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피라미드 바벨의 도서관 21
아서 매켄 지음, 이한음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흔히 코스믹 호러(우주적 공포)의 대부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를 꼽는다. 그가 묘사하는 드림랜드와 그가 창조한 외계 고대신들은 너무나 끔찍하고 몽환적이어서 공포와 함께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독자들이 러브크래프트 코스믹 호러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원초적 본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에드거 앨런 포와 함께 미국 공포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본줄기로 인정받게 되며 오늘날까지 그 원류를 스티븐 킹이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공포문학의 계보를 제대로 정리한다면 러브크래프트 곁에는 로드 던세이니와 아서 매켄이 있어야 한다. 러브크래프트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로드 던세이니의 시적 문장을 쓰고 싶었고, 궁극의 공포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려 연출하는 데 성공한 매켄의 발상을 꿈꿨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어 보면 그가 늘 동경했던 로드 던세이니와 매켄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 일부를 인용하거나 일부러 언급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매켄은 러브크래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매켄과 러브크래트트의 소설 속에는 금기에 가까운 미지의 공포에 접근하는 바람에 불가사의한 운명에 처하는 인물이 나온다. 인물이 죽거나 행방불명되면서 이야기는 공포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끝이 난다. 매켄의 작품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이야기의 결말이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것이다. 국내에 유일한 매켄의 작품 선집이라 할 수 있는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21번 《불타는 피라미드》에 처음으로 서평을 남긴 독자는 공포의 원인이 완전히 밝혀내지 못하고 두루 뭉실 넘어가는 듯한 이야기가 아쉽다고 평을 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매켄 호러의 특징이다. 공포의 실체와 관련된 단서를 살짝 보여줄 뿐, 독자에게 완전히 공개하지 않는다. 독자는 호기심에 이야기에 쉽게 몰입한다. 이러한 문학적 장치는 대중의 반응을 한 번에 주목하게 하는 신비주의 광고 전략과 비슷하다. 작가는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미스터리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그러면 독자는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공포의 여운과 긴장감을 쉽게 잊지 못한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고 나서 그 장면을 지우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 방식은 러브크래트프가 소설을 쓸 때 자주 사용했다. 

 

「불타는 피라미드」를 제외한 나머지 두 작품(「검은 인장 이야기」와 「하얀 가루 이야기」)은『The Three Impostors; or, The Transmutations』에 수록된 것이다. 보르헤스는 작품집 중 마음에 드는 두 편의 작품만 골라 소개했다.

 

「검은 인장 이야기」의 그레그 교수는 웨일스 지방의 민간전승에서 전해 내려오던 ‘작은 인간들’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직접 만나는 극적인 순간에 이르지만, 행방불명이 된다. 교수는 떠나기 직전에 남긴 지금까지 추론한 ‘작은 인간들’  대해서 쭉 언급하지만, 교수가 행방불명되면서 편지는 무수한 의문만 남겼을 뿐이다. 이것만 가지고 독자는 ‘작은 인간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다. 「불타는 피라미드」에서 ‘작은 인간들’이 다시 등장한다. 주인공 다이슨은 다양한 형태로 배열된 부싯돌, 벽에 그려진 눈 모양 표시 등을 해독하여 황량한 길 한가운데 펼쳐지는 ‘작은 인간들’의 끔찍한 비밀 집회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작은 인간들’의 정체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나마 이 소설의 극적인 장면은 독자들에게  ‘작은 인간들’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살아있는 자들을 집어삼키는 화염 구덩이 속에 ‘작은 인간들’은 몸부림친다. 그들은 인간처럼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지만, 꿈틀거리고 흐느적거리는 무정형의 괴물체에 더 가깝다. 

 

태초부터 존재해오던 무정형의 괴물체 모티프는 러브크래프트가 외계 신들(아자토스, 요그 소토스)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러브크래프트의 외계 신들은 너무나도 끔직하다 못해 메스꺼울 정도로 혐오스럽다. 「하얀 가루 이야기」는 러브크래트프가 인상 깊은 매켄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에서 악마의 연회에 사용되는 하얀 가루를 과다 복용한 주인공 프랜시스 레스터가 괴물체로 변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그곳을 쳐다본 나는 새하얗게 달구어진 쇠가 심장을 지지는 듯한 강렬한 공포심을 느꼈다. 악취를 내뿜는 검은 덩어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끔찍하게 썩은 모습으로 부글거리는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서 녹으면서 계속 모습을 바꾸고 있었고, 끓어오르는 역청처럼 기름기 있는 거품을 부글부글 내뿜고 있었다. (「하얀 가루 이야기」 중에서, 107쪽)

