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꿈은 이상이다. 동시에 희망이며 미래이다. 그것에 동의반복이거나 비슷한 말은 바로, ‘청춘’이다. 20대 청춘은 빛나는 시절이라지만 사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는 안개의 시기다.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언어가 청춘을 감싸지만 정작 그 가능성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고민과 방황은 젊은 날의 특권이자 족쇄다. 청춘들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되묻는다. 녹록치 않은 세상과 부딪치고 깨지면서 열정은 사그라지고 어느 날엔가 현실과 타협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청춘이나 젊음은 이유 없는-기성세대들의 몰이해에서 나온 단순한 평가가 대부분인-반항이거나, 방황하고 불안전하며, 치유 극복 불가능한 쾌락의 모습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의 나이에서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모습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더군다나 스스로의 날개를 달지도 못하고, 또는 방향성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해 어떤 근거로 방황이나 반항이나 불안정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쳤으며, 또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쳐 우리가 된다는 것.

 

“청춘은 아름답다”는 식의 청춘예찬은 결코 식상해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낯두껍을 하고 있어도 청춘은 한없이 투명에 가깝다. 누가 청춘을 비하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다. 청춘은 그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머리끝까지 피를 역류시키게 만든다, 식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경구로 장식된 ‘청춘’의 이름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시기의 청춘을 특정한 말로 규정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X세대, N세대, W세대, 등등 청춘은 시시각각 다른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각종 문구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바뀌는 청춘의 빛깔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거나 정의하는 것과 별개로 정체성은 청춘의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두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되묻는 과정은 통과의례이며 위태로운 외줄타기 또한 타당한 수순이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151쪽)

 

나는 정답 비슷한 것도 본적이 없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부끄럽지만 먼 앞날이나, 뭔가 대단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첫 학기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당시 나는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논술형 필기시험에 자신이 있던 나였기에 첫 시험의 결과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 채점 결과 반영이 궁금해서 정중하게 질문했다. 확인한 결과, 나의 답안지가 논리성이 떨어지고, 독창적인 나만의 생각이 아닌 전공 책에 있는 내용 위주로 써서 감점 처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답은 맞으나 그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틀린 것이었다. 그 때에야 처음 알았다. 정답만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나의 장학금과 바꾸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기억에 더 뚜렷한 경우가 의외로 꽤 많다. 얼굴과 이름은 희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숨 막히게 애틋했던 순간들의 기억들과 수고들은 여전히 뚜렷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쏟아 부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삶의 거의 모두일 수 있다.

 

추억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청춘에 관한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우는” 바로 그 청춘이 회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이상은도 노래하지 않았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아마도 청춘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자신이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시간의 침식 작용 앞에서 망연자실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허기를 느낄 때, 우리는 그 때를 어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청춘의 꿈과 희망은 다 사라지고 그 어느 것에도 우리의 열정을 퍼부을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믿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고 믿으며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열병에 몸살을 앓으면서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김연수가 모은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에 관한 예찬인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 섞인 푸념인지 모호하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빛나는 청춘의 잔유물을 맹렬하게 기억하고 채워 넣는 김연수의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푸르고 싱싱한 순간’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젊음의 한때는 대부분 고통스럽다.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니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어서 늘 괴롭다. 아, 한심한 내 청춘. 세상은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욕망은 웃자라서 갈 곳 몰라 서성인다.

 

그러나 김연수가 풀어낸 청춘의 다채로운 모습은 우리의 과거진행형이며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다. 청춘 특유의 설렘이 잊히는 순간은 가장 고통스럽다. 『청춘의 문장들』은 그 설렘을 일깨워준다. 그 젊음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이 시가에 쳐놓은 바리케이드 안쪽에는 여러 낙서가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도 있었던 모양이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살아가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의 세월은 행복하다. 청나라 사람 장호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癖, 68쪽)

 

이때 ‘벽(癖)’이란 병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빠져 사는 것, 소위 ‘열흘 동안의 행복’을 구가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과 희생도 감수하는 것. 알고 보면 세상은 다 살게 되어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죽으란 법은 없다. 부와 명예도, 지복과 희망도 모두 한순간이지만 ‘벽’이 남아 그래도 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안다. 비바람이 있기에 나무는 땅을 향해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는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뻗는다는 사실을. 힘든 방황일수록 그 끝에 깊은 통찰과 지혜가 따라온다는 진리를. 방황은 방황으로 끝이 아니라 성숙한 나 자신과의 만남으로 가는 과정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낯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청춘의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내 꿈을 꾸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청춘은 여러 빛깔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유한 채 여러 굴레를 넘나든다.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 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춘의 시기에도 꿈, 이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팍팍한 일상의 굴레가 수시로 젊음을 몰아세우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선택한 꿈의 색깔 앞에 꼬꾸라질 이유는 없어야 할 터이니. 이럴 때 공자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르지 말자.” (樂而不淫 哀而不傷,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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