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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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TV로 즐겨 봤던 추억의 프로그램 중에 '경찰청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형사가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국어책 읽듯 어색한 멘트를 날리거나 구수한 사투리로 사건의 상황을 이야기했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사건을 맡았던 담당 형사가 좀 더 리얼한 상황 재연을 위해 본인 역을 맡아 멋진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실제 사건 사고를 재구성하여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범죄 예방 효과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지 이런 의도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니었다. 어른들은 경찰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안방에서 지켜보면서 끝내 경찰에 의해 잡히고 마는 범인의 모습을 보면서 정의가 승리한 듯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경찰청 사람들'을 즐겨 본 세대라면 이때 장래희망을 경찰이라고 정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기서 그들이 말하던 경찰은 교통정리를 하는 순경이 아닌 강력계 형사였다. 아이의 눈에는 범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형사의 모습이 무척 멋있으니까. 또래보다 힘 좀 쓰고 체력 좋은 친구들은 강력계 형사가 되고 싶어 했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비실비실해 보이는 나도 '경찰청 사람들'을 보면서 강력계 형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만나는 형사들은 영화나 TV 속 잘생긴 형사와는 딴판이다. 우리는 범인을 체포하는 형사의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그건 TV 속 형사의 모습이다. 실제 형사는 그 범인 한 명을 쫓기 위해 거듭된 야근과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탐문 수사를 한다. 이런 강행군 탓에 피로에 찌든 생활을 하게 되고, 쏟아지는 사건 때문에 밀려드는 짜증이 늘어난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범인들을 다루다 성격이 거칠어진다. 육체적·정신적 피로가 많은 직업이다. 형사가 경찰보다 업무 강도가 상당히 높다. 이렇다 보니 신입 경찰들이 형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긴다.

 

찡그린 미간에선 범죄자들에 대한 태생적인 거부감과 정의감을 읽을 수 있고, 흉악범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장면에선 뛰어난 신체능력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날카로운 추리로 범죄의 전모를 밝혀내는 장면에선 지성미까지 느껴지는 잘 생긴 형사. 이런 형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말끔히 잊으시라.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나오는 경찰들이야말로 경찰서에 만날 수 있는 진짜 경찰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파이프 그림 속 명구를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것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지만 장르를 따지면 추리가 맞다. 형사나 탐정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설정은 추리소설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나오는 형사와 탐정 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그냥 미제 사건으로 처리하거나 수사법과 추리력이 아닌 순전히 운으로 간신히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단편 「발자국」은 똑똑한 탐정과 형사 이미지의 환상을 깨뜨린다. 바르토세크 형사 반장은 눈 위에 달랑 몇 발자국만 남겨진 발자국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을 남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반장은 누군가가 일으킨 장난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것을 형사가 담당해야 할 사건이라고 할 수 없다. 바르토세크 반장은 발자국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사람에게 자신이 형사라고 해서 미스터리한 현상을 해결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형사라는 직업은 법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그 누구도 나서지 않은 고약한 일을 맡는다.

 

"법과 질서는 손톱만큼도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질서를 수호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을 올바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온갖 고약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까요." (「발자국」 중에서, 21쪽)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을 읽게 된다면 독자는 형사라는 직업의 고충과 애환에 공감할 것이다. 메이즈리크 형사는 금고털이범을 체포한 이후로 공을 인정받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여러 가지 사건을 맡게 된다. 경찰과 언론은 메이즈리크 형사가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 사건을 해결했다고 떠들어댄다. 정작 형사 본인은 우연을 계기로 해결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해결하는 완벽한 만능형사 혹은 명탐정으로 인정받는다면 명예와 존경이 따라오겠지만, 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각종 사건이 형사를 따라온다. 형사는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린다. 형사는 명예로운 이미지를 스스로 거부한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방법론이 필요하죠. 저도 이번 사건 이전에는 온갖 방법론들을 믿었습니다. 신중한 관찰이나 전문 지식, 체계적인 조사 혹은 이와 유사한 ... 그러나 사실은 엉터리에 불과한 것들 말이죠. 저는 이번 사건을 겪고 나서 생각이 백팔십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메이즈리크가 숨을 내쉬듯 불쑥 말했다. "모든 것이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느 사건」 중에서, 29~30쪽)

 

이처럼 차페크가 묘사하는 경찰과 탐정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용감한 모습과 거리가 멀다. 사건을 해결했어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이들은 숨겨지고 은폐된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냉철한 이성과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홈즈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너무나 어설픈 엉터리 형사, 탐정이라고 독설을 퍼부었을 것이다. 