 

 

러브크래프트의 외계 신이 등장하기 전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한 습기가 신체 감각을 자극하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한다. 괴물은 갑자기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등장을 알리는 불쾌한 신호를 보낸다. 이때부터 등장인물과 독자는 자신의 등 뒤에 알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포의 압박감이 점점 심장을 조여 올수록 위험한 호기심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은 공포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깊숙이 다가오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금단의 영역에 침범한다. 죽음과 맞바꾸는 모험의 대가는 너무나도 비참하다. 끝내 공포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금단의 영역에 다가서는 인간은 돌연 사라지거나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

 

매켄은 스티븐 킹과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가 사랑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다. 러브크래프트보다 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소개된 매켄의 작품은 열편도 채 안 되는 짤막한 단편이 전부다. 『The Three Impostors; or, The Transmutations』 이 완역되는 날은 과연 있을까. 얼마 안 되는 작품들만 가지고 독자들이 매켄의 흥미진진한 공포문학이 주는 매력을 느껴보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 국내에 번역된 아서 매켄의 작품들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 2004)

- 「위대한 목신」

 

《세계 호러 걸작선》(책세상, 2004)
- 「악마의 뇌」(작가명이 ‘아서 메이첸’으로 표기되어 있음)


《세계 호러 단편 100선》(책세상, 2005)
-「궁수」(작가명이 ‘아서 메이첸’으로 표기되어 있음)


《톨긴의 환상 서가》(황금가지, 2005) - 「공포의 엄습」


《러브크래프트 전집 6》(황금가지, 2015) -「검은 인장의 소설」

(「검은 인장 이야기」와 동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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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작품 : E.T.A. 호프만  「황금 항아리 : 새로운 시대의 옛 이야기(Der golden Topf」 (1813년)

 

 

 

괴테《파우스트》를 완성한 다음 해인 1832년 3월 22일, 82년 6개월의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은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려 60여 년이 걸렸다. 이뿐만 아니라 괴테는 왕성하게 활동하며 시와 소설, 희곡과 산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괴테의 대표작으로 우리는 항상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두 작품을 먼저 언급한다.《파우스트》가 괴테의 작가 인생 후반기를 장식하는 스완 송(Swan Song)이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젊은 괴테 앞에 작가로서의 길을 터준 출세작이다. 나폴레옹도 읽을 정도로 18세기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된《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덕분에 괴테는 평생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것은 소설 속 남자주인공처럼 약혼자가 있는 여성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한 체험에서 비롯됐다. 그녀에게 실연당한 괴테는 괴로움을 잊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에 괴테의 친구 예루살렘이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랑의 실패에 비관하다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친구의 극단적인 결정이 이미 쓰디쓴 사랑의 실패를 맛본 괴테 입장에서는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자신도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괴테는 친구의 자살에 의외의 인물이 개입된 사실을 알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친구에게 권총을 빌려준 사람은 결정적으로 괴테에게 정신적 상처를 안겨준 샤를로테의 약혼자였다. 사랑 하나로 인해 생긴 악연과 실제 체험을 토대로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를 완성했다. 괴테와 예루살렘이 합쳐진 베르터는 로테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실의와 고독감에 빠져 끝내 권총자살을 한다.

 

이 소설은 출간 즉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무명작가였던 괴테를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만든 베르터 열풍은 곧 당시 사람들이 소설 속 베르테르의 죽음을 모방해 자살하는 데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그 높던 교황과 황제의 권력과 권위도 이미 무너졌거나 무너져 가던 18세기 유럽은 이미 자살을 죄악이라고만 생각하던 시대를 한참 지나 있었다. 괴테의 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낭만주의 영향 속에서 문학과 예술에서 나타나는 자살은 더 이상 추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무척 괴로울 법한데 작가나 예술가들은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걸 작품 소재로 삼는다. 운이 좋으면 전업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호프만도 괴테처럼 사랑의 좌절을 겪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펜을 잡기 시작했다. 《Phantasiestücke in Callots Manier》(칼로 풍의 환상화집)은 호프만이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인데 여기 수록된 동화 「황금 항아리」는 가장 많이 알려졌다.

