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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신해철 - 신해철 유고집
신해철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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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옮겨보기 전에는 체험을 완성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였다. 르 클레지오가 글을 쓰는 행위는 살아있는 사람(작가)의 몸을 석고로 떠내는 표현방식과 비슷하다. 이런 글은 체험에 묻어있는 거짓과 허위의 껍질이 벗겨져 있고 진실 된 삶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의 생이 멈추었을 때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에 석고를 덧칠해 만드는 데스마스크(Death marsk)도 그렇다. 죽은 이의 얼굴을 보는 문화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겐 아무래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데스마스크는 딱히 특별한 용도는 없다. 죽은 사람의 무표정한 표정만 남아있을 뿐이다.

 

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이 시작되는 첫 장면을 기억하시는가. 소설가의 제자가 스승에게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전화로 물어보는 장면.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혹시 문장으로 뜬 데스마스크를 본 적이 있느냐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살아생전에 쓴 여러 가지 원고들을 모은 유고집이 작가의 데스마스크라고 생각한다. 유고집도 데스마스크처럼 작가가 죽은 뒤에 나온다. 또 유고집은 작가의 평소 모습을 오롯이 담겨 있다.

 

작년에 우리 곁을 갑자기 떠나버린 어느 뮤지션의 데스마스크가 나왔다. 신해철의 유고집, 제목은 《마왕 신해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해철은 이렇다. 음악과 사회에 대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다. 했다 하면 직격탄이다. 그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대마초 비범죄화를 주장했고, 급기야 간통죄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연예인들과 비교해 심하게 튀는 그의 이런 행보들은 많은 안티 세력을 생겨나게 하였다. 그를 마왕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까칠하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신해철 스타일은 성향에 따라 심하게 거슬려 보일 수 있다.

 

과연 신해철은 어떤 사람인가? 마왕을 추종하는, 소위 ‘고스 식구’가 아닌 독자는 그의 정체가 무척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무시무시한 공포물을 읽는 것이 두려운 마냥 유고집을 펼치기 망설여진다. 책 표지 사진을 뚫고 나오는 신해철의 카리스마가 오버랩되어 ‘까칠한’ 글만 있을 거로 생각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 이 유고집을 생전 신해철의 말투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신해철의 쾌변독설》(지승호, 부엔리브로, 2008)과 같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이 책의 카피처럼 신해철의 데스마스크는 세상을 씹어서 여러분에게 ‘퉤’ 뱉어내지 않는다. 그 대신, 신해철 자신이 세상을 불량스럽게 씹어대는 이유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사실 표현이 거칠 뿐이지 그렇다고 어리숙한 독자 앞에 감정의 배설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유고집을 읽는다고 해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 불면증, 정서불안, 과대망상, 인성변화, 귀차니즘, 대인기피, 왕따, 식욕감퇴, 발육부진, 성적하락, 가정불화, 업무능력 저하, 소득감소, 직장생활 부적응 같은 증상이 생기지 않으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신해철’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고 혐오하는 독자가 있다면 ‘마왕’이라는 가면을 쓴 신해철에 너무 익숙해져서 생긴 이상 신호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로 신해철의 글은 자신의 안티를 배려하지 않는다. 고스트스테이션 오프닝에 나오는 경고 문구 비슷한 것도 없다. 신해철에 대한 악감정을 지울 수 없거나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면 저자나 출판사에게 어떠한 책임도 묻지 마시라)

 

유고집의 제목이 아쉽다. 마왕 신해철이라니. 책의 제목은 그 책의 얼굴과 같다. 아무리 그가 카리스마의 대명사로 통한다고 해도 진짜 신해철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낸 신해철의 얼굴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건 아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마왕’이라는 수식어만 붙이면 고인의 삶이 새롭게 조명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것인가. 유고집은 ‘마왕’ 신해철이 아닌 ‘인간’ 신해철의 삶을 본뜬 데스마스크다. 제목만 보고 조건반사처럼 마왕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인간’ 신해철의 진짜 얼굴 그리고 그 얼굴 속에 새겨진 굴곡진 삶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차라리 책 제목을 이름 석 자만 놓고 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름만으로도 신해철이 어떤 존재인지 독자에게 보여주는 데 충분하다.

