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하는 세계 - 과학과 예술의 충돌이 빚어낸 전혀 새로운 현대예술사
아서 밀러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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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가지 분야가 만나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시대지만, 과학과 예술은 가깝고도 먼관계이다. 대부분 사람은 과학과 예술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에게 과학과 예술 모두 어려운 분야가 되기도 한다. 예술은 미학을 중시한다면, 과학은 객관적인 정보를 선호한다. 이 두 가지 분야의 뚜렷한 특성을 생각하면 협업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소재와 기법을 찾으려는 예술가들(나중에 언급하지만, 이들은 자신을 예술가와 과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은 도전에 힘입어 과학과 예술의 적극적인 협업이 이뤄지고 있다.

 

충돌하는 세계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된 과학과 예술의 협업 관계를 되짚어보는 책이다. 이 관계는 20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4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4차원은 3차원 공간과 시간(1차원)이 결합한 시공간이다. 아인슈타인과 동시대에 살고 있던 피카소(Picasso)는 재현을 추구하는 회화에 거스르는 그림을 공개했다. 그는 회화의 기본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다양한 시점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피카소의 등장은 입체주의(cubism)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당시 예술가들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상대성이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4차원 시공간에 흥미를 느꼈다. 히 피카소는 4차원 기하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가 과학 지식을 활용해서 만든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아비뇽의 여인들>이다.

 

그동안 미술사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시대 순으로 기술하는 통사(通史) 방식으로 다뤄왔다. 이렇다 보니 난해한 현대미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의 동향을 모르는 사람들은 과학과 예술의 협업 관계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러므로 충돌하는 세계는 미술사에 관심 있는 대중의 빈틈을 채워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중은 과학과 예술이 함께 작업하면서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면서 살아왔을까?

 

대중과 현대미술 간의 괴리감을 무관심한 대중 탓으로 돌릴 수 없다. 과학과 미술의 협업 자체를 아예 모르거나 새로운 시도를 애써 외면하는 미술 전문가들도 책임이 있다. 충돌하는 세계는 과학과 예술의 협업 관계를 통해 나온 성과들만 조명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들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과 예술관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고충까지 보여준다. 저자가 만난 예술가들은 대체로 과학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으며 자신을 과학자도, 예술가도 아닌 연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한다. 저자는 과학의 영향을 받은 예술, 또는 예술에 영향을 받은 과학을 아트사이(artsci)라고 부른다. 아트사이는 기존의 과학과 예술이 만나면서 탄생한 3의 문화이다. 그러나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미술 전문가들은 아트사이의 등장을 의심한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새로운 예술의 등장에 거부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주류 미술의 영향력이 사그라지지 이상 아트사이의 창작품이 대중과 소통하는 전시장은 부족하다. 그래서 아트사이 종사자들은 직접 갤러리를 만들어 작품 홍보에 주력하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과학과 예술은 우리가 학습하면서, 당연하게 인식하는 사물과 현상에 새로운 눈길을 던지는 동시에 독특한 창작 활동을 통해서 이전에 없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과학과 예술이 서로 만나 부딪히는 경험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이 세상은 다양한 생각과 경험들이 들끓는 거대한 용광로가 될 것이다. 어렵게만 느껴지는 과학, 남의 것으로 여겼던 예술을 나만의 것으로 느끼고 싶지 않은가. 그러려면 지금 과학과 예술이 충돌하는 세계를 만나 보시라.

 

 

 

 

Trivia

 

  The critic Lucy Pippard noticed that one of the five sculptures was the “most crowed and most business element; it lacks the absurdity of the other four and is the least individually beguiling.

 

  비평가 루시 피파드는 다섯 개의 조각 중 하나에 대해 가장 번잡하고 실용적인 작품이며 다른 네 개의 조각처럼 부조리한 부분이 없는데, 개별적인 매력은 가장 떨어진다고 평했다. (68)

 

 

책에 루시 피파드라는 미술비평가 이름이 두 차례 나온다(68, 314). 원서 본문에 ‘Lucy Pippard’라는 이름이 나오며 참고문헌에 ‘Lucy Pippard’가 쓴 글의 출처가 있다.

