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 작가의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한 편 한 편이 방송으로 전파되고 나면 화젯거리가 생긴다. ‘압구정 백야’ 한 편이 방송되고 나면 그 다음 날까지 드라마와 관련된 단어와 임성한 작가가 포털사이트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른다. 그녀의 드라마를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도 ‘압구정 백야’가 ‘막장 드라마’라는 사실을 다 안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 ‘막장’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이유는 일반 드라마에선 볼 수 없는 파격적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미신, 귀신과 같은 현대 과학과 동떨어진 자극적인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이미 2011년에 방영된 ‘신기생뎐’은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할머니 귀신과 빙의 장면 횟수가 많아졌고, ‘신귀생뎐’이라는 시청자들의 조롱이 섞인 우스운 별명도 나왔다. ‘오로라 공주’는 그간의 죽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물이 죽거나 하차했다.

 

‘압구정 백야’도 이전에 나온 작품들과 끔찍하게 닮았다. 등장인물들이 연달아 죽어나간다. 지난주 84회(2월 10일 방영)에 여주인공 백야(박하나 분)는 남편과 친오빠를 잃은 충격으로 자살 시도를 하기 위해 바닷물에 뛰어들어 외친 대사가 압권이다. “신이 있나요? 있다면 나랑 맞짱 한 번 뜨세요.” 작가는 영화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와 맞먹는 인상 깊은 명대사 하나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튼 신과 싸우자고 선전포고하는 여주인공의 대사 한 마디 덕분에 지난주도 대중의 이목을 드라마로 향하는 데 성공했다.

 

‘임성한 월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람의 삶과 죽음, 팔자가 모두 신의 소관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간혹 드라마 대사 속에 ‘신’이 언급될 정도이니 작가의 종교관이 무척 궁금하다. 작가의 가치관이 작품에 투영될 수 있다지만 대놓고 시청자들에게 주입하려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반면 소설가 로드 던세이니‘페가나 월드’에 사는 신들의 팔자는 시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던세이니는 기존의 신들이 나오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플롯을 파괴한다. 신들은 자신들을 숭배하지 않거나 모독하는 인간에게 벌을 내리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 올림포스의 제왕 제우스는 신의 영역을 넘는 자에게 벼락을 내리치고,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는 시간을 지배했다. 페가나에 사는 신들도 그리스 신화 속 신들처럼 인간의 인생 하나하나에 영향을 끼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던세이니는 평화로운 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인물 하나를 불러들인다. 1905년에 발표된 단편집 《페가나의 신들》(페가나북스, 2011)에 처음으로 등장한 최고의 신 마나-유드-수샤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던세이니의 두 번째 단편집이자《페가나의 신들》의 속편인 《시간과 신들》(Time and the Gods, 페가나북스, 2012)은 전작에 비해 신이 많이 나온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시간’이다. 페가나의 신들은 자신들이 시간과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연히 페가나의 신들이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요 인물이다. 하지만 신들의 자만심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야기 초반부에 시커먼 모습에, 양손에 피투성이고 붉은 검이 매달린 시간이 등장해서 신들에게 경고한다.

 

시간은 슬그머니 그 얼굴을 훔쳐보고는 핏방울 떨어지는 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신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신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멸망시킨 그가 언젠가 자기들마저 죽일지 모른다는 새로운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새로운 울부짖음이 황혼 속을 퍼져갔다. 신들은 꿈의 도시에서 바치는 만가(輓歌)를 불렀다. (로드 던세이니 《시간과 신들 1》 중에서, 11쪽)

 

《시간과 신들》에 나오는 시간의 모습은 흡사 크로노스와 유사하다. 한 손에 거대한 낫을 들고 다니는 모습으로 많이 알려졌다. 크로노스의 낫이 시간을 베어버리듯이 페가나 월드를 지배하는 시간은 역으로 신들의 운명과 그들이 사는 세계마저 검으로 파괴한다. 시간이 모든 것들을 ‘무’(無)로 만들어버린다면, ‘운명’과 ‘우연’이라는 두 기사가 신들의 세계를 움직인다. 《시간과 신들》 2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두 기사는 체스와 비슷한 게임을 한다. 체스판 위에는 게임의 말은 신이고, 먼지는 신들이 사는 세계가 된다. ‘운명’과 ‘우연’의 기사가 게임의 말을 옮기면 신들도 따라 움직인다. 먼지가 피어오르면 세계는 해가 뜨고 지면서 하루가 지나간다. 페가나의 신들은 이 먼지가 자신들이 흩뜨렸다고 말한다. 신들은 자신의 머리 위에 조종하는 거대한 불가항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장면이다.