 

‘마왕’의 가면을 벗은 신해철의 모습은 자아가 매우 강한 편이다. 그러나 경거망동과 거리가 멀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듯하지만, 더 자세히 보면 그의 말과 글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인 뼈대가 세워져 있고, 직설적인 그의 카리스마가 입혀진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를 생각해서 신해철의 생각을 건전하게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당신이 만약 신해철 팬이라고 자처한다면 그 생각을 다시 한 번 고려해봐야 한다. 신해철의 눈에는 그런 당신을 본인의 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 비판을 하고 싶다면, 신해철의 팬임을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다. 신해철이 생각하는 팬이란 누군가를 남이 아닌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좋으면, 그냥 좋아하면 된다. 스타를 열렬히 좋아하는 이 맹목적 반응은 곧 가장 원초적인 팬심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이면서도 맹목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신해철은 팬을 가족의 일원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의 팬들은 새벽에도 잠 못 들고 ‘고스트스테이션’이 시작하는 시간대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었다. ‘고스트스테이션’은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넘어서서 신해철과 팬들이 함께 떠들고 놀 수 있는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오랜 시간 그와 교감하면서 나눈 그 지나간 시간이 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기에 지금도 그를 그리워한다.

 

신해철은 노래를 통해 팬들과 소통을 하고 싶었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팬들이 무척 고마워했을 사람이다. 그의 까칠한 성깔에 카타르시스를 느껴 그를 좋아하는 팬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왕이 되었다. 하지만 신해철 본인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면이었을 것이다. 신해철 팬이든 그의 팬이 아니든 관계없이 《마왕 신해철》을 읽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팬민정음」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신해철이 대중과 미디어가 만들어 낸 ‘마왕’의 가면을 쓰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왜곡된 이미지를 벗어내 ‘가수’에서 더 나아가 ‘인간’ 신해철로서 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마왕’ 신해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 신해철은 살아 있다. 데스마스크로 남은 유고집 속에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진짜 신해철이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신해철의 삶을 신해철이 직접 손으로 글로 옮긴 유고집은 대중이 만들어 낸 낡은 허물을 완전히 벗겨내어 완성된 신해철의 삶 자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필 그가 떠난 빈자리가 커다랗게 느껴지고, 그가 남긴 수많은 노래만으로도 깊은 슬픔을 달래지 못하는 지금에서야 우리는 진짜 ‘인간’ 신해철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진작 인간 신해철을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니 제발 양심이 있다면 유고집을 읽고 난 뒤에 ‘나, 이제부터 신해철 팬이다’ 하면서 법석을 부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신해철이라면 침 같은 독설 한 마디 뱉어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를 가족처럼 여기고 노래를 좋아했던 팬들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짧은 글 마지막 문장이 자꾸 팬들의 귓가에 메아리가 되어 맴돈다. “있을 때 잘하라고. 나는 여러분의 곁에 영원히 있지 못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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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5-01-23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한 상식의 의문, 그 상식이 과연 상식적인가에 대한 신해철의 독설, 솔직히 공감이 컸지요. 진중권 교수의 후기글을 보면서 마음이 찡했습니다. 신해철 동급의 독설가인 진중권 교수의 글은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보니 말이죠. 노무현 대통령 서거 기념 공연에서 삭발하던 그가 ˝그대에게˝를 부르기 전에 내뱉은 말이 가슴이 아리네요. 진짜 2달동안 술에 찌들린 그의 고통....

이젠 그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사실이 참 착찹하네요

cyrus 2015-01-23 19:4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만화애니비평님, 신해철의 진정한 팬이시군요. 사실 저는 신해철의 음악을 듣곤 했지만, 제 입으로 신해철 팬이라고 말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어요. 생전 신해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유고집을 읽고 나서야 그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되었어요. 진작 이 글이 생전에 나왔더라면 신해철을 좋아했었을 것입니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yamoo 2015-01-2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이 언제나 저보다 한 발 빠르군요. <군주론>포스트도 그렇고, <올재 클래식> 포스트도 그렇고 이 포스트도 그렇고...매번 한 발 늦어 글 올리기를 포기하게 됩니다..ㅎㅎ

cyrus 2015-01-23 19:49   좋아요 0 | URL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 글에 허점이 있을 겁니다. 수박 겉핥기 수준이에요. 이 허점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글을 올려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
 
안도현의 발견 -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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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발견』을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싶은 분이라면 꼭 이 책이 몇 쇄인지 먼저 확인하시길 당부한다. 내가 읽은 책은 작년 11월 5일에 나온 초판 2쇄다. 그런데 2쇄로 나온 책중에 글 제목을 잘못 인쇄되었거나 아예 제목 자체가 없는 글이 수록된 파본이 있을 수 있다.