 

그러나 구글에 ‘Lucy Pippard’를 입력하여 검색하면 ‘Lucy Lippard’와 관련된 정보만 나온다. ‘Lucy Pippard’와 관련된 정보가 없다는 셈이다. 루시 리파드(Lucy Lippard)는 미술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실존 인물이다. ‘Lucy Pippard’는 저자가 잘못 쓴 이름, 아니면 원서의 오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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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를 벗기다 - 누드에 관한 불편한 진실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공민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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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nude)알몸(naked)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두 단어 모두 벌거벗은 상태또는 나체를 의미한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누드알몸을 구분했다. 누드는 예술의 한 형태이며 교육적인 용어다. 반면 알몸은 말 그대로 옷을 입지 않은 상태다. 대부분 사람은 누드라는 단어만 들어도 부끄러워한다. 왜냐하면 누드를 알몸의 의미로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클라크가 명시한 누드의 정의를 알고 나면 누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화가는 알몸을 그리지 않았다. 누드를 그렸다. 예술의 거장들이 표현한 누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몸이다. 예술적인 누드는 몸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므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누드에 대한 클라크의 입장은 1956년에 출간된 누드의 미술사에 나온다.

 

클라크가 명쾌하게 누드의 정의를 내린 덕분에 예술가들은 누드를 마음껏 그릴 수 있었고, 그들이 표현한 누드는 외설로 오해받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미술관에 전시된 누드화를 보면 불편함을 느낀다. 미술사학자 프랜시스 보르젤로(Frances Borzello)는 예술의 일부가 된 지 오래된 누드를 여전히 불편하게 느끼는 대중의 반응을 주목한다. 현대 예술가들이 묘사한 누드는 50여 년 전 클라크의 정의한 누드와 다르다. 그래서 보르젤로는 오늘날 대중은 현대의 누드를 불편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현대의 누드는 누드이면서도 누드가 아닌 것’, 불완전한 누드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보르젤로는 누드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녀가 누드에 관해 쓴 책의 제목은 누드를 벗기다(The Naked Nude). 이 제목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누드라고 알려진 남성과 여성의 몸은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이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들은 신화 속 초인적인 인물들을 강인하고 우람한 남성 누드로 묘사했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젊고 탄탄한 남성의 몸을 선호했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가 올 때까지 여성의 누드는 인기가 없는 소재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여성의 몸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이르면서 여성의 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더욱 강화되었다. 기독교는 여성의 몸을 죄악의 근원으로 봤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여성 누드를 묘사한 예술가들이 등장했지만, 그림이나 조각에 나타난 여성의 몸 역시 완벽한 비율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몸이었다.

 

클라크의 누드 이론은 이상적인 몸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예술로 회귀한다. 보르첼로는 낡아빠진 누드 이론의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50여 년 동안 지속된 누드의 미술사신화를 벗긴다. 우리나라에서는 누드의 미술사로 알려진 책의 원제는 ‘Nude’. 클라크는 전통적인 누드에 대한 예술가들의 관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페미니스트 신체예술가들은 누드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활용해 누드를 표현했다. 신체예술가들이 선호한 몸은 병들고 아픈 몸, 뚱뚱한 몸, 거식증으로 인해 앙상해진 몸이다. 육체의 추함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누드는 전통적인 누드에서 볼 수 있었던 육체미와 에로티시즘과 거리가 멀다. 페미니스트 신체예술가들이 표현한 누드는 이상적인 몸의 허상을 벗기는 동시에 여성의 몸을 눈요기로 소비하는 남성 중심 예술의 실체를 까발린다.

