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1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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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수단이었던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 헤매다 자전거를 훔친 안토니오. 도둑으로 몰려 모욕을 받지만, 다행히 경찰서행은 면한다. 아들과 함께 해 지는 로마 거리를 허탈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 이탈리아의 감독 비토리아 데 시카의 영화 ‘자전거 도둑’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피폐한 로마 거리를 통해 가난과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다. 이렇듯 자전거는 멀고 험난한 인생길을 가는 데 꼭 필요한 동력(動力)이자 동반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되어 왔다. 자전거는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인다. 연료가 필요치 않으니 경제적이고 환경파괴가 없으니 도덕적이다. 자전거만큼 기계와 사람이 하나 되는 물건도 없다. 자전거를 균형 잡는 것은 몸으로 자연스레 체득된다.

 

누구나 어린 시절 자전거로 인생의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기어 다니다 걸을 만하면 제일 먼저 타는 것이 세발자전거다. 그걸로 열심히 발힘과 균형감각을 길러 두발자전거를 탈 때쯤 초등학교에 간다. 이후 자립의 길로 접어들 때 자전거가 인생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배우는 동요도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이다. 그러나 자동차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면서 자전거는 뒤로 밀려난다. 그러다 언제부터 자전거를 오랜 추억들로 가득 찬 창고 같은 가슴 속에 다시 꺼낼 때가 온다. 

 

그렇지만 자전거를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자전거를 저어서 나아갈 때 풍경은 흘러와 마음에 스민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2권에 나오는 첫 구절) 대체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미는 것은 어떤 일일까? 나이 스물 넘어 다 큰 어른이 된 나는, 두발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어릴 적 자전거를 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키가 미치지 못해 한쪽 다리를 꺾어 빗장처럼 지르고 쉴 새 없이 두 다리로 페달을 밟았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는 안장을 감싸고 한 손으로는 핸들을 움켜쥔다.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싶다. 결국 자전거에 대한 나의 기억은 바퀴 하나 떼어내지 못한 채 세발자전거에서 슬프게 끝이 나고 말았다.

 

밟는 대로 나갈 수 있는 자전거. 그것은 이동에 제한이 덜하고, 속도제한이 없으며, 무면허 운전을 해도 잡아가지 않는다. 농이 반은 섞인 얘기지만 자전거가 얼마나 자유로운 탈것인지를 잘 나타내는 얘기인 것 같다.

 

날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은 타성에 젖어 생생한 활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상은 감흥을 주지 못하고,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묻지 못한 채, 존재와 세계를 그저 지나쳐 간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런 되풀이 속에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상 속의 나만이 아니라, 일상 밖’ 감추어져 있는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있는 나를 찾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산악자전거 ‘풍륜’(風輪)과 자유롭게 동행하는 김훈의 여행이 부럽다. 그 여행은 자동차의 엔진에 몸을 편안하게 의탁하고 눈의 즐거움만 느끼는 우리네 여행과 크게 나뉜다. 풍륜은 도심 한복판을 달리지 않고 인간들의 냄새가 나는 골목을 찾아들지 않는다. 봄 들판이나 눈 덮인 겨울 산맥을 망망한 우주의 일엽편주처럼 넘어간다. 그럴 때 작가의 몸은 아무런 억압도 방어기제도 없는 순결한 몸이 된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프롤로그’ 중에서, 12쪽)

 

여행에서 작가의 몸과 풍륜은 거의 윤아일체(輪我一體)를 구축한다. 나아감과 멈춤을 반복한 끝에 몸과 길이 엔진을 매개하지 않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만났다. 그리하여 풍륜에 들러붙은 몸의 지체는 산천의 풍경을 절실하게 만끽하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김훈이 자전거를 예찬하는 핵심은 그 동력원이 바로 자신의 몸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초가 불에 타들어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자전거도 자기 몸을 연소시켜야만 나아갈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 발로 걷는 것만큼이나 진솔하다.