 

 

 

 

 

 

130쪽은 순교한 천주교인 요한 유중철과 루갈다 이순이 남매 이야기를 소개한 ‘동정부부’라는 글이 시작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글의 제목이 ‘과일군’으로 인쇄되었다. 그렇다면 글 제목인 ‘동정부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152쪽에 ‘과일군’이 시작되는 페이지에 ‘동정부부’가 인쇄되었다. 글 제목이 서로 뒤바뀌었다.

 

 

 

 

 

 

잘못된 인쇄는 이것뿐만 아니다. 다음 글이 이어질수록 엉뚱한 글 제목이 나온다. 132쪽에 시작되는 글의 제목은 ‘토끼비리’이다. 그런데 150쪽에 나오는 글의 제목인 ‘시비’로 소개되어 있다. 다음 페이지인 133쪽을 보게 된다면 책을 만드는 과정에 편집이 제대로 되었는지 의심이 든다. ‘보리밝기’라는 글의 제목이 찍혀 있다. 

 

 

 

 

 

 

 

134쪽에 나오는 글의 제목은 ‘내성천’이다. 그런데 제목이 사라졌다. 이것 말고도 제목 없이 인쇄된 글이 있다. 책의 2장(‘기억의 발견’)에 수록된 글 제목 대부분 잘못 인쇄되었다. 바로 잡아야 할 페이지가 꽤 많다.

 

초판이라면 이런 실수를 용납할 수 있다. 그런데 2쇄에서 이런 인쇄 실수가 나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판사측이 초판의 인쇄 오류를 알지 못한 채 2쇄를 찍었다는 것이다. 알라딘에 등록된 『안도현의 발견』 서평들 하나하나 읽어보면 인쇄 오류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서평이 없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인쇄 오류를 발견했으면서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읽은 책이 수많은 2쇄 중에 하필 잘못 만들어진 소수의 파본일 수도 있다. 

 

한 글자가 잘못 인쇄된 책은 사소한 편집의 실수로 넘어갈 수 있다. 이것만 가지고 파본이라고 우기면서 새 책으로 바꿔달라고 강요하는 것도 우습다. 그런데 4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의 인쇄가 잘못되었으면 책을 산 독자 입장에서는 황당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물론 아량이 넓은 독자라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편집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인쇄 실수를 출판사가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좋은 책이라 할 수 없다. 특히 도서정가제 실행 이후로 출판사는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는 품질의 책을 만들어야 한다. 돈 주고 파본을 산 독자 입장에서는 불쾌하다. 파본을 바꾸고 싶지 않더라도 독자는 출판사에 책의 잘못된 점을 알려야 한다. 아니면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를 위해 서평으로 문제 사항을 언급해줘야 한다. 독자 서평은 유명 블로거가 쓴 것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이 잘 안 읽는다. 일부 출판사 관계자들은 독자 서평이 아무리 많은 책이라도 판매 부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름 모르는 독자는 당신의 평범한 서평을 한 번이라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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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1-07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지 않은 책이라 알 수 없지만,
안도현이라는 작가와, 한겨레출판이라는 출판사를 생각하면 의외네요.

cyrus 2015-01-07 11:11   좋아요 0 | URL
서점에 파는 책들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2쇄 오류를 이미 확인하고 다음 쇄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단발머리 2015-01-0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일이 크네요. 실수라고 하기에도요.
안도현님과 한겨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 상황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네요.
어쩌면 아예 모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cyrus 2015-01-07 11:12   좋아요 0 | URL
일단 서점에 파는 책의 상태를 확인하고 인쇄 오류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한겨레출판사 페이스북에 직접 이 사실을 알리려고 해요.

소민 2015-01-13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쇄를 구입하여 읽던 중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큰 오류라니요. 알리는 방법이 없을까요? 책 내용은 너무 좋은데 안타까워요.

cyrus 2015-01-13 19:07   좋아요 0 | URL
제가 교보문고에 파는 책을 확인해보니 벌써 3쇄가 나왔더군요. 출판사가 2쇄 파본을 미리 확인해서 바로 3쇄를 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소민 2015-01-15 2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신 덕에 알라딘 1대1 문의를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cyrus 님의 리뷰 오류와 같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즉각 3쇄본으로 바꿔줬습니다. 오류본 그냥 가지고 있어야 하나, 했는데 오늘 새책이 왔습니다. 감사드려요.^^

cyrus 2015-01-16 11:58   좋아요 0 | URL
잘 됐군요. 사실 이 정도 오류가 많으면 파본으로 봐야해요. 제가 새책을 받은듯한 기분이 듭니다. ^^