 

현대의 누드는 극단적이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자해하는 행위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병든 자신의 몸을 일기 쓰듯이 사진 찍은 사진가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누드를 불편해한다. 누군가는 또 ‘이게 예술이야?’라고 비아냥거릴 것이다. 현대의 누드는 완벽하지 않은 몸’, ‘보기 흉한 몸을 소재로 한다. 그래서 보르첼로는 현대의 누드를 대중에게 불편함과 혼란을 주는 불완전한 누드라고 정의 내린다. 대부분 사람은 비너스(Venus)나 날씬한 여체를 묘사한 고전적인 누드화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비너스처럼 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으며 노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를 거스르지 못한다. 그것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몸에 대한 불편한 진실이다. 오늘날 예술가는 인간적인(연약한), 너무나 인간적인 몸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불완전한 누드를 접한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몸의 불편한 진실을 목격하면서 혼란스러워한다. ‘이게 예술(누드)이야?’라고 의심했던 사람이 오늘날의 누드를 새롭게 본다면 ‘이건 인간의 몸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드를 벗기다누드의 종말을 알리는 책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누드는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인기 있고, 화제성을 가진 소재다. 저자는 앞으로도 계속 불완전한 누드가 나타나 대중을 놀라게 할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누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꿔야 할 때가 왔다. 누드의 미술사는 잊으시라. 절판된 책을 비싼 가격으로 사서 읽을 필요 없다. 누드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책이 바로 누드를 벗기다. 이 책은 누드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싹 벗겨준다.

 

    

 

 

 

Trivia

 

 

* 132

 

  오늘날 나체 모델의 초상화는 이상적인 누드가 회화에서 사진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림이 아닌 사진으로 더 많이 등장한다. 일련의 나체 초상화 사진은 갤러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1920년대 나체를 그린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초상화부터 1980년대에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가 여성 보디빌더 리사 라이언(Lisa Lyon)을 아마존의 여전사처럼 묘사한 것을 들 수 있다.

 

사진에 담은’, ‘사진으로 찍은이라고 쓰는 게 적절하다. 스티글리츠는 사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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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1 0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23 22:20   좋아요 0 | URL
요즘 누드사진 찍기가 힘들 걸요. 누군가는 찍고 있겠지만요.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누드사진을 예술적으로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어요. 이런 분위기 때문에 누드사진을 음지의 사진작가들이 찍는다는 편견이 생기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20-03-2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미술과 관련한 책을 보다가 누드 그림이 나오면 덜 좋아했었죠.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예요. 누드는 마른 사람보다 살이 찐 여성의 그림이 많은데 그 이유는 표현할 게 풍부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마른 사람의 몸은 비예술적인 셈이죠.

cyrus 2020-03-23 22:21   좋아요 0 | URL
네. 저도요. 버스 탈 때 미술 책 읽다가 누드화 도판 나오면 얼른 다음 페이지로 넘겨요.. ㅎㅎㅎㅎ
 
여성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
살레안 마이발트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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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드화는 뜨거운 감자다. 예전에는 유명 화가나 사진작가가 누드화를 그리거나 누드사진을 찍으면 예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외설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영향이 커지면서 예술계에서 여성의 누드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나체 또는 누드 하면 여성 누드모델과 남성 화가를 제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은 걸작으로 알려진 누드화와 누드사진 속에 남성의 음란한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남성 중심 미술사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다시 쓰면서 역사의 뒤로 사라진 여성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는 여성 예술가(화가, 조각가)들의 손에서 탄생한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역사적 및 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본다. 왜 우리는 누드(남성, 여성)를 소재로 한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막아 버린 시대적 분위기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차디찬 편견이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사회부터 남성의 몸은 이성, (),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여성의 몸은 철저히 열등한 몸으로 취급받았다. 사회의 기득권이 된 남성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남성 신학자들은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Eve)의 죄를 잊지 않았고, 그들은 여성의 몸을 욕망과 타락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남성 예술가들은 남성과 여성 누드 모두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타락하기 쉬운 여성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국가와 교회는 여성이 누드를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누드를 관찰하면서 습작을 해야 한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여성들은 누드를 참관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셈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드를 그리려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누드를 보고 그린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비난했고, 해부학 지식이 반영되지 않은 어설픈 누드화를 보면서 비웃었다.

 

여성 화가들이 누드를 그리는 일은 가십거리였다. 남성 화가들만 독점하고 있던 누드화 열풍에 여성 예술가들이 설 자리는 적었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들의 실험 정신까지 비난했다. 18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 줄리아 라마(Giulia Lama)는 그림 속 남성의 페니스를 정면으로 향한 상태로 그렸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가 누드화 제작의 금기를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한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은 초상화 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화가였다. 그런 그녀도 누드화 제작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인기 있는 여성 화가를 바라보는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성 화가들은 누드화를 그리려면 온갖 비난과 추문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책은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누드화 및 누드 조각을 남긴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다. 여기에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면서 유명해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등이 나온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일화까지 공개한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누드모델이 된 이유가 흥미롭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가 여성을 위한 누드화 수업이 개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도 이채롭다.