 

《시간과 신들》의 이야기 구성 방식을 보면 먹는 것과 먹히는 대로 순서대로 연결한 먹이사슬 비슷한 구조가 눈에 띈다.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된 인간과 신들은 피식자-포식자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은 신의 영역을 거스르거나 함부로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의 위험한 호기심은 신들의 세계를 위협한다. 신들은 인간보다 월등하고 초인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의 호기심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신보다 더 센 놈들이 있었으니 바로 검을 들고 다니는 ‘시간’, 그리고 ‘운명’과 ‘우연’의 기사다. 제아무리 위대한 신이라도 세 명 앞에서 쩔쩔맨다. 페가나를 지배하는 주신 마나-유드-수샤이도 예외가 아니다. 신마저도 폐허로 종착 되는 운명의 순리를 피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가 된다. 《시간과 신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먹이사슬 과정을 피라미드 형태로 그린다면 제일 밑에 있는 것이 인간, 중간은 신, 제일 꼭대기에 ‘시간’, ‘운명’, ‘우연’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신도 ‘시간’, ‘운명’, ‘우연’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안 될 걸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이 위대한 것처럼 여기는 정신승리에 쉽게 도취한다. 1912년에 발표된 《The Book of Wonder》에 수록된 ‘추부와 셰미시’(Chu-Bu and Sheemish)라는 짤막한 소설은 추부와 셰미시라는 두 명의 신이 인간의 숭배를 받기 위해 서로를 조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이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우습다. 작은 지진이라도 일으키면 위대한 신이 내리는 기적 행세를 할 수 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둘 다 지진을 일으키지 못한다. 우연히 일어난 지진 덕분에 추부와 셰미시는 자신들의 체면을 가까스로 살리는 데 성공한다.

 

 

 

 

 

 

 

 

 

 

 

 

 

 

 

 

 

만약에 니체가 《시간과 신들》을 읽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니체는 신이 죽었음에도 인간은 수 세기 동안 신의 그림자가 떠도는 동굴 속에 살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보다 자신들이 만든 임의의 기준과 척도에 따라 존재를 파악하려고 한다. 정작 자신이 그 같은 인식상의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페가나의 신들은 시간의 무시무시한 힘을 알면서도 이를 뛰어넘는 영원불변의 존재로 남고 싶어 한다. 시간, 운명, 우연의 존재가 있다면 맞짱 한 번 뜰 기세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싸움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 막연한 두려움을 억누르기 위해서 신들은 불가항력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인간 앞에서 센 척한다. 그리고 페가나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페가나의 신들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스스로 날조해낸 것에 지나지 않은 천상의 세계를 꿈꾸는 인간의 모습과 꽤 닮았다. 니체는 던세이니의 판타지 소설을 읽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 봐, 신은 죽었다니까! 신이 살아있으면 나랑 맞짱 한 번 뜨자!”

 

 

 


※ 페가나북스에 번역한《시간과 신들》은 완역이 아니다. 원작은 총 2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두 권의 전자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2부는 ‘왕의 여행’이라는 외전 성격의 중편이 실려 있다. 페가나북스는 2부에 있는 중편을 제외하고 원작을 번역했는데, 2부의 중편을 페가나 세계관을 다룬 단편들만 모은 작품집에 따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 ‘추부와 셰미시’는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 19번째 책 《톨킨의 환상 서가》(황금가지, 2005)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설명하는 내용에 오류가 있다. 던세이니의 《The Book of Wonder》를 1921년에 나왔다고 소개했는데 숫자가 뒤바뀌었다. 정확한 발표연도는 1912년이다. 1918년에 《The Book of Wonder》라는 동명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는 《시간과 신들》과 1912년에 발표된 작품을 합본한 것이다. 유일하게 던세이니의 작품을 전자책으로 많이 만든 페가나북스 출판사는 던세이니의 작품 목록(시, 희곡, 에세이 등 제외)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The Book of Wonder》의 발표연도를 정확하게 소개했다. 페가나북스는 던세이니의 작품을 많이 출간하는 것을 목표하는 1인 전자책 출판사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페가나북스에서 만든 일부 전자책에 출판사명으로 ‘유페이퍼’라고 나온다. 하지만 공식 명칭은 페가나북스가 맞다. ‘유페이퍼’는 페가나북스 공식 홈페이지의 도메인 이름이다.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가 하지 않은 일, 그리고 돈 되지 않은 일을 하는 페가나북스의 노고가 장르문학 마니아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페가나북스에서 지금까지 전자책으로 펴낸 장르문학 작품은 공식 홈페이지에 확인할 수 있다.

 

 

페가나북스 공식 홈페이지 http://www.upaper.net/peg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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