종이배 2015-01-27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 책도 그렇습니다.ㅜ
엊그제 출판사에 문의해 놓았는데 답이 없군요.
출판사가 아니라 알라딘에 문의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생기네요.
사실 이건 알라딘 잘못이 아니라 출판사 잘못일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이것은 `전량 리콜` 수준이어서 출판사 홈피 공지사항에 올려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출판사 측에서 먼저 내놓은 답이 없는 것 같아
한겨레출판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책은 정말 말할 수 없이 참 좋은데, 실수에 대응하는 출판사의 태도가 참 아쉽네요...

cyrus 2015-01-27 21:24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인쇄 오류 문제가 심각한데요. 출판사가 아무런 공식 사과문이나 해명도 없다니 실망스럽습니다. 출판사의 안이한 태도가 좋은 저자와 책의 명예까지도 떨어뜨리네요. 이런 출판사는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신뢰받을 수 없습니다. 종이배님도 파본을 새책으로 교환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알라딘에 문의해보셨으면 합니다.

종이배 2015-01-30 21:0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글을 올리고 난 뒤, 고민하다가 출판사에 항의성 메일을 드렸더랬습니다.
그 뒤에 곧바로 출판사에서 새로 찍은 도서를 보내주고
파본 도서의 폐기 또는 반품에 관한 사과문과 안내를 받았답니다.
뒤늦게라도 출판사에서 제대로 처리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 다행스러웠습니다.
평소에 신뢰하지 않았던 출판사였다면 그냥 그러려니 했겠지만,
신뢰하고 싶은 출판사였기에 이런 지적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내 것만 잘못 되었나,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cyrus님이 올려주신 글 덕분에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자전거여행 1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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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수단이었던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 헤매다 자전거를 훔친 안토니오. 도둑으로 몰려 모욕을 받지만, 다행히 경찰서행은 면한다. 아들과 함께 해 지는 로마 거리를 허탈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 이탈리아의 감독 비토리아 데 시카의 영화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피폐한 로마 거리를 통해 가난과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다. 이렇듯 자전거는 멀고 험난한 인생길을 가는 데 꼭 필요한 동력(動力)이자 동반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되어 왔다. 자전거는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인다. 연료가 필요치 않으니 경제적이고 환경파괴가 없으니 도덕적이다. 자전거만큼 기계와 사람이 하나 되는 물건도 없다. 자전거를 균형 잡는 것은 몸으로 자연스레 체득된다.

 

누구나 어린 시절 자전거로 인생의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기어 다니다 걸을 만하면 제일 먼저 타는 것이 세발자전거다. 그걸로 열심히 발힘과 균형감각을 길러 두발자전거를 탈 때쯤 초등학교에 간다. 이후 자립의 길로 접어들 때 자전거가 인생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배우는 동요도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이다. 그러나 자동차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서 자전거는 뒤로 밀려난다. 그러다 언제부터 자전거를 오랜 추억들로 가득 찬 창고 같은 가슴 속에 다시 꺼낼 때가 온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자전거를 저어서 나아갈 때 풍경은 흘러와 마음에 스민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2권에 나오는 첫 구절) 대체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미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나이 스물 넘어 다 큰 어른이 된 나는, 두발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키가 미치지 못해 한쪽 다리를 꺾어 빗장처럼 지르고 쉴 새 없이 두 다리로 페달을 밟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는 안장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핸들을 움켜쥔다.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싶다. 결국 자전거에 대한 나의 기억은 바퀴 하나 떼어내지 못한 채 세발자전거에서 슬프게 끝이 나고 말았다.

 

밟는 대로 나갈 수 있는 자전거. 그것은 이동에 제한이 덜하고, 속도제한이 없으며, 무면허 운전을 해도 잡아가지 않는다. 농이 반은 섞인 얘기지만 자전거가 얼마나 자유로운 탈것인지를 잘 나타내는 얘기인 것 같다.

 

날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은 타성에 젖어 생생한 활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상은 감흥을 주지 못하고,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묻지 못한 채, 존재와 세계를 그저 지나쳐 간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런 되풀이 속에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상 속의 나만이 아니라, 일상 밖’ 감추어져 있는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있는 나를 찾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산악자전거 ‘풍륜’(風輪)과 자유롭게 동행하는 김훈의 여행이 부럽다. 그 여행은 자동차의 엔진에 몸을 편안하게 의탁하고 눈의 즐거움만 느끼는 우리네 여행과 크게 나뉜다. 풍륜은 도심 한복판을 달리지 않고 인간들의 냄새가 나는 골목을 찾아들지 않는다. 봄 들판이나 눈 덮인 겨울 산맥을 망망한 우주의 일엽편주처럼 넘어간다. 그럴 때 작가의 몸은 아무런 억압도 방어기제도 없는 순결한 몸이 된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프롤로그’ 중에서, 12쪽)