 

차페크는 「실종된 편지」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유명한 추리소설 「도둑맞은 편지」를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한다. 제아무리 '가장 유능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도 수사 기법과 추리력을 총동원해서 사라진 편지를 찾아보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그들이 찾는 편지는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조금 수상한 사람」의 경사는 사람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불안에 떠는 상대의 자세만 보고 수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신통력으로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궁예의 미륵 관심법 뺨치는 수사 방법으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형사 직함을 내밀면 부끄러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드러낸다.
 
미국의 소설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의 임무를 이렇게 정의했다. 작가는 미스터리를 푸는 게 아니라 깊게 만드는 것이라고. 차페크의 소설은 단지 미스터리를 푸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상황에 마주하는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깊이 내다본다. 그리고 꾸밈없이 솔직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카페크의 형사는 우리처럼 평범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나무라거나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약한 일을 맡고 해결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말을 우린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형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진짜 경찰청 사람들은 오른쪽 주머니 속에 있는 이야기에 있다. 이제 TV에서 보던 멋진 경찰청 사람들의 모습을 망각 주머니에 깊숙이 넣으시라. 더 이상 찾지 말라. 지금도 어디선가 추운 날씨 속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고약한 일을 해결하려는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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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1-12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청 사람들을 보구 꿈을 키우신 세대시거나 토토가 를보고 들썩이셨다는걸보니 저와 비슷한 세대신거 같아요ㅋ 오늘 신문정리하다가 순직하신 분들 기사 봤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말씀처럼 우리 기억에있던 모습이 전부가 아닌데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거 반성해보기도 했습니다 작가의 임무라는 말도 크게 공감합니다^^

cyrus 2015-01-12 19:31   좋아요 0 | URL
제가 오래된 것을 유별나게 좋아하고 기억하는 나름 젊은 세대입니다... ㅋㅋㅋ
 
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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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 속의 침팬지에게 인간의 줄기세포를 주입한다. 그 침팬지는 인간의 뇌를 가지면서 태어난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침팬지는 사람인가, 동물인가.

 

동물의 생체실험은 대체로 소량의 유전자를 동물에게 주입하거나, 인간의 세포나 조직을 동물에게 이식한다. 인간의 유전자나 체세포를 갖도록 조작된 동물들은 인간의 질병 치료에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동물에게 인간의 특질을 부여하는 생체실험은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영국에서 동물의 생체실험 규제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일부 과학자들은 인간의 세포나 유전자를 소량 이용하는 실험은 유지하되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에 대해서는 완전 금지를 주장했다. 인간 유전자를 섞은 동물의 배아를 14일 이상 배양하거나, 인간의 정자나 난자를 동물의 것과 섞어 교배하는 실험을 할 수 없다. 동물 생체실험을 반대하는 과학자들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등 영장류에 실험을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이 우려하는 생체실험의 위험성은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 나오는 침팬지를 연상시킨다. 영화에서 과학자 윌 로드만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 손상된 인간의 뇌를 회복시켜주는 큐러라는 약을 개발한다. 이 약의 임상실험 대상은 침팬지. 윌의 보호 아래 자란 침팬지 시저는 인간의 지능을 가지게 된다. 시저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다른 유인원들과 함께 인간들을 역습하기로 한다.

 

인류는 생명공학을 통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데 성공했다. 신의 영역을 넘어선 인간은 자신들의 영생을 위해 우성 유전자를 지닌 복제인간을 만든다. 이미 멸종된 동물을 복제하는 시도도 한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우리가 원하던 미래의 희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해악도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영화 '혹성탈출'에서처럼 인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우성 유전자만 선호하고 높은 가격으로 거래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생체 실험 문제에 늘 윤리적 논란이 따라다닌다.

 

유전자 조합과 생체실험의 윤리적 담론을 주제로 한 영화에서는 인간이 파멸을 몰고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특히 여러 차례 영화로 리메이크된 허버트 조지 웰스의 『모로 박사의 섬』은 과학적 생체실험을 다룬 문학적 효시라 할 수 있다.  