 

이 책의 분량은 적다. 그러나 여성이 누드화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너무나도 길다. 다행히 그녀들의 도전과 인고의 시간은 역사가 되어 이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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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문장은 알고 있는 당신은 분명 미술과 예술작품을 보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연배가 꽤 있는 옛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는 미술평론가 손철주1998년에 펴낸 책이다(초판을 만든 출판사는 도산되어 사라진 생각의 나무).

    

 

 

 

 

 

 

 

 

 

 

 

 

 

 

 

 

* 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오픈하우스, 2017)

 

 

 

이 책은 22년 동안 세 번의 개정을 거친 미술 교양서의 스테디셀러다. 이 책을 잘 모르는 젊은 독자들이 있을 것 같지만,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제목은 그림 읽기의 공식처럼 알려졌다. 그런데 그림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서 밑줄을 쳐가며 공부하듯이 미술책을 정독할 수 없는 노릇이다. 미술평론가나 미술사학자들의 작품 해석을 참고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감상 방식만 알면 그림 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그림 볼 때 제일 간과하기 쉬운 것은 내 마음을 믿는 일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만약 당신이 그림을 보다가 마음에서 무언가 느껴졌다면 그림을 제대로 보고 있다. 대부분 사람은 과연 내가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화가의 의도에 맞는지 스스로 의심한다. 나도 한때 그랬다. 이런 생각은 그림을 안 보이게 만든다. 이러면 미술은 어렵다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손철주는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에서 모든 예술작품 감상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림 감상에 정답은 없다. 그림 감상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림을 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그림 (내가) 느낀 만큼 보인다.

 

    

 

 

 

 

 

 

 

 

 

 

 

 

 

 

 

*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2)

* [품절] 오시안 워드 TABULA: 현대미술의 여섯 가지 키워드(그레파이트온핑크, 2017)

* 오시안 워드 혼자 보는 미술관(RHK, 2019)

 

    

 

 

사실 오래전에 주관적인 예술작품 감상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술 전문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를 쓴 존 버거(John Berger). 이 책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9)

 

 

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핵심을 함축한 문장이다. 이 책에서 버거는 회화를 비롯해 사진 · 광고 등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를 다르게 보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는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이 하나의 정형화된 상식으로 알려지는 것에 경계한다. 그러면서 상식으로 굳어진 예술작품을 보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상식은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림 한 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제각각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과의 관계는 항상 변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을 보려면 그것(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 관련된 상식과 전문가의 의견들(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분리해야 한다. 그 순간에 우리는 말(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가 되어 예술작품을 본다.

 

오시안 워드(Ossian Word)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핵심을 이어받아 현대미술 작품과 고전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그는 TABULA: 현대미술의 여섯 가지 키워드(그레파이트온핑크) 혼자 보는 미술관(RHK)을 썼다. 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핵심 키워드는 백지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인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예술작품을 감상하려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타인의 견해에 눈치 보거나 비교하지 않고 내 시선과 감각을 믿으면서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다.

    

 

    

 

 

 

 

 

 

 

 

 

 

 

 

* 케네스 클라크 그림을 본다는 것(엑스오북스, 2012)

 

  

 

모든 미술 전문가가 주관적 작품 감상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자신의 책 그림을 본다는 것(엑스오북스)에서 미술을 막대사탕처럼 한순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림이 주는 기쁨을 오랫동안 느끼려면 그림에 관해 배우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 감상 방식은 처음에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오시안 워드의 그림 감상 방식의 시작 단계와 비슷하다.