 

주인공인 대학생 안젤무스는 현실 세계와 사랑과 환상 세계의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상에 시달린다. 그는 우연히 정향나무 아래서 초록 황금빛을 띤 세 마리의 뱀을 발견한다. 세 마리의 뱀은 불의 정령(현실 세계에서는 궁정 사서관 린트호르스트로 등장한다)의 딸인데 안젤무스는 세 자매 중 막내인 세르펜티나를 짝사랑하게 된다. 그렇지만 교감의 딸 베로니카는 안젤무스를 좋아하고 있었다. 안젤무스는 베로니카에게 자신이 추밀고문관이 되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만다. 복잡한 삼각관계에 성격이 고약한 마녀가 사과장수 노파로 분하여 개입한다. 이 마녀는 불의 정령 린트호르스트와 적대적 관계이고, 이야기 초반부에 안젤무스는 사과장수 노파로 둔갑한 마녀의 광주리를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자신의 지갑을 마녀에게 빼앗겨버린 악연이 있었다. 안젤무스를 차지하고 싶은 베로니카는 마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안젤무스와 린트호르스트를 괴롭히기 위한 마녀의 음모였다. 한편 안젤무스는 세르펜티나를 만나기 위해서 린트호르스트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지고, 린트호르스트 밑에서 필사 작업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을 완수하면 세르펜티나가 소유하는 황금 항아리를 혼수품으로 얻을 수 있다.

 

「황금 항아리」의 안젤무스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환상 세계로의 진입을 추구한다. 이 동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망각, 우울 증세는 병적이다. 특히 안젤무스가 정향나무 밑에서 초록뱀 세 자매를 만나는 환상을 겪는 장면은 일상을 초월하는 광기에 가까운 분열된 정신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호프만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는 「황금 항아리」를 집필하기 전에 사랑의 실패에 극단적인 정신 상태를 보였으며 한때 자살에 대한 생각에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한다. 「황금 항아리」는 호프만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젤무스는 호프만이 사랑했던 율리아 마르크의 생일과 관련된 수호성자의 이름이다. 안젤무스가 사랑하는 세르펜티나는 율리아 마르크, 베로니카는 호프만의 아내 마샤에게서 나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호프만의 현실 세계는 정식으로 마샤와 결혼한 부부로서 한집에 살게 된다.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버린 반쪽짜리 사랑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 그의 환상 세계 속에는 또 다른 집이 있었고, 그 집에 율리아 마르크가 살고 있다. 현실 세계의 사랑을 상징하는 베로니카를 외면하고 환상 세계의 세르펜티나를 만나기 위해 린트호르스트의 집을 매일 찾아가는 양상을 떠올려본다면 이 동화를 통해 호프만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반쪽짜리 사랑을 잊지 못한 호프만은 자신을 동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여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을 끝내 성취한 영웅으로 그렸다. 사실 주인공 이름만 봐도 동화의 결말을 알 수 있다. 세르펜티나를 원하는 안젤무스는 율리아 마르크의 수호성인이 되고 싶은 호프만의 간절한 마음이며 드디어 율리아 마르크와 닮은 세르펜티나와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실패한 짝사랑의 증상은 고통스러운 열병과 같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사랑을 하다가 이내 마음을 졸이게 되고 마침내 숯검정처럼 속이 타들어 간다.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증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헤어나기 힘든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어떤 심리학자는 짝사랑 증상이 심하면 상대방이 자기 안에서 너무 크게 미화돼 자신도 모르게 환상을 그린다고 말한다. 호프만은 괴테보다 반쪽짜리로만 남은 짝사랑 후유증에 고생했다. 율리아 마르크가 호프만 곁에 없어도 그녀는 아름다운 황금색 빛깔을 내는 초록색 뱀 세르펜티나가 되어 안젤무스가 된 호프만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그러나 이 환상은 호프만 스스로 만든 것이다. 동화 「황금 항아리」의 안젤무스는 행복했지만, 호프만은 평생 현실을 도피하려는 도망자 신세로 살아야 했다.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환상이었다. 호프만의 환상소설은 호프만 본인에게 허락된 마약이다. 

 

 

 

 

 

 

 

 

 

 

 

 

 

 

 

 

 

 

 

※ 호프만의 「황금 항아리」는 단편 선집이나 동화 모음집에 단골로 수록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간혹 ‘황금 단지’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물의 요정을 주제로 한 낭만주의 문학작품을 모은《물의 요정의 매혹》(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7)에 수록된 호프만의 동화 제목은 ‘황금 단지’다. 오래전에 개정판마저도 절판된 《호프만 단편집》(경남대학교출판부, 2002)에서는 ‘금항아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절판된 《호프만 단편집》의 서평에 의하면 번역은 최악이라고 한다. 「황금 항아리」가 수록된 《환상문학 걸작선 1》(자음과모음, 2013)을 추천한다. 이 책에 호프만의 노벨레 「왕의 신부」도 있는데 다른 호프만의 작품들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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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2-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프만의 글은 저는 못읽어봤네요.
괴테의 파우스트는 저를 좌절하게 만든 책이고요. ㅠㅠ