 

모로 박사는 인간과 동물을 결합하는 실험을 통해 새로운 생명체로 인류를 재창조하려는 야욕을 품는다. 그러나 그의 생체실험은 너무나도 잔인하다. 한번은 그가 실험하려고 했던 개가 가죽이 심하게 벗겨지고 사진가 훼손된 채 발견되어 잔인무도한 생체실험의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이로 인해 모로 박사는 과학계 동료들로부터 멸시를 받지만, 생체실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국을 떠나 야생동물들이 사는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정착한다. 이곳은 모로 박사의 거대한 생체실험 연구실이 되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괴상한 반인반수였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외모의 피조물들이 섬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우연히 이 섬에 정착하게 된 에드워드 프렌틱은 악몽 같은 나날을 보낸다. 그는 모로 박사에게 실험의 위험성을 경고했으나 박사는 귀담아 듣지 않는다. 박사는 미쳐버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실험에 대한 생각뿐이다.

 

"연구자가 지적 열정을 쏟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당신을 모를 거요! 그 지적 열망이 가져다주는 기묘하고 무색투명한 기쁨을 당신을 모를 거요! 당신 눈앞에 있는 것들은 더는 동물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오. 하지만 골칫덩이지! 내가 바란 게 하나 있다면 한 생명체가 어디까지 적응할 수 있는지 그 한계치를 알아내는 일이었소." (108쪽) 

 

인간으로 개조하는 동물들은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모로 박사를 위대한 조물주라고 생각한다. 박사는 이 섬에서 신처럼 군림한다. 하지만 다시 동물로 퇴화하는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살해당한다.   

 

소설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인간에게 '파멸'을 벌한다. 지적 목표를 위해서 윤리를 무시한 과학의 위험성은 인류의 미래를 파괴한다. 신의 영역을 넘어선 인류의 갈망은 인간성 상실의 또 다른 모습이다. 모로 박사는 20세기에 현실로 되살아났다. 아니 그보다 더 극악하다. 모로 박사는 동물을 대상으로 했지만, 독일 나치와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은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마취하지 않고 신체를 절단하는가 하면 독극물과 세균을 강제로 주입하는 등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과학의 발전과 진보라는 핑계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실험대상의 고통을 외면했다. 모로 박사도 생체실험을 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사소한 것이라고 일축한다. 이 지구상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생물이 많다고 말하면서 생체실험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반인반수들은 단지 야생 본능이 살아나서 박사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잔인한 인간성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었다. 과학만능주의와 인간지상주의로 만들어진 족쇄는 피조물들을 괴롭혔다,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주입하기를 원했던 인간성이 파멸의 씨앗으로 될 줄 몰랐다.  

 

인류는 지금처럼 알게 모르게 찔끔찔끔 진화에 개입하는 식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모로 박사처럼 외딴 섬에 숨어서 실험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날이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합성 생물이 등장할 것이다. 그런 식의 과학 발전은 과연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인간은 한계가 설정되어 있으면 그것을 넘고 싶은 욕구가 끓어 넘치는 존재다. 과학이 지금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미래의 여러 대안을 접하면 왠지 움찔한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던 웰스도 그랬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인간이라는 개념 차제가 모호해지지 않을까. 인류 비슷한 피조물이 왠지 음험해 보이는 눈빛을 하고 다가올 때, 우리가 환영하는 표정을 지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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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1 0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영화 아일랜드가 떠오르기도 하네요.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들어두고 필요시 장기 적출하는 내용의 영화도 공포스러웠는데, 인간과 동물의 복합 유전자로 탄생된다면 정말 만만찮은 문제들이 발생할꺼 같아요. 총균쇠라는 책에서 읽다가 들던 생각인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화중에 반신반인의 이야기가 왠지 허구적인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윤리적 개념이 없던 시대 이기도 했거니와, 원래 신화라는게 아주 허구적인 사상에서 출발하지는 않다는것도 책을 통해 알게 된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cyrus 2014-12-31 11:50   좋아요 1 | URL
생각해보면 신기하죠. 신화에서 나올법한 상상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요. ^^
 

 

 

 

 

 

 

 

 

 

 

 

 

 

 

 

 

 

 

 

 

 

 

 

 

 

 

 

 

 

 

 

 

 

 

 

 

 

 

 

 

 

 

 

 

 

 

 