 

여행에서 작가의 몸과 풍륜은 거의 윤아일체(輪我一體)를 구축한다. 나아감과 멈춤을 반복한 끝에 몸과 길이 엔진을 매개하지 않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났다. 그리하여 풍륜에 들러붙은 몸의 지체는 산천의 풍경을 절실하게 만끽하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김훈이 자전거를 예찬하는 핵심은 그 동력원이 바로 자신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초가 불에 타들어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자전거도 자기 몸을 연소시켜야만 나아갈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 발로 걷는 것만큼이나 진솔하다.

 

말이나 여타 짐승을 타는 행위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생각해보면 그런 간단한 기계장치로 아무런 추가 동력원 없이 하루에 최소 100km 이상 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 대가는 자동차의 속도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전거 여행의 장점은 바로 그 저속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풍경들이다. 그는 그런 길을 자신의 몸을 ‘갈아서’ 나아간다고 썼다. 자전거는 ‘빨리빨리’를 외쳐대며 삶의 속도를 올리는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 탈 것이다. 몸의 연장(延長)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연필을 쥔 손을 움직여야만 원고지는 채워지는 것처럼 부지런히 페달을 굴려야만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러 지역을 지나간 김훈은 이 땅에 내장된 역사와 사람살이의 흔적들을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사유했다. 남해안의 경작지에서 농부와 함께 들었던 이 흙의 노래가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눈부시게 묘사한 문장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막 방금 땅 위로 돋아난 새싹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이때 얼음은 겨울처럼 꽝꽝 얼어붙지 않고, 가볍게 언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서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 서리이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다. (23쪽)

 

 

 

경북 영주시 부석사로 가는 길에서 작가는 고단한 풍경을 마주한다. 일상의 뒤안길에 감춰진 삶의 단면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다. 그는 자전거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시각으로 이웃의 숨결을 기억한다. 고추 값이 정말 싸 품삯 댈 길 없어 고추를 거두지 못하던 차에 서리가 내렸다. “더 말라비틀어지면 걷어내서 군불이나 때야겠다”는 농부가 진 지게 짐은 농부 키보다 높다. 작가는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에게 기운 내라고 말하는 것이 도덕인지 부도덕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한다.

 

길 위의 만남은 가볍다. 작가가 본 농부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풍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아무리 따듯한 말을 공유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길 위의 만남은 밀도가 높다. 길 위의 사람들은 외롭고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이이기 때문에 마음을 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영원한 본질인 아날로그에 가깝다. 사소한 만남은 특별한 만남으로 기록되는 문장이 되어 책을 통해 새롭고도 특별한 풍경이 된다.

 

작가는 자전거로 떠나는 여행을 ‘세상을 관찰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자전거로 전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눈에 담는 것도 좋지만 사람 사는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되며, 인간의 삶을 제대로 관찰할 때 완전한 여행이 된다는 의미다.

 

나날의 삶에 지칠 때, 살아 있음의 기쁨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기꺼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펼쳐 든다. 나는 풍륜만 보면 그 곳으로 가고 싶다. 꽃피는 해안선이 있는 여수 돌산도 향일암을 거쳐 '지옥 속의 낙원' 소쇄원 식영정을 지나 광주 망월동을 찾는다. 그리고 이름 없는 오지와 분교들도. 풍륜이 지나간 흔적은 땅의 풍경에 그 자체로 인간의 흔적이 된다. 그리그 그 흔적은 원고지 위의 문장이 된다. 이처럼 오늘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기록을 읽는 시간은 복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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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Scene #1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를 읽고 어안이 벙벙한 적이 있다. 지독한 독서가로 유명한 그의 행적이 상상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500여 권의 참고서적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약과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개인 장서를 정리하려고 지하 1층, 지상 3층의 자그마한 서고 빌딩까지 지었으니 말이다. 이 빌딩으로도 모자라 그 부근에 새 저장소를 마련했단다. 좋게 말하면 책에 쏟는 엄청난 열정이 존경스럽고, 나쁘게 말하자면 거의 광적인 수준이다.

 

한국에도 다치바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적지 않으리라. 조선시대의 학자 이덕무 선생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불렀다. ‘책만 읽는 바보’란 뜻이다. 그만큼 그는 독서를 즐겼고 많은 책을 모았다.