 

말이나 여타 짐승을 타는 행위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생각해보면 그런 간단한 기계장치로 아무런 추가 동력원 없이 하루에 최소 100km 이상 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그 대가는 자동차의 속도를 포기하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전거 여행의 장점은 바로 그 저속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풍경들이다. 그는 그런 길을 자신의 몸을 ‘갈아서’ 나아간다고 썼다. 자전거는 ‘빨리빨리’를 외쳐대며 삶의 속도를 올리는 세상에서 그가 유일하게 감당할 수 있는 탈 것이다. 몸의 연장(延長)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연필을 쥔 손을 움직여야만 원고지는 채워지는 것처럼 부지런히 페달을 굴려야만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여러 지역을 지나간 김훈은 이 땅에 내장된 역사와 사람살이의 흔적들을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사유했다. 남해안의 경작지에서 농부와 함께 들었던 이 흙의 노래가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눈부시게 묘사한 문장은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막 방금 땅 위로 돋아난 새싹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땅 위의 눈을 녹인 초봄의 햇살은 흙 표면의 얼음을 겨우 녹이고 흙 속으로 스민다. 흙 속에서는, 얼음이 녹은 자리마다 개미집 같은 작은 구멍들이 열리고, 이 구멍마다 물기가 흐른다.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서 이 물기는 다시 언다. 이때 얼음은 겨울처럼 꽝꽝 얼어붙지 않고, 가볍게 언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햇살이 내리쬐어서 구멍마다 얼음은 녹는다. 물기는 얼고 녹기를 거듭하면서 흙 속의 작은 구멍들을 조금씩 넓혀간다. 넓어진 구멍들을 통해 햇볕은 조금 더 깊이 흙 속으로 스민다. 그렇게 해서,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해가 뜨기 전, 봄날의 새벽에 밭에 나가보면, 땅속에서 언 물기가 반짝이는 서리가 되어 새싹처럼 땅 위로 돋아나 있다. 이것이 봄 서리이다. 흙은 초겨울 서리에 굳어지고 봄 서리에 풀린다. 봄 서리는 초봄의 땅 위로 돋아나는 물의 싹이다. (23쪽)

 

 

 

경북 영주시 부석사로 가는 길에서 작가는 고단한 풍경을 마주한다. 일상의 뒤안길에 감춰진 삶의 단면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다. 그는 자전거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시각으로 이웃의 숨결을 기억한다. 고추 값이 정말 싸 품삯 댈 길 없어 고추를 거두지 못하던 차에 서리가 내렸다. “더 말라비틀어지면 걷어내서 군불이나 때야겠다”는 농부가 진 지게 짐은 농부 키보다 높다. 작가는 “지쳐서 쓰러지는 사람에게 기운 내라고 말하는 것이 도덕인지 부도덕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한다.

 

길 위의 만남은 가볍다. 작가가 본 농부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풍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아무리 따듯한 말을 공유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인연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길 위의 만남은 밀도가 높다. 길 위의 사람들은 외롭고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이이기 때문에 마음을 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삶의 영원한 본질인 아날로그에 가깝다. 사소한 만남은 특별한 만남으로 기록되는 문장이 되어 책을 통해 새롭고도 특별한 풍경이 된다.

 

작가는 자전거로 떠나는 여행을 ‘세상을 관찰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자전거로 전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눈에 담는 것도 좋지만 사람 사는 모습을 놓쳐서는 안 되며, 인간의 삶을 제대로 관찰할 때 완전한 여행이 된다는 의미다.

 

나날의 삶에 지칠 때, 살아 있음의 기쁨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기꺼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펼쳐 든다. 나는 풍륜만 보면 그 곳으로 가고 싶다. 꽃피는 해안선이 있는 여수 돌산도 향일암을 거쳐 '지옥 속의 낙원' 소쇄원 식영정을 지나 광주 망월동을 찾는다. 그리고 이름 없는 오지와 분교들도. 풍륜이 지나간 흔적은 땅의 풍경에 그 자체로 인간의 흔적이 된다. 그리그 그 흔적은 원고지 위의 문장이 된다. 이처럼 오늘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기록을 읽는 시간은 복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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