추리소설 마니아라면 한번 정도 읽어봤을 작품들을 펴낸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은 지 얼마 안 됐다. 존 딕슨 카가 쓴 소설 위주로 이제 두 권만 읽었을 뿐이다. (『해골성』과 『모자수집광사건』) 그런데 책의 편집에 대해 아쉬움이 느껴진다. 특히 『모자수집광사건』도 『황제의 코담뱃갑』처럼 타 출판사에서 새롭게 번역됐으면 하는 작품이다. 최근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로 나온『황제의 코담뱃갑』도 이미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에서 소개되었던 작품이다. 『화형 법정』도 엘릭시르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온 카의 대표작이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동서미스터리문고의 단점은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독자가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인명, 지명 또는 기타 용어를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추리물을 읽는데 굳이 이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복잡한 사건이 하나씩 해결되는 이야기의 진행 과정을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작품 전체 혹은 작품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특정 용어를 독자가 그냥 지나쳐버려 놓칠 수 있다.

 

예를 들면,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해드리 경감이 펠 박사의 조수 랜폴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스태버스 사건’을 언급한다. 경감은 이 ‘스태버스 사건’ 덕분에 기드온 펠 박사의 추리 능력을 알게 됐고, 랜폴은 이 사건 덕분에 지금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는 스태버스 사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소개하는 주석을 달지 않았다.

 

 

 

 

 

 

 

 

 

 

 

 

 

 

 

 

 

 

 

스태버스 사건은 기드온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카의 작품 속 사건이다. 국내에서는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스태버스 가문의 사람들이 목이 부러져 죽은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된다. 스태버스 가문의 조상인 앤터니는 자신의 저택 근처에 마녀를 처형하고 그 옆에 교도소를 지었다. 이때부터 스태버스 가문의 끔찍한 저주가 시작된다. 후손들은 목이 부러진 채 죽고 만 것이다. 랜폴은 기차 여행을 하는 길에서 우연히 도로시 스태버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이를 계기로 팰 박사와 함께 스태버스 가문의 저주를 푼다.

 

『모자수집광사건』의 역자가 추리소설에 정통하고 관심이 많았더라면 작품 속 사소한 대화 내용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작품 해설에 언급됐어야 한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작품 해설 방식도 아쉽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너무 부족한 분량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마녀가 사는 집』과 『모자수집광사건』은 2003년에 1월에 동시에 국내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마녀가 사는 집』는 아동용 작품으로 소개되는 바람에 오히려 카 특유의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죽이는 어설픈 삽화를 넣어버린  ‘악마의 편집(?)’을 저질렀고(이 책에 대한 카스피님의 서평을 참고했음), 『모자수집광사건』은 카의 작품을 좀 더 상세하게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을 간과하고 말았다. 여러모로 두 작품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새로 번역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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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분야를 읽으셔서 덕분에 다양한 정보를 듣게되네요 ㅎ 좀 무시무시 할거 같지만 서점에서 보면 그냥 지나치진 않을거 같아요^^

cyrus 2014-12-30 18:17   좋아요 0 | URL
편식 독서를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는 중입니다. 북플로 관계를 맺은 분들 덕분에 저도 몰랐던 정보를 많이 얻습니다. ^^

낭만인생 2014-12-30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묘한 재미를 알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카스피 2014-12-30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리소설의 세계에 빠져드셨군요.축하드립니다^^
cyrus님이시라면 아마도 좋은 추리 리뷰를 많이 남기실것 같네요.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읽으시고 역자의 주석이 너무 없다고 지적하셨는데 그건 어쩔수 없을 것 같습니다.2003년도에 나온 동서미스터리문고를 처음 접하신 분들이라면 잘 알수 없지만 이 문고시리즈는 사실 1970년대 중반에 나왔던 동서추리문고를 그대로 복간한 책들이지요.아는 분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동서추리문고는 일본의 모 출판사에서 나온 추리문고를 그대로 일어번역한 책이라 현시점에서 보면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상당수 있습니다.
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른 추리 소설을 사랑한 분들이라면 헌책방을 뒤지면서 찾았던 일종의 성배같은 책들인데 비록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한것을 한국어로 재번역했지만 워낙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많았고 이후 전혀 재간이 안되었기에 어쩔수 없었지요.
이후 2003년에 동서미스터리문고로 재간되면서 많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1970년대의 동서추리문고를 토씨하나 안틀리고 그냥 복간해서 많은 비난을 받게되었지요.
이런 사정이기에 님이 아쉬워하는 부분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마녀가 사는 집은 현재 아동용 책으로만 간행되었는데 이 책 역시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삼중당 추리문고에서 성인용으로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동서 미스터리문고에서 삼중당 추리문고의 책들을 다수 차용해 간행했기에 이 책도 재간될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다시 재간되지 않았네요.

cyrus 2014-12-30 23:11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반갑습니다. 진작 읽었어야 했는데 뒤늦게 재미에 푹 빠졌어요. 아직 입문자 수준이라서 카스피님이 예전에 블로그에 쓰신 추리물에 관한 글과 서평을 읽고 있습니다. 물만두님의 글도 읽고요. 저 같은 입문자가 추리소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글입니다. 이런 가치가 있는 수많은 글이 잊혀지는 게 아쉽게 느껴집니다.

