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지상주의에 집착하는 사회

 

 

 

 

 

 

 

최근 외모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면서 많은 사람이 피부나 몸매 관리에 정성을 쏟고 성형수술도 쉽게 한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의 75% 이상이 자신의 외모에 불만이라고 답했다. 외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만족도는 떨어진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맑고 하얀 피부, 즉 피부미인이라면 아름다움의 70%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자극 천연소재 화장품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유기농화장품을 사용하는 등 곱고 맑은 피부 가꾸기에 여념이 없다.

 

남성도 이제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여성 못지않다. 주름과 여드름과 기미가 있는 피부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불성실한 자기 관리의 표본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성이 자신의 외모에 투자하는 것은 이미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 보니 화장품 회사도 각양각색의 남성화장품을 출시하고 있다. 얼굴이 하얘진다는 화이트 스킨로션이 있는가 하면 색조화장품까지 있다. 얼굴에서 남성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꽃미남 열풍과도 관련이 깊다. 과거 남성은 근육질을 남성미로 생각했다. 최근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짐에 따라서 다양한 남성성이 출현을 하고 있다. 요즘은 멋진 근육에 남성스러운 이미지의 ‘짐승남’ 열풍이 있긴 하지만, 꽃미남(또는 얼짱)과 같은 고운 남성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란 것이 있다. 외모가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주의를 일컫는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fire)가 인종·성별·종교·이념 등에 이어 새롭게 등장시킨 외모지상주의는 차별 요소로 지목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제 외모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외모가 곧 처세, 사교, 결혼과 같은 사생활은 물론, 취업·승진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돼 일상생활에서도 외모를 가꾸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다.

 

 

 

 ♣ 하얀 피부에 대한 인류의 열망

 

과거에는 얼굴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수은이나 납 성분이 포함된 화장품을 장기적으로 피부에 도포해 중독되는 일이 흔했다. 지금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무허가로 시판되는 화장품의 상당수가 이러한 성분들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17~18세기 유럽의 귀족층에선 창백한 얼굴이 인기였다. 핏기 없는 얼굴의 결핵 환자가 ‘낭만의 징표’로 여겨졌을 정도다.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하얀 피부로 ‘상류층’과 ‘평민’이 구분됐다. 대부분의 평민은 돈을 벌기 위해 야외에서 육체노동을 해야 했고, 얼굴이 까맣게 탈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상류층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은 태양아래서 해야 하는 일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타고난 피부의 색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사람들은 대개 하얀 피부를 타고난 이를 부러워한다.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면 좀 더 밝고 환한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피부색은 멜라닌의 종류가 다르고 양이 많고 적음 때문이지, 미(美)의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특히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구분은 생물학적 차이일 뿐, 그것이 사회적인 차별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하얀 피부에 대한 동경은 백인이 우월하다는 잘못된 통념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

 

 

 

 작품 #1  반(反) 자화상 1 :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왼쪽) 살바도르 달리 『구운 베이컨 조각과 함께 있는 부드러운 자화상』 (1941년 작)

(오른쪽) 『하얀 마스크 팩과 함께 있는 미끌미끌한 자화상』 (그림 대체 사진 이미지 차용)

 

 

 

 

 

자화상은 흔히 자아의식의 발로라는 지표 아래 화가 자신이 인식하는 자아라는 차원에서 개성이나 내면의 성격의 입증과 함께 서양 예술의 흐름에서 흥미 있는 장르로서 계속 그려져 왔다.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달리는 자신의 영혼을 반영코자한 반면, 표현에 있어서는 실제의 구체적 형상으로 겉모양만 표현한 ‘반(反) (심리학적) 자화상’을 그리고 싶어 했다. 긴 상자 위에는 잘 구워진 베이컨을 올려놓고 지팡이로 세워져 부드럽게 늘어진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내가 생각한 자화상 역시 ‘반(反) 자화상’에 가깝다. 내 얼굴에는 하얀 마스크 팩을 씌운다. 피부의 잡티를 제거하고, 하얀 피부를 위한 미용을 위해서 하루에 한 장씩 마스크 팩을 사용한다. 마스크 팩을 한 나의 얼굴은 잡티가 없고,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피부 미남’이 되기 위한 외모의 열망을 상징한다.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포토샵으로 하얀 피부색으로 처리된 미남 연예인의 얼굴처럼 되고 싶어한다. 멋진 '가면'이 되기 위해 하얀 가면인 마스크 팩이 필요하다.

 

하지만 마스크 팩을 한 얼굴을 표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는 자아를 표현하는 일반적인 자화상 형식과는 다르다. 마스크 팩은 외모에 집착하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하얀 피부’로 대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외모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외부의 시선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이 그림을 보고 있는(하얀 피부를 선호하고 피부미용에 집착하는) 관객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즉, ‘하얀 피부에 대한 열망’을 상징하는 마스크 팩은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외모지상주의자가 지향하는 미(美)의 외적 기준인 것이다.

 

 

 

 작품 #2  반(反) 자화상 2 : 하얀 가면

 

 

 

 

피부가 좋고, 하얗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상이 좋을지 몰라도 인품과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겉모습으로만 사람의 인품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면이 아닌 겉으로만 드러나는 하얀 피부를 선호하는 잘못된 외모지상주의를 비꼬기 위해서 오브제(objet) 형식으로 ‘하얀 가면’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 작품 #3  반 자화상 3 : 가면의 최후

 

 

 

(왼쪽)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세부 (1536~1541년 작) 

(오른쪽) 『가면의 최후』

 

 

 

 

 

 

 

 

 

 

 

 

 

 

미켈란젤로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내적인 영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온전히 사람의 얼굴을 모방하는 것과 다름없는 초상화나 자화상을 경멸했다. 그래서 육체에 담겨진 외적 아름다움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듯한 자신의 자화상을 『최후의 심판』의 한부분에 그려 넣는다. 사실 그것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성 바르톨로메오가 손에 들고 있는, 순교할 때 벗겨진 자신의 살가죽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열흘 동안 붉은 빛깔을 띠는 꽃은 없다. 한번 성한 것은 언젠가 쇠락하고 만다. 아름다운 미모 또한 그렇다. 아름다움은 모진 세월의 풍파 속에 무너지고 망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기 위해 외모만 가꾸는 데 치중한다면 시간 낭비이며 집착의 형태이기도 하다. 특히, 삶이 완전히 소진되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육신은 썩게 되고 아름다움은 ‘추(醜)함’이 된다.

 

‘반 자화상’ 연작 세 번째인 『가면의 최후』의 오브제는 이미 얼굴 마사지로 사용한 마스크 팩이다. 사용하기 전 마스크 팩에는 촉촉하고 미끌미끌한 수분 성분이 묻어 있다. 그러나 마사지로 얼굴에 붙이는 순간, 팩에 머금은 수분 성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5~10분 정도 지나면 수분 성분은 피부로 흡수되고, 마스크 팩은 촉촉한 수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조된다. 하얀 피부를 만들기 위해 우리 얼굴에 희생되는 마스크 팩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길지 않은 하얀 가면의 최후는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축 늘어진 마스크 팩의 형상은 일시적인 아름다움이 죽음으로 인해 ‘추’(醜)로 변화되는 인생무상(Vanitas)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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