cyrus 2015-02-23 23:47   좋아요 1 | URL
외국 단편소설 모음집에 간혹 호프만의 단편 한 편 정도는 수록되어 있는데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많이 알려진 단편이 ‘황금 항아리’와 ‘모래 사나이’입니다. 예전에 파우스트를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어요. 언젠가는 꼭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한 편 한 편이 방송으로 전파되고 나면 화젯거리가 생긴다. ‘압구정 백야’ 한 편이 방송되고 나면 그 다음 날까지 드라마와 관련된 단어와 임성한 작가가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그녀의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도 ‘압구정 백야’가 ‘막장 드라마’라는 사실을 다 안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 ‘막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이유는 일반 드라마에선 볼 수 없는 파격적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미신, 귀신과 같은 현대 과학과 동떨어진 자극적인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이미 2011년에 방영된 ‘신기생뎐’은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할머니 귀신과 빙의 장면 횟수가 많아졌고, ‘신귀생뎐’이라는 시청자들의 조롱이 섞인 우스운 별명도 나왔다. ‘오로라 공주’는 그간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죽거나 하차했다.

 

‘압구정 백야’도 이전에 나온 작품들과 끔찍하게 닮았다. 등장인물들이 연달아 죽어나간다. 지난주 84회(2월 10일 방영)에 여주인공 백야(박하나 분)는 남편과 친오빠를 잃은 충격으로 자살 시도를 하기 위해 바닷물에 뛰어들어 외친 대사가 압권이다. “신이 있나요? 있다면 나랑 맞짱 한 번 뜨세요.” 작가는 영화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와 맞먹는 인상 깊은 명대사 하나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튼 신과 싸우자고 선전포고하는 여주인공의 대사 한 마디 덕분에 지난주도 대중의 이목을 드라마로 향하는 데 성공했다.

 

‘임성한 월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람의 삶과 죽음, 팔자가 모두 신의 소관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간혹 드라마 대사 속에 ‘신’이 언급될 정도이니 작가의 종교관이 무척 궁금하다. 작가의 가치관이 작품에 투영될 수 있다지만 대놓고 시청자들에게 주입하려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반면 소설가 로드 던세이니‘페가나 월드’에 사는 신들의 팔자는 시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던세이니는 기존의 신들이 나오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플롯을 파괴한다. 신들은 자신들을 숭배하지 않거나 모독하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는 신의 영역을 넘는 자에게 벼락을 내리치고,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시간을 지배했다. 페가나에 사는 신들도 그리스 신화 속 신들처럼 인간의 인생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던세이니는 평화로운 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인물 하나를 불러들인다. 1905년에 발표된 단편집 《페가나의 신들》(페가나북스, 2011)에 처음으로 등장한 최고의 신 마나-유드-수샤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던세이니의 두 번째 단편집이자《페가나의 신들》의 속편인 《시간과 신들》(Time and the Gods, 페가나북스, 2012)은 전작에 비해 신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시간’이다. 페가나의 신들은 자신들이 시간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연히 페가나의 신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요 인물이다. 하지만 신들의 자만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야기 초반부에 시커먼 모습에, 양손에 피투성이고 붉은 검이 매달린 시간이 등장해서 신들에게 경고한다.

 

시간은 슬그머니 그 얼굴을 훔쳐보고는 핏방울 떨어지는 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신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신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멸망시킨 그가 언젠가 자기들마저 죽일지 모른다는 새로운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새로운 울부짖음이 황혼 속을 퍼져갔다. 신들은 꿈의 도시에서 바치는 만가(輓歌)를 불렀다. (로드 던세이니 《시간과 신들 1》 중에서, 11쪽)

 

《시간과 신들》에 나오는 시간의 모습은 흡사 크로노스와 유사하다. 한 손에 거대한 낫을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많이 알려졌다. 크로노스의 낫이 시간을 베어버리듯이 페가나 월드를 지배하는 시간은 역으로 신들의 운명과 그들이 사는 세계마저 검으로 파괴한다. 시간이 모든 것들을 ‘무’(無)로 만들어버린다면, ‘운명’과 ‘우연’이라는 두 기사가 신들의 세계를 움직인다. 《시간과 신들》 2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두 기사는 체스와 비슷한 게임을 한다. 체스판 위에는 게임의 말은 신이고, 먼지는 신들이 사는 세계가 된다. ‘운명’과 ‘우연’의 기사가 게임의 말을 옮기면 신들도 따라 움직인다. 먼지가 피어오르면 세계는 해가 뜨고 지면서 하루가 지나간다. 페가나의 신들은 이 먼지가 자신들이 흩뜨렸다고 말한다. 신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조종하는 거대한 불가항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장면이다.