동서미스터리문고의 역사에 무척 궁금했는데 마침 카스피님의 댓글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내년에도 예전처럼 추리소설에 관한 페이퍼나 서평 업데이트를 많이 해주세요.
 
모자수집광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0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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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원제: The Mad Hatter Mystery)은 존 딕슨 카가 두 번째로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실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과 『모자수집광사건』은 193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펠 박사도 카가 맨 처음 창조한 탐정 앙리 방코랭처럼 사건 현장에 조수를 대동한다. 미국 출신의 랜폴이라는 인물이다. 『모자수집광사건』이 펠 박사가 나오는 두 번째 소설이라서 그의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기드온 펠 박사는 사전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인물이다. 움직임이 둔한 편이라서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이동한다. 복장은 주로 낡은 망토와 중절를 착용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부에 해드리 경감 '스태버스 사건'을 잠깐 언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스태버스 사건'이란 바로 『마녀가 사는 집』에서 펠 박사가 처음 맡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 과정을 고려하면서 읽으려면 『마녀가 사는 집』, 『모자수집광사건』 순으로 읽어야 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은 이전에 발표한 카의 작품(『밤에 걷다』『해골성』)보다 사건이 복잡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원제의 'The Mad Hatter'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특이한 '미친 모자 장수'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크 모자를 훔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가리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난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가 남아있는 런던탑에서 필립 드리스콜이라는 젊은 기자가 중세 때 사용했던 무쇠 화살에 찔린 채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은 드리스콜이 미친 모자 장수가 훔쳐서 사라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드리스콜을 죽인 범인은 모자를 훔치고 다닌 미친 모자 장수란 말인가. 사건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미친 모자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범인이 너무 뻔뻔하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살해 현장에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펠 박사는 처음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모자 도난 사건이 드리스콜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미친 모자 장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펠 박사는 모자 도난 사건, 드리스콜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를 해드리 경감에게 맡긴 채 또 다른 사건에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에드거 앨런 포의 미발표 원고를 찾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원고는 죽은 드리스콜의 삼촌 윌리엄 경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펠 박사는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미친 모자 장수의 모자 절도사건, 런던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포의 미발표 원고 도난사건. 카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절묘하게 얽혀 복잡한 트릭을 선보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이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다. 아무래도 세 가지 사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크게 고심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해드리 경감이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면서 수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책의 300쪽 정도 돼서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건의 내막이 점점 밝혀지게 된다. 결말이 궁금하다면 꾹 참고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자는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펠 박사는 해드리 경감이 수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보고 나서야 경감의 추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완벽한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펠 박사는 자신의 추리를 공개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방의 추리를 듣고 나서 자신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추리를 덧붙여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수사 방식은 겸손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질질 끌어 결말이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사건 현장에 들어서마자 간단한 단서만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자신의 추리를 왓슨과 형사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는 셜록 홈즈와 무척 비교된다.

 

이 소설에서 해드리 경감은 항상 사건 현장에서 침묵하는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불만을 표출한다. 펠 박사가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신비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낸다고 비꼬는 것이다. 그러자 펠 박사는 자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탐정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소설 속 탐정은 현실적이지 못해 부정하고 나선다. 그는 자신이 추리에 뜸 들이는 이유를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남들에게 뽐내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펠 박사는 단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증하는 추리야말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신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대식가인데 음식과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범죄 이야기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놀 땐 잘 놀고, 공부할 땐 완벽하게 암기하면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모범생 같다. 이런 친구들이 성적 잘 나오는 비결은 항상 똑같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교과서만 쭉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뚝심 있게 공부한다.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고수한다. 문제에 한 번 파고들면 풀 때까지 매달린다. 펠 박사는 인내심이 많고 뚝심이 센 탐정계의 모범생이다. 문제의 답을 완전히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푸는, 공부와 문제 풀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모범생.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문제 하나라도 틀리는 실수를 두려워한다. 펠 박사 또한 섣부른 추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잘못된 추리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범생을 은근히 싫어하고 질투했다. 문제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모범생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꽉 막히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펠 박사의 추리가 익숙하지 않다. 국내에 그가 등장한 작품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편인데 앞으로 이 신중한 탐정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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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추리소설과는 아직 친해지지가 않아. 읽어볼 생각도 안 들고. 이유가 뭘까 곰곰_