 

이들에게 책은 ‘사랑’의 대상이다. 애인 다루듯 소중하게 읽고 간직해야 한다. ‘책을 사랑한다’는 것은 책의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애서가’(愛書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애서가에게는 얼마만큼의 책이 필요할까? 금속활자 이전에는 3천 권 정도 소유하면 책 부자였다. 현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는 2천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면 모범장서가로 선정한다. 나에겐 두 경우 모두 해당 사항이 없지만 나만의 보물 같은 서가를 바라볼 때면 마음만큼은 ‘부자’가 된다.

 

이덕무 선생은 ‘간서치’라면 나는 ‘책성애자’(冊聖愛子)다. 성애자(性愛子). 원래 정신의학 용어로 풀이하면 어떤 특정 대상에게 사랑을 느끼는 성적 지향 혹은 취향을 의미한다. 요즘 기존의 의미에서 확장되어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는 것을 가리키는 유행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가수 존 박은 평양냉면을 무척 좋아해서 ‘냉면 성애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책성애자’의 ‘성애자’는 단순히 책에 어떤 기이한 성적 취향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책성애자’(冊性愛子)라는 단어에 야한 사진이 가득한 성인 잡지나 야설을 보면서 성적 희열을 느끼는 취향의 느낌이 난다. 그래서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의 의미로 ‘성 성’(性) 자 대신에 ‘성인 성’(聖) 자로 쓴다.

 

헌책방이나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구입하면 책 속 내용보다 초판 혹은 절판본인지 먼저 본다. 두 가지 조건 모두 충족한 책이라면 더 좋다. 절판본 중에 의외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내용으로 구성된 것도 있다. 나처럼 책 좋아하는 애서가 중에서도 절판본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내용의 책이라도 거들떠보지 않는 취향을 고집하는 경우가 꽤 있다. 절판본 중에 희소가치가 높은 책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절판본은 책의 정가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나오기 힘든 절판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많지 않은 1%의 귀한 보물을 혼자 가진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부심은 애서가가 느끼는 착각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또 다른 애서가도 나와 같은 절판본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함정에 잘도 빠지면서 절판본을 소중히 여기는 애서가를 보면 범인(凡人)의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책 한 권을 사는 것을 책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이지 않은 책에 대한 집착으로 비춰진다.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애서가는 책을 소유하고 싶은 욕심도 많지만, 책을 팔 땐 무척이나 신중하게 생각한다. 나는 직접 구입한 책을 팔게 되면 쓸데없이 고민을 하는 성격이다. 책을 팔고 나면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평소에 손길을 주지 않은 책인데도 말이다. 이런 허전함을 잊기 위해서 책을 팔아 생긴 돈으로 또 다른 책 몇 권을 구입한다. 책상 위에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이처럼 애서가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Scene #2  제대로 책을 읽을 줄 알고, 보관할 줄 아는 장서가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가의 괴로움』을 읽으려는 독자들 중에 자신이 장서가, 애서가라고 생각한다면 먼저 마음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책을 많이 사는 당신의 습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되는 상황이 찾아올 것이다.

 

‘책성애자’(冊性愛子)인 나에겐 이 책의 제목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상대방의 지적인 속살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장서 3만 권을 가진 저자의 괴로움이 무척 즐거워보였고 이상하게도 지적인 쾌감이 느껴졌다. 저자가 섭렵해 온 책의 목록을 구경하고, 아끼는 책을 손에 쥐게 된 경로를 추적하는 애서가 이야기에 흥미로운 지적 풍경이 연상되었다.

 

그런데 그의 괴로움은 읽을 책이 많은 장서가의 행복한 엄살이 아니다. 어느새 점점 쌓여가는 책 때문에 집 안은 발 디딜 틈 없다. 함께 사는 가족의 원성은 하늘을 찌른다. 그토록 책을 좋아하던 애서가가 자신의 보물들 때문에 집이 무너질 걱정을 한다. 일본은 목조 건물이 많다. 오래 지은 목조 건물일수록 지진에 의한 진동에 쉽게 무너진다. 목조 건물은 많은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지 못한다. 만 권 이상 되는 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다. 책이 가득 쌓여 있는 방 어디선가 ‘삐걱’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애초부터 저자는 위험에 노출된 상태에서 저자는 책을 사 모으면서 지내왔다. 하지만 이 정도 장서의 괴로움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3·11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책을 소실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기도 했다.