 

《시간과 신들》의 이야기 구성 방식을 보면 먹는 것과 먹히는 대로 순서대로 연결한 먹이사슬 비슷한 구조가 눈에 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된 인간과 신들은 피식자-포식자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거스르거나 함부로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의 위험한 호기심은 신들의 세계를 위협한다. 신들은 인간보다 월등하고 초인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의 호기심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신보다 더 센 놈들이 있었으니 바로 검을 들고 다니는 ‘시간’, 그리고 ‘운명’과 ‘우연’의 기사다. 제아무리 위대한 신이라도 세 명 앞에서 쩔쩔맨다. 페가나를 지배하는 주신 마나-유드-수샤이도 예외가 아니다. 신마저도 폐허로 종착 되는 운명의 순리를 피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시간과 신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먹이사슬 과정을 피라미드 형태로 그린다면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인간, 중간은 신, 제일 꼭대기에 ‘시간’, ‘운명’, ‘우연’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신도 ‘시간’, ‘운명’, ‘우연’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안 될 걸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위대한 것처럼 여기는 정신승리에 쉽게 도취한다. 1912년에 발표된 《The Book of Wonder》에 수록된 ‘추부와 셰미시’(Chu-Bu and Sheemish)라는 짤막한 소설은 추부와 셰미시라는 두 명의 신이 인간의 숭배를 받기 위해 서로를 조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우습다. 작은 지진이라도 일으키면 위대한 신이 내리는 기적 행세를 할 수 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둘 다 지진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연히 일어난 지진 덕분에 추부와 셰미시는 자신들의 체면을 가까스로 살리는 데 성공한다.

 

 

 

 

 

 

 

 

 

 

 

 

 

 

 

 

 

만약에 니체가 《시간과 신들》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니체는 신이 죽었음에도 인간은 수 세기 동안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 속에 살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보다 자신들이 만든 임의의 기준과 척도에 따라 존재를 파악하려고 한다. 정작 자신이 그 같은 인식상의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페가나의 신들은 시간의 무시무시한 힘을 알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영원불변의 존재로 남고 싶어 한다. 시간, 운명, 우연의 존재가 있다면 맞짱 한 번 뜰 기세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싸움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막연한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서 신들은 불가항력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인간 앞에서 센 척한다. 그리고 페가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페가나의 신들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스스로 날조해낸 것에 지나지 않은 천상의 세계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과 꽤 닮았다. 니체는 던세이니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 봐, 신은 죽었다니까! 신이 살아있으면 나랑 맞짱 한 번 뜨자!”

 

 

 


※ 페가나북스에 번역한《시간과 신들》은 완역이 아니다. 원작은 총 2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두 권의 전자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2부는 ‘왕의 여행’이라는 외전 성격의 중편이 실려 있다. 페가나북스는 2부에 있는 중편을 제외하고 원작을 번역했는데, 2부의 중편을 페가나 세계관을 다룬 단편들만 모은 작품집에 따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 ‘추부와 셰미시’는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 19번째 책 《톨킨의 환상 서가》(황금가지, 2005)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설명하는 내용에 오류가 있다. 던세이니의 《The Book of Wonder》를 1921년에 나왔다고 소개했는데 숫자가 뒤바뀌었다. 정확한 발표연도는 1912년이다. 1918년에 《The Book of Wonder》라는 동명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는 《시간과 신들》과 1912년에 발표된 작품을 합본한 것이다. 유일하게 던세이니의 작품을 전자책으로 많이 만든 페가나북스 출판사는 던세이니의 작품 목록(시, 희곡, 에세이 등 제외)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The Book of Wonder》의 발표연도를 정확하게 소개했다. 페가나북스는 던세이니의 작품을 많이 출간하는 것을 목표하는 1인 전자책 출판사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페가나북스에서 만든 일부 전자책에 출판사명으로 ‘유페이퍼’라고 나온다. 하지만 공식 명칭은 페가나북스가 맞다. ‘유페이퍼’는 페가나북스 공식 홈페이지의 도메인 이름이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가 하지 않은 일, 그리고 돈 되지 않은 일을 하는 페가나북스의 노고가 장르문학 마니아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페가나북스에서 지금까지 전자책으로 펴낸 장르문학 작품은 공식 홈페이지에 확인할 수 있다.