cyrus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적 차이감이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qualia 2014-12-2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뚱딴지 같은 질문인데요. 원제 『The Mad Hatter Mystery』를 『모자수집광사건』으로 번역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cyrus 님 글을 읽어보면 “Mad Hatter”는 “미친 모자 장수” 혹은 괴짜 모자 장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미친 모자 장수가 실제로도 모자 수집에 미친 “모자수집광”인가요? 원작 소설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지 걍 궁금해서요.

구한말 혹은 개화기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어느 외국인 탐험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조선)처럼 모자가 다양하고 수많은 나라는 첨 봤다고요. 만약 어떤 모자수집광이 당시 한국에 들어왔다면 대박을 쳤을 거란 생각이...^^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우리 민족은 수많은 갖가지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냈고, 또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모자를 쓴 채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모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서 ‘갓’의 실용성/예술성/독창성/문화적 상징성은 정말 압권이죠.

cyrus 2014-12-28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가 ‘미친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빠뜨리고 말았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모자수집광사건’이라고 정했는데 사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잘못 지은 듯한 느낌이 났어요.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자 도둑이 모자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자를 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모자만 훔치는 절도범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모자만 수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보유한 수집가의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 카렐 차페크 희곡 10대를 위한 책뽀 시리즈 4
카렐 차페크, 조현진 / 리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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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형 로봇은 인간과 어느 정도로 닮아야 할까. 위에 있는 사진을 보라. 얼핏 보아서는 그저 쌍둥이 같지만 두 사람(?) 중 하나는 로봇이다. 어느 쪽이 로봇일까. 사진 속 진짜 사람은 일본의 로봇전문가 이시구로 히로구시다. 그가 만든 로봇의 이름은 제미노이드(Geminoid)이다. '쌍둥이'를 뜻하는 어원 'gemin-'과 '인조인간'이라는 뜻의 'android'를 결합한 말이다. 실제로 이 로봇은 그의 얼굴 윤곽부터 피부색, 머리카락, 턱수염과 눈썹처럼 미묘한 부분까지 똑 닮았다. 키도 자신과 똑같이 재현했다고 한다.

 

시력이 큰 문제가 없는 이상, 우리는 이 사진 속에 로봇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다. 풀린 듯한 눈동자, 어색한 표정 같은 미세한 차이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보면서 두렵고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위화감으로 인한 호감도 하락을 로봇 공학자들은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고 부른다.

 

로봇에 대한 인간의 이미지는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 로봇,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것은 1921년 구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희곡에서였다.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이라는 희곡에서 처음 사용된 말이다. 체코어로 노동, 혹은 노역을 의미하는 'Robota'라는 단어에서 a자를 빼 만든 신조어다.

 

로숨은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처음으로 만든 발명가이자 해양생태학자다. 그는 직접 로봇을 만들어서 무신론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이때 만들어진 로봇은 인조인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로숨의 아들이 노동하는 로봇을 만들게 된다. 본격적으로 로봇 산업이 시작된 것이다. 로숨 부자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고, 로봇 회사의 이름으로 언급될 뿐이다.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의 사장인 해리 도민의 목표는 인간을 대신하는 값싼 기계 노동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 희곡에 등장하는 로봇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서막에서 로봇을 묘사하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무표정한 얼굴에 눈동자는 한 곳만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것은 인간과 구별하기 위한 영혼 없는 기계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라디우스와 헬레나가 대화를 나누는 극중 장면 (70쪽)

 

 

 