 

결국 오카자키 다케시는 장서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3만 권 이상의 책으로 가득한 서재를 과감히 비우는 건전하고 현명한 장서 관리를 시도한다. 일단 그는 먼저 헌책방에 책을 판다. 오카자키가 생각하는 적당한 장서량은 500권이다. 500권 이상 책을 소유하고 있다면 초과된 책을 버리고, 더 이상 책을 구입해선 안 된다.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면, 그 책이 또 다른 독자의 손으로 넘어가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책의 가치가 높아진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서가의 의미심장한 충고. 자신에게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손에서 놓을 줄 알아야 한다. 시대가 변해서 오래되고 낡은 정보가 있는 책이라면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현재 관심 없는 분야의 책도 다시 읽을 일이 없다면 팔아야 한다. 책은 구입하자마자 바로 읽으면 좋지만, 대부분 애서가들은 구입한 책을 읽지 않고 바로 책장에 꽂는 악습관이 있다. 이렇게 읽을 기회를 미루다보면 책장이 아닌 박스에 보관하기에 이른다. 이러면 책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바로 읽지 못하더라도 항상 눈에 띌 수 있도록 책등이 보여야 한다. 정말로 읽을 이유가 없다면 불필요한 책을 과감하게 처분하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헌책방에 팔게 되는 책을 분류하는 과정에 정말 팔아선 안 되는 책 몇 권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그 책들은 여러 번 읽었을 것이고, 다음에도 또 읽을 수 있는,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책일 것이다. 건전한 장서가가 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독서법도 지녀야 한다. 오카자키는 진정한 독서가라면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책을 많이 사고 모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책을 읽을 줄 알고, 보관할 줄 아는 장서가가 되어야 한다.

 

 


 Scene #3  나를 아프게 만든 『장서의 괴로움』

 

이 책에는 오카자키 개인뿐만 아니라 일본 장서가들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일본은 애서가가 살기에는 적합한 나라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동안 일본의 장서가라면 가장 먼저 다치바나 다카시가 먼저 떠올렸는데 나는 그동안 일본의 책 사랑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에게 최상의 책을 판매하고 매입하는 일본 헌책방들의 유통 과정은 애서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장서가라면 오카자키와 같은 장서의 괴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나에게 이 책은 세 가지 아픔을 가져다줬다. 첫째, 고생해서 모아놓은 책들이 자연 재해로 인해 한 번에 소실되는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일본 장서가들의 사연은 같은 장서가로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둘째, 과연 나는 살면서 500권 정도의 책을 모을 정도로 소유욕을 줄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모은 책을 과감하게 팔 수 있을까? 책을 처분해야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셋째, 헌책방을 애용하는 일본 장서가들의 모습에 배가 아팠다.

 

오카자키 다케시는 각자의 자리에서 책을 모으려고 부단히 노력중인 세상의 모든 애서가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진정한 애서가라면 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당신이 마음을 비우고 장고 끝에 눈물을 머금고 ‘애장’ 이라는 미명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이렇게 책의 소유에 대한 집착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면 자연히 책의 대여 또는 전자책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궁극의 질문. “죽고 나서 자신의 서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책의 우주』 마지막 장을 나오는 이 질문은 아직 갈 길이 먼 어설픈 애서가로서는 요원한 질문이다. 책을 처분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기증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기증 문제를 두고 에코는 우리 애서가들의 정곡을 찌른다.

 

“내 컬렉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물론 그것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아요. 우리 가족이 그걸 어떤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든지, 혹은 어떤 경매를 통해 팔 수 있겠죠. 이 경우, 예를 들면 어떤 대학교 같은 곳으로 가서 컬렉션 전체가 통째로 가야 합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에요.”

 

 

 

 

 

컬렉션이 담보된 기증이 꼬리를 문다면, ‘바벨의 도서관’은 영영 문을 열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바벨의 도서관’을 만드는 것마저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단 책 사는 습관을 고치고, 오카자키처럼 건전한 독서법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놈의 책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던데『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나서도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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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8-2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이 책 사 보겠다고 책 권 수 늘려야 한다면
이책 사야하는 거니, 말아야 하는 거니?
그런데 제목만으로도 너무 공감이 가서 사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겨.ㅠ

cyrus 2014-08-28 16:30   좋아요 0 | URL
이제 책 사는 습관을 고치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고치지 못할 것 같아요.. ㅠㅠ 장서가라면 이러한 괴로움 평생 안고 가야할 듯 해요.. ㅎㅎㅎ 그래도 책 내용은 무척 재미있어요.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은 이상이다. 동시에 희망이며 미래이다. 그것에 동의반복이거나 비슷한 말은 바로, ‘청춘’이다. 20대 청춘은 빛나는 시절이라지만 사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는 안개의 시기다.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언어가 청춘을 감싸지만 정작 그 가능성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고민과 방황은 젊은 날의 특권이자 족쇄다. 청춘들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되묻는다. 녹록치 않은 세상과 부딪치고 깨지면서 열정은 사그라지고 어느 날엔가 현실과 타협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청춘이나 젊음은 이유 없는-기성세대들의 몰이해에서 나온 단순한 평가가 대부분인-반항이거나, 방황하고 불안전하며, 치유 극복 불가능한 쾌락의 모습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의 나이에서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모습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더군다나 스스로의 날개를 달지도 못하고, 또는 방향성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해 어떤 근거로 방황이나 반항이나 불안정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쳤으며, 또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쳐 우리가 된다는 것.

