진 '가면'이 되기 위해 하얀 가면인 마스크 팩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스크 팩을 한 얼굴을 표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자화상 형식과는 다르다. 마스크 팩은 외모에 집착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하얀 피부’로 대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외부의 시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그림을 보고 있는(하얀 피부를 선호하고 피부미용에 집착하는) 관객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즉,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마스크 팩은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외모지상주의자가 지향하는 미(美)의 외적 기준인 것이다.

 

 

 

 작품 #2  반(反) 자화상 2 : 하얀 가면

 

 

 

 

피부가 좋고, 하얗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상이 좋을지 몰라도 인품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인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면이 아닌 겉으로만 드러나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 잘못된 외모지상주의를 비꼬기 위해서 오브제(objet) 형식으로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 작품 #3  반 자화상 3 : 가면의 최후

 

 

 

(왼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세부 (1536~1541년 작) 

(오른쪽) 『가면의 최후』

 

 

 

 

 

 

 

 

 

 

 

 

 

 

미켈란젤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내적인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의 얼굴을 모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초상화나 자화상을 경멸했다. 그래서 육체에 담겨진 외적 아름다움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자화상을 『최후의 심판』의 한부분에 그려 넣는다. 사실 그것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성 바르톨로메오가 손에 들고 있는, 순교할 때 벗겨진 자신의 살가죽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열흘 동안 붉은 빛깔을 띠는 꽃은 없다. 한번 성한 것은 언젠가 쇠락하고 만다. 아름다운 미모 또한 그렇다. 아름다움은 모진 세월의 풍파 속에 무너지고 망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기 위해 외모만 가꾸는 데 치중한다면 시간 낭비이며 집착의 형태이기도 하다. 특히, 삶이 완전히 소진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신은 썩게 되고 아름다움은 ‘추(醜)함’이 된다.

 

‘반 자화상’ 연작 세 번째인 『가면의 최후』의 오브제는 이미 얼굴 마사지로 사용한 마스크 팩이다. 사용하기 전 마스크 팩에는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수분 성분이 묻어 있다. 그러나 마사지로 얼굴에 붙이는 순간, 팩에 머금은 수분 성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5~10분 정도 지나면 수분 성분은 피부로 흡수되고, 마스크 팩은 촉촉한 수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된다. 하얀 피부를 만들기 위해 우리 얼굴에 희생되는 마스크 팩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길지 않은 하얀 가면의 최후는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축 늘어진 마스크 팩의 형상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인해 ‘추’(醜)로 변화되는 인생무상(Vanita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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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 금성에서 온 진보주의자, 화성에서 온 보수주의자

 

혹시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공자의 사상을 현실과 동떨어진 케케묵은 보수 이념일 뿐이요, 어느 박물관 한 귀퉁이의 골동품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의 개혁을 부르짖던 집권세력은 공자의 사상이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며 그를 대대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죽의 장막 속에서 ‘악의 뿌리’인 양 뽑히고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던 공자는 오늘날 다시 살아나 중화인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반면 요란했던 문화대혁명은 오히려 ‘반동의 역사’요 ‘잃어버린 세월’로 비판받고 있으니 얼마나 역설적인가. 공자가 부활한 것은 중국사회가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 겪는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필요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등 조화를 바탕으로 사회통합의 윤리를 강조해온 공자사상의 의미가 재평가된 것이다.

 

성인 반열의 공자 같은 인물과 사상에 대해서도 시대와 정치상황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 판이니, 현실 정치인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권좌를 떠난 지 오래인 이승만 또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린다. 주된 이유는 바로 앞서와 같은 이념적 잣대 때문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노선이란 서로 다른 잣대와 색안경을 갖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밥그릇이 걸린 문제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치열해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념이 다르니 인간과 사회를 보는 시각, 정책과 시스템도 달라진다. 미국의 진보주의자 조지 레이코프는 『도덕, 정치를 말하다』에서 보수주의는 엄부자모(嚴父慈母)의 가정, 진보주의는 자부자모(慈父慈母)의 가정에서 연원하는데 양측의 모든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보수는 자기관리·도덕·권위·자율·질서·동질성·자기이익을 중시한다. 이익추구는 자제력을 이용하여 자립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반면 진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감정이입(측은지심)·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사회적 연계·양육·공정함·행복을 중시한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우선 내 자신이 행복해져야 하고, 사회적 연결을 발전시켜야 한다.

 

 

 

 ♣ 교조주의가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

 

어느 사회나 진보와 보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들의 조화로운 공존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의 현실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암울하게 만든다. 이런 시대를 더욱 암울하게 만드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를 편 가르는 정치권의 이념의 양극화다. 이러한 이념의 양극화는 정치적인 경쟁과 논쟁의 수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균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있으며, 국가 정체성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두고 진보, 보수의 경합을 벌이는 현 상황도 역사적 진전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대결이 이념양극화 수준에 이르렀다면, 더 이상의 ‘진전’이 아니라 ‘정체’이며, 편집증에서 벗어나자고 분열증을 앓는 격이다.