희곡의 배경은 로봇이 노동자로서 인간의 지배를 받는 사회이다. 그러다가 점점 로봇은 노동을 통해 지능이 형성되고, 반항정신을 가지게 된다. 라디우스라는 이름의 로봇이 처음으로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몇몇 인물들은 점점 인간에게 반항하는 로봇을 경계하고 무서워한다. 그렇지만 도민은 로봇 생산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1막에서 로봇 생산을 중단하기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은 도민의 아내 헬레나다. 그녀는 처음부터 로봇이 인간처럼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한다. 로봇 생산을 중단하는 것만이 인간과 로봇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막에서 로봇에 의해 인간이 멸망하는 불행한 조짐을 느낄 수 있다. 로봇들의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민과 로봇 회사에 소속된 일행들은 로봇 사업의 성공을 기념하는 향연을 펼친다. 도민의 다음 목표는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른 로봇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결국, 로봇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데 성공한다. 인간 전복을 꾀하는 라디우스와 그가 이끄는 로봇들의 저항에 파괴된 도민의 로봇 회사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계급 갈등을 연상시킨다. 그렇다고 차페크가 이 희곡 작품을 통해 단지 맑시즘을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 단계대로 피지배자, 노동자였던 로봇은 지배자 인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세상은 인간의 명령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일하는 로봇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로봇은 세상의 고아(Rabota)가 되고 만다. 자신들을 만들어 줄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 로봇들은 유일한 생존자 알뀌스뜨에게 로봇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로봇과 인간의 싸움에서 과연 로봇이 최종 승자라고 볼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해 끝없는 욕망과 오만으로 인해 인간은 로봇에게 패배한 것은 사실이지만, 로봇은 인류의 시대를 종식함으로써 자신들의 복제품을 더 이상 만들어질 수가 없게 된다. 로봇와 인간, 이 둘 중 누구도 세상의 승자라고 단번에 정하기 어렵다. 승자는 없다. 이 작품의 결말은 인류가 자초한 과학의 암울한 비극을 예언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록 희곡은 로봇이 득세하는 어두운 미래를 묘사하고 있지만, 차페크는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막을 내린다. 남자 로봇 쁘리무스와 여자 로봇 헬레나는 인간의 감정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로봇은 아담과 하와가 되어 폐허가 된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랑과 평화의 부활을 알린다.  

  

지금도 과학자들은 인간형 로봇을 끊임없이 개발한다. 로봇이 인류의 미래에 '대체 인간'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짐을 들어 나르는 일꾼이 된다거나 하는 잡무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준다거나 하는 기대다. 물론 군사적인 목적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면 개발될수록, 이는 묘한 딜레마를 불러일으킨다. 로봇이 너무 인간과 닮게 되면 사람들은 정체성에 도전받는 느낌이 들게 된다. 지금은 가벼운 조크로 여길 수도 있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고, 인간이 로봇으로 오해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차페크의 결말이 너무 안이하게 끝났다는 느낌이 든다. 희곡 작품을 읽는 독자 혹은 무대 공연을 본 관객들에게 또 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열린 결말 같다. 감정을 가진 로봇은 인간에 의해 파괴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리를 대신한 로봇의 후예들은 휴브리스(Hubris)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까.

 

 

 

 

※ 체코어 Robota는 ‘노예’, ‘노역’ 이외에도 이리저리 떠돌면서 갈 곳 없는 고아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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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2-25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봇 스스로는 인간한테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 또한 로봇인간으로 진화해나가리라는 것은 생명의 진화사를 살펴보면 필연적일 것 같습니다. 인간과 로봇은 공진화 혹은 융합진화해갈 것 같아요. 인간성, 인류의 도덕과 윤리 개념도 인간 의식의 확장/진화와 함께 진화하리라고 봅니다. 인간과 로봇의 미래를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네요.

qualia 2014-12-25 11:21   좋아요 0 | URL
‘로그인’ 상태에서 위 댓글을 써서 올렸는데, ‘로그아웃’ 상태로 입력이 되더군요. 제가 댓글 작성할 때, 알라딘에서 설정한 로그인 시간을 초과했나봅니다. 그래서 작성자가 익명으로 표기되더군요. 그래서 다시 로그인해 익명 처리된 댓글을 지우고, 댓글을 새로 올렸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cyrus 2014-12-25 16:26   좋아요 0 | URL
qualia님,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의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생각이 충분히 반박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니까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카렐 차페크 평전>도 같이 읽었어요. 그 책에 차페크의 작품을 해설한 내용이 있습니다. 실제로 차페크는 로봇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이야말로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한 사람의 해석이라고 여길 정도로 작품 결말에 드러난 자신의 희망을 믿었다고 합니다. qualia님의 의견처럼 인간과 로봇의 공진화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제가 글에서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낙관적인 미래가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