 

“청춘은 아름답다”는 식의 청춘예찬은 결코 식상해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낯두껍을 하고 있어도 청춘은 한없이 투명에 가깝다. 누가 청춘을 비하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다. 청춘은 그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머리끝까지 피를 역류시키게 만든다, 식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경구로 장식된 ‘청춘’의 이름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시기의 청춘을 특정한 말로 규정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X세대, N세대, W세대, 등등 청춘은 시시각각 다른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각종 문구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바뀌는 청춘의 빛깔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거나 정의하는 것과 별개로 정체성은 청춘의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두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되묻는 과정은 통과의례이며 위태로운 외줄타기 또한 타당한 수순이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151쪽)

 

나는 정답 비슷한 것도 본적이 없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부끄럽지만 먼 앞날이나, 뭔가 대단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첫 학기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당시 나는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논술형 필기시험에 자신이 있던 나였기에 첫 시험의 결과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 채점 결과 반영이 궁금해서 정중하게 질문했다. 확인한 결과, 나의 답안지가 논리성이 떨어지고, 독창적인 나만의 생각이 아닌 전공 책에 있는 내용 위주로 써서 감점 처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답은 맞으나 그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틀린 것이었다. 그 때에야 처음 알았다. 정답만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나의 장학금과 바꾸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기억에 더 뚜렷한 경우가 의외로 꽤 많다. 얼굴과 이름은 희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숨 막히게 애틋했던 순간들의 기억들과 수고들은 여전히 뚜렷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쏟아 부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삶의 거의 모두일 수 있다.

 

추억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청춘에 관한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우는” 바로 그 청춘이 회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이상은도 노래하지 않았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아마도 청춘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자신이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시간의 침식 작용 앞에서 망연자실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허기를 느낄 때, 우리는 그 때를 어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청춘의 꿈과 희망은 다 사라지고 그 어느 것에도 우리의 열정을 퍼부을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믿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고 믿으며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열병에 몸살을 앓으면서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김연수가 모은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에 관한 예찬인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 섞인 푸념인지 모호하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빛나는 청춘의 잔유물을 맹렬하게 기억하고 채워 넣는 김연수의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푸르고 싱싱한 순간’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젊음의 한때는 대부분 고통스럽다.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니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어서 늘 괴롭다. 아, 한심한 내 청춘. 세상은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욕망은 웃자라서 갈 곳 몰라 서성인다.

 

그러나 김연수가 풀어낸 청춘의 다채로운 모습은 우리의 과거진행형이며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다. 청춘 특유의 설렘이 잊히는 순간은 가장 고통스럽다. 『청춘의 문장들』은 그 설렘을 일깨워준다. 그 젊음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이 시가에 쳐놓은 바리케이드 안쪽에는 여러 낙서가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도 있었던 모양이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살아가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의 세월은 행복하다. 청나라 사람 장호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癖, 68쪽)

 

이때 ‘벽(癖)’이란 병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빠져 사는 것, 소위 ‘열흘 동안의 행복’을 구가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과 희생도 감수하는 것. 알고 보면 세상은 다 살게 되어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죽으란 법은 없다. 부와 명예도, 지복과 희망도 모두 한순간이지만 ‘벽’이 남아 그래도 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안다. 비바람이 있기에 나무는 땅을 향해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는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뻗는다는 사실을. 힘든 방황일수록 그 끝에 깊은 통찰과 지혜가 따라온다는 진리를. 방황은 방황으로 끝이 아니라 성숙한 나 자신과의 만남으로 가는 과정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낯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청춘의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내 꿈을 꾸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청춘은 여러 빛깔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유한 채 여러 굴레를 넘나든다.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 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춘의 시기에도 꿈, 이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팍팍한 일상의 굴레가 수시로 젊음을 몰아세우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선택한 꿈의 색깔 앞에 꼬꾸라질 이유는 없어야 할 터이니. 이럴 때 공자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르지 말자.” (樂而不淫 哀而不傷,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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