 

 

페가나북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upaper.net/peg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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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묘약 환상문학전집 1
E.T.A. 호프만 지음, 박계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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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년 전에 세상 어디엔가 사는 자신의 분신을 찾아주는 ‘도플갱어 사이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해 이름과 생년월일 혈액형 등을 검색하면 내 도플갱어가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결과로 알려준다. 지금도 ‘도플갱어 사이트’라고 검색창에 치면 바로 찾을 수 있다. 이 사이트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총 여섯 개의 문항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어떤 사발을 좋아하는지 묻고 있다. 문항 보기로 나온 사발 종류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다. 도플갱어를 찾는데 왜 하필 마음에 드는 사발을 골라야 하는 걸까. 난 일본산 사발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모르는데. 진짜 생뚱맞다. 도플갱어 사이트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이트 결과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도플갱어(doppelganger)는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 자신과 똑같은 대상이나 환영을 보는 일종의 심리현상이다. 심리학·정신분석학적으로는 자기상 환시(autoscopy)라고 일컬어지며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거나 자신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할 경우에 생기는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간주한다. 최근 그 의미가 확대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언급되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 상징이나 의미는 조금씩 다르지만 분열된 대상을 보는 것은 머지않아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암시하는 징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죽음을 부르는 도플갱어는 보통 본인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단, 예외의 경우도 있다.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는 젊은 시절 도플갱어 현상을 경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83세가 될 때까지 장수를 누렸다.

 

도플갱어 현상은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유명 작품 몇 개만 언급하면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 등이 잘 알려졌다. 여기서 도플갱어 현상을 작품의 소재로 처음 사용한 작가가 누군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지만 아마도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이 첫 번째 작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호프만의 첫 번째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은 도플갱어 현상으로 인해 끔찍하고도 불행한 사건이 연속적으로 휘말리게 된다.

 

호프만은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으로 유명한 ‘호두까기 인형’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마치 꿈을 꾸듯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러한 작품의 전개방식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동화 같은 밝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부터 정체불명의 마성이 등장하는 괴기스러운 분위기까지 호프만이 창조한 세계는 무척 폭넓다. 이곳에 호프만의 작품 속 인물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산만하게 넘나든다.

 

《악마의 묘약》의 주인공 메다르두스는 외적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수도사이다. 그는 금기의 성유물인 악마의 묘약을 몰래 마시게 되는데 이 묘약은 메다르두스의 내면에 있는 타락한 정신을 밖으로 분출하도록 만든다. 성녀 로잘리아와 닮은 미지의 여자에 한 눈에 반한 메다르두스는 펄펄 끓는 물이 냄비 밖으로 넘치는 듯한 뜨거운 정욕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찾지 못한다. 결국, 메다르두스는 수도원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로마로 향하는 특별 파견을 가게 된다. 수도원에서 불안한 입지에 처한 메다르두스에게 세속적 삶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혼자 방랑하던 메다르두스는 절벽 위에 졸고 있는 빅토린이라는 사내를 발견한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인생이 완전히 꼬이기 시작한다. 메다르두스가 위험하게 조는 빅토린을 깨우려는 순간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빅토린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메다르두스는 유품이 된 빅토린의 모자와 가방을 들고 사고 현장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메다르두스와 빅토린은 얼굴과 체형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빅토린의 유품을 든 메다르두스는 영락없는 빅토린이었다. 남작의 성에 들어가 빅토린처럼 행동한다. 남작의 딸 아우렐리에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미지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다시 불같은 사랑의 감정을 쏟아낸다. 수도원 밖으로 나온 메다르두스는 점점 추악한 존재로 변한다. 광기 어린 사랑으로 인해 남작 부인과 아우렐리에의 오빠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메다르두스의 광기는 도플갱어의 저주에서 비롯된다.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죽은 줄 알고 빅토린의 삶을 가로챈다. 가짜 빅토린이 된 메다르두스는 남작의 성에 출입이 가능했고, 운명적으로 아우렐리에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빅토린과 동일시한 삶을 살수록 메다르두스라는 이름의 진짜 정체성(영혼)은 죽어간다. 여기서부터 메다르두스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정체성 혼란을 겪는 메다르두스는 빅토린이 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까지 빅토린 행세를 해온 일들이 발각되면 아우렐리에와의 사랑이 물거품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질렀고 강제로 억압당한 메다르두스의 정체성은 추악한 모습으로 왜곡된 ‘이중 인간’으로 부활한다. 이중 인간은 메다르두스 내면에 있는 악마가 되어 메다르두스의 악행을 이끌도록 유혹하는 동시에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메다르두스는 자신이 만든 도플갱어를 만나면 환각 증상과 발작을 일으키는데 호프만은 자기상 환시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은 공포소설(혹은 괴기소설)의 특징을 지녔지만,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요소만 지루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정체성 분열에서 비롯된 끔찍한 망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한순간에 악마로 돌변하는 메다르두스의 심리적 변화는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메다르두스는 이중 인간이 추악한 자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참회한다. 소설은 어두운 충동을 스스로 극복해서 종교로 귀의하는 참된 인간상을 보여줌으로써 결말을 짓는다. 기독교적 사상이 짙게 배어 있는 이야기는 기괴한 분위기가 이야기 전체를 압도하는 공포소설에서 벗어나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악마의 묘약》은 불가사의한 소재인 도플갱어를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했으며 훗날 포와 오스카 와일드의 등장을 예고하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아야한다.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내세운 이유가 있다. 그런데 현재 품절이다. 지금은 오십 권 족히 넘는 장르문학 작품을 소개한 어엿한 문학전집이 되었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책을 재출간하지 않는 출판사의 태도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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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0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0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3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독특한 양반이죠. 호프만....
악마의 묘약`이었나요. 프로이트가 악마의 묘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죠.
꽤 분량이 많았던 것 같던데... 아, 뭐였죠. 생각이 안 나네요.. ㅎㅎㅎㅎ