 

이념 갈등에 의한 분열 증세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보는 보수를 수구 부패 독재세력, 보수는 진보를 친북 무능 교조주의적 분열세력으로 낙인찍고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보수가 이룩한 국가발전 및 경제성장, 국가경영능력은 안중에도 없고 진보의 독재 타도 및 민주화, 권위주의불식 등도 무시된다. 서로를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행태는 정치인들 스스로를 비도덕적으로 보이게 하고 깊은 논리적 대화나 토론을 희석시킨다.

 

한국 정치인들은 정치에 있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교조주의적 이념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통 부재의 정치를 하고 있어 산적한 국정 현안이 여야 간의 대화와 타협 없이 표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인기 없는 에세이』에 수록된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글에서 교조주의와 정치의 불편한 관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1947년에 쓰인 글답지 않게 교조주의에 대한 러셀의 경고는 교조주의의 위험성을 망각한 채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유효하다.

 

거듭 말하는 바이지만 교조주의 체제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하나는 거짓 믿음과 중요한 현실 문제를 결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제의 광신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에게 극심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59~60쪽)

 

러셀이 보는 ‘교조주의자’는 광신자다. 이념적 광신자들의 위세는 실용성과 역사 보존 및 전 세대에 대한 존경을 앞지른다. 순수에 관한 광신자 본인들의 견해만 중요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이 먹혀들어가지 않거나 무시되면 화를 내고 상대를 부질없이 적대시한다.

 

 

 

 ♣ 건전한 자유주의자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개선한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인정받고 싶은 욕망(튜모스; Thumos)’을 역사의 원동력이라 했다. 헤겔의 말대로 그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정치나 종교와 같이 사람들의 신념체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곳에서 돋보이게 드러난다. 꼭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를 강박하고 남의 말은 경청하지 않으며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싸움박질로 좋은 얼굴끼리의 대화마저 급기야는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헤겔은 어떤 명제인 테제(These)가 나왔을 때 그것에 반하는 안티테제(Anti-these)가 나와 서로 대립하며 그 같은 대립이 지양되었을 때 신테제(Synthese)’에 이른다고 했다. 역사가 변증법적인 과정을 부단히 되풀이 하면서 발전한다고 하는 견해는 확실히 그럴 듯하다. 그렇지만 헤겔이 말하는 정-반-합의 역사 변천과정은 결코 순조로운 것이 아니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을 때 사람들은 피를 흘리고 사회질서가 뒤집히는 혼란과 고통이 수반되는 잔인한 과정이다. 이념 대립과 갈등은 정파들에 의해 정권 쟁취를 위한 탐욕의 방편으로 이용될 때 폭발 임계점을 넘어서기 쉽다.

 

러셀은 그러한 교조주의의 함정에 벗어나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을 존 로크의 ‘경험적 자유주의’라고 말한다. 경험론이 진지하게 추구되고 완결되는 것은 성찰과 자기 개선을 통해서였다. 건강한 자유주의자는 자기 의견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광신자, 교조주의자의 특징이다.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 초보 사회인을 위한 철학

 

확실성을 추구해온 근대적 합리성은 불확실성의 증폭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이 발견한 진리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에 유념하는 탈근대적 지성이 요구되고 있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성향 가운데 하나로 ‘판단유보 능력’이라는 것이 지목된다.

 

러셀은 1950년에 집필한「초보자를 위한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미 ‘판단유보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모호한 영역을 끌어안을 수 있는 판단력, 객관적으로 검증된 결과라 할지라도 의문 부호를 붙이면서 숨겨진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열린 감각, 열린 사고, 열린 경험이 있어야만 올바른 습관이 길러진다. 이것이 현실의 경험에 기초해 올바른 습관과 삶의 신념을 열심히 다지는 지성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나의 의견이 틀렸다고 해서 불안에 떨거나 나와 상반되는 입장에 격노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의견이 자명한 진리라는 확실성만 믿은 채 상대방을 열 받게 하고 신념이 지나치면, 대화 불능 상태인 문제 많은 초보 사회인에 불과하다. 러셀의 표현을 빌려서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지적 쓰레기'다. 어떤 진리라고 주장되는 것도 영원히 옳을 수 없고, 그것에 반대되는 진리가 언제든 나올 수 있으니, 오히려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한 줌 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관찰하고 실험하며 경험에 기초한 신념을 쌓아가는 것이 더 낫고 양자에게는 이롭다.

 

사람마다 이념적 성향이 다를 수 있고, 또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 합리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나와 다른 도덕관도 인정하고 남과 나의 잘잘못을 함께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내가 지면 내 밥그릇이 깨지는 것으로 알기에 더 싸운다. 자신들의 교육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몹쓸 사람인 양 매도하고 흑백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과연 옳은 태도일까. 한국사회도, 정치인들도 이제는 편향된 이념노선과 독선적 교조주의의 낡은 외투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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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저받 2013-11-18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철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알고 싶은 사람인데 리뷰 보니 이 책 재밌어보이네요. 현 사회의 나쁜 점을 개선하려는 진보나 현 사회의 좋은 점을 지켜가려는 보수, 두 이념 모두 중요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개인의 권력이나 욕심을 채우는 데 이념을 사용하면서 사회적인 대의를 지키는 것처럼 합리화시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함.. 철학이나 사회학 공부하시는 분들은 참 말빨이 좋으신 것 같아요^^ 잘봤습니다 무튼 위시도서리스트에 올려놔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