cyrus 2015-01-30 18:53   좋아요 0 | URL
호프만의 작품으로 처음 읽은 것이 ‘모래 사나이’였어요. 저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곰발님이 말씀하시는 프로이트가 분석한 호프만의 작품이 ‘모래 사나이’일 겁니다. 문학과 지성사에 나온 호프만 단편선에 ‘모래 사나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짧게 나온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악마의 묘약’도 심리학 이론을 들이대면서 분석하기 딱 좋은 텍스트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5-01-30 19:24   좋아요 0 | URL
아, 마자요. 마자요. 모래인간`입니다. 고, 뭐냐...
언캐니 설명하면서 언급한소설이 모래사나이였죠. 참 재미있게 읽었던,인상깊게 읽은 논문인데 까먹었었네요.. ㅎㅎ
 
러브크래프트 전집 4 러브크래프트 전집 4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류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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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언덕과 정원, 햇살 속에서 노래하는 분수, 잔잔히 속삭이는 바다 위로 솟아 있는 황금빛 절벽, 청동과 돌로 이루어진 잠든 도시로 뻗어 있는 평원, 그리고 예장을 걸친 백마에 올라 깊은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가고 있는 어둑한 유령 같은 영웅들의 행렬에 대한 기묘한 환상에 대한 꿈을 꾸고서 한밤중에 잠을 깬 몇몇 사람들이 우리들 중에도 존재한다. (「셀레파이스」에서, 182쪽)

 

 

꿈속의 정신상태는 평상시의 정신활동과 다른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꿈을 꾸는 동안 우리는 엉뚱한 시공간으로 순간적으로 쉽게 이동하거나, 여러 시공간이 겹쳐지고 혼동되는 현상을 겪는다. 연속된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를 따지지는 못하지만, 꿈에서 느꼈던 정서는 평상시보다 더 생생하다.

 

18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 타르티니는 꿈에서 악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다. 그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에서 들은 소리를 재현해 보려 했다. 그 음악은 바이올린 소나타 ‘악마의 트릴’로 탄생했다. 시인 생 폴 루는 매일 밤 침실 문 앞에 ‘시인은 시작(詩作) 중’이라는 글귀를 걸어 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에서 많은 영감의 원천을 찾았다. 살바도르 달리는 자서전에서 일곱 살부터 여덟 살까지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고 밝혔다. 특이한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를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중심으로 우뚝 솟게 만든 자양분이 되었다.

 

달리에 의해 꽃 피운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중요시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는 자아도취적이고, 시적이고 꿈과 같은 세계의 향연으로 이해됐고 기교가 부족한 난해한 미술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환상의 세계는 그동안 익숙했던 사회질서와 정체성을 파괴해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고전 공포소설의 대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트프도 마찬가지다. 그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초자연적 현상을 유령 같은 외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꿈속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 역시 달리처럼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 살았던 괴이한 은둔자였다. 소설을 통해 기이한 환상들이 결합한 어두컴컴하고 습한 꿈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곳에 러브크래프트가 꿈속에서 만났을 법한 신비스럽고도 괴상한 존재들이 산다. 크툴루, 니알라토텝, 데이곤은 수많은 후배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들에 의해서 새롭게 재창조되었다.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거대한 외계인처럼 생긴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지만, 지금까지도 오컬트 마니아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창조물들에 열광하고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악마의 책’ 네크로노미콘이 가공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오컬트 마니아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라고 믿는다. 그만큼 러브크래프트와 관련된 오컬트 신드롬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례이다.

 

러브크패트프의 소설은 1900년대 초에서 1930년대까지 이르는 시기동안 탄생하였다.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은 훌쩍 지났다. 에드거 앨런 포와 함께 고전 공포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상당히 오래된 배경과 이야기 속 분위기는 독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집을 두세 권 정도 읽게 되면 소설의 뼈대를 이루는 이야기 전개와 플롯이 유사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상상의 도시, 어두컴컴한 지하 밀실 공간, 축축한 습기와 곰팡내가 가득한 흉물스런 저택 그리고 그곳에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악마나 괴물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기의 장소를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저주를 무시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공포에 떠는 불가사의한 경험을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또 어떤 작품에 나온 배경과 주인공 및 주변 인물들이 또 다른 소설에 카메오처럼 재등장하기도 한다. 여러 작품을 계속 읽어나갈수록 작가가 곳곳에 숨겨진 ‘러브크래프트 코드’를 찾을 수 있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본인이 만든 창조물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환상적인 분위기의 배경만 약간 언급할 뿐, 정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독자의 의문만 늘어놓게 한 모호한 결말은 훗날 후배 작가들에게 문학적 영감이 되었지만, 러브크래프트 세계에 이제 막 들어선 초보 독자 입장에서는 아쉽고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 밖에도 러브크래트트의 일부 작품에 포와 로드 던세이니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낡은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 처음 그의 소설이 나왔을 때만 해도 독자에게 강렬하면서 생생한 공포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러브크래프트 세계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작가의 후예들(스티븐 킹, 클라이브 바커, 브라이언 럼리 등)이 등장하면서 원조는 공포소설의 클리셰가 되고 말았다.

 

황금가지 출판사에 나온 러브크래프트 전집은 총 4권이다. 일반적으로 1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것은 당연한데, 이러한 독서가 러브크래프트 작픔의 매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전성기에 나온 걸작들이 1,2,3권에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1권은 데이곤, 크툴루 신화, 니알라토텝, 네크로노미콘 같은 대표적인 러브크래프트 코드가 나오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메인 요리라고 해도 전혀 반박할 수 없는, 훌륭한 에피타이저라고 보면 된다. 2, 3권은 SF가 결합한 코스믹 호러와 환상소설이 등장한 중후반기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4권은 어떤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4권의 부제는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소설 제목인 ‘아웃사이더’라고 붙였지만, 여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역자는 서문에 4권을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다양한 작품들로 구성되었다고 밝혔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 전집 중 4권은 앞 권에 비해 대체로 작품들이 평이하게 느껴진다는 반응이 많다. 

 

사실 4권에 수록된 작품 일부는 러브크래프트의 초기 작품들이다. 「동굴 속의 짐승」, 「연금술사」「무덤」「데이곤」「니알라토텝」(이상 1권에 수록) 이전에 나온 초기작이다. 러브크래프트 코드가 처음으로 언급되고 소개되는 작품도 있다.

 

비록 잠깐이지만,「인스머스의 그림자」(1권에 수록)의 배경인 인스머스가 최초로 언급되는 작품이「셀레파이스」다. 「이름 없는 도시」는 네크로노미콘의 저자로 알려진 아랍의 광인 알하즈레드가 처음으로 언급된 작품이며 그 이듬해 발표된「사냥개」에서 네크로노미콘이 처음으로 소개된다. 「또 다른 신들」에 지상의 신들이 살고 있다는 카다스(Kadath)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카다스는「미지의 카다스를 향한 몽환의 추억」(1권에 수록)과 연관된 미지의 공간이다.

 

전집의 목차가 발표 연도순이 아닌 장르별로 정한 것이라서 러브크래프트 세계의 단초가 되는 작품들은 4권에 수록되었다. 음지에 있던 러브크래프트 세계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 같은 작품이 전집의 제일 마지막 권에 있는 기이한 편집이 연출되고 말았다. 4권이 나오기를 3년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독자들이라면 이 사실이 허무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러브크래프트 문학의 단물만 잔뜩 읽고 있었다. 4권을 소홀히 읽었던 독자라면 저주받은(?) 4권을 다시 한 번 펼쳐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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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14-11-30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 쓰시는 분들 정말 부럽고 대단하세요!

cyrus 2014-12-01 12:4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비하면 이것도 줄여서 쓴거랍니다. 그래도 북플로 보기에는 이 글도 길어보이네요. ^^;;

2014-12-01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1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02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