 

그림 전체와 세밀한 부분까지 다 살펴봤으면 그림에 대한 약간의 정보(화가의 생애, 그림이 화가의 생애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정보 등)를 찾아본다. 이런 지식을 참고하면서 다시 한 번 그림을 본다. 그러면 혼자 그림을 보면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된다. 케네스 클라크가 제시한 그림 감상 방식은 나쁘진 않다. 하지만 그림을 제대로 보면서 즐기려면 그림에 대한 정보가 꼭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마치 그림이라는 문제를 보다가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답(정보)을 찾아보는 상황이다. 예술작품을 실컷 보다가 전문가의 작품 해설을 접하고 나면 허탈감이 느껴져서 그림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을 것이다. 케네스 클라크의 그림 감상 방식은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미술 교육의 단점은 예술작품을 내 방식대로 보고 즐기는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림을 눈으로 보기에 앞서 교과서에 나온 그림 감상법을 배운다(다른 방식으로 보기의 첫 문장을 변형했다). 이러면 그림 보는 일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틀려도 좋으니 즐겁게 논다는 생각으로 편안하게 그림을 보자. 그림을 보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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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20-03-14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맞히셨어욥! 저, 연배가 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옛날 사람은 맞아요. 심지어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구판 책으로 수업도 했었고 페이퍼도 작성했던 것 같아요. 사이러스 님이 짚어주신대로 그림은 느낀만큼 보인다고 저도 동감해요^^

cyrus 2020-03-14 23:46   좋아요 0 | URL
저는 나이만 젊은 ‘애늙은이’입니다. 저랑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요. 그래서 나쁘게 말하면 시대와 유행에 뒤쳐진 사람이에요. 이래서 저도 ‘옛날 사람’이죠. ^^;;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 3명은 없는가?” 나는 단숨에 읽는 여성 아티스트(시그마북스)의 한 줄 평을 이렇게 쓰고 싶다. 이 책에 나온 여성 예술가는 총 57명이다. 3명만 더 소개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자가 57명을 선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책에 없는 3명의 여성 예술가를 찾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 플라비아 프리제리 단숨에 읽는 여성 아티스트(시그마북스, 2020)

 

 

 

사실 나는 단숨에 읽는 여성 아티스트를 읽으면서 책에 포함되어야 할 여성 예술가를 네 명 정도 생각했다. 이 네 명 중의 한 명을 제외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3 플러스 1(3+1)형식으로 여성 예술가를 소개하겠다. 소개 순서는 예술가들이 태어난 연도순이다.

 

 

 

 

1.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프랑스, 1864~1943)

    

 

 

 

 

 

 

 

 

 

 

 

 

 

 

 

* 카미유 클로델 카미유 클로델(마음산책, 2010)

* 도미니크 보나 위대한 열정(아트북스, 2008)

* [절판] 안느 델베 카미유 클로델(투영, 2000)

 

 

 

카미유 클로델은 오랫동안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는 로댕과 함께 조각 작품을 제작하며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한 채 30년 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다가 눈을 감았다. 로댕은 위대한 조각가로 알려져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카미유는 실력이 뛰어난 비운의 여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시대는 카미유의 뛰어난 재능과 넘치는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카미유를 지치게 만드는 시대의 벽, 이 거대한 벽을 그녀 혼자서 넘어서기에 힘겨웠다.

 

카미유 클로델(마음산책)은 로댕을 포함해 가족과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위대한 열정(아트북스)은 카미유와 그녀의 남동생 폴 클로델(Paul Claudel)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카미유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으로 폴을 지목한다. 카미유와 폴의 어머니는 남편의 유산이 장녀 카미유에게 상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딸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려고 한다. 폴은 어머니의 계획에 동의한다. 그는 로댕이 누이의 삶을 망가뜨렸다면서 비난한다. 하지만 폴도 로댕 못지 않게 누이를 힘들게 한 적이 많다. 갑갑한 정신병원에 생활한 카미유는 폴에게 조각하고 싶다면서 말했지만, 폴은 그녀의 요청을 무시했다.

 

 

 

 

 

 

 

 

 

 

 

 

안느 델베(Anne Delbée)카미유 클로델1989년에 어떤 여자(출판사는 예하’, 역자는 성옥련)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번역된 카미유 전기(傳記). 1989년은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가 카미유로 열연한 영화 <카미유 클로델>이 국내에 개봉된 해이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그 해 말에 카미유 클로델(정음사, 역자는 강명호)도 나왔는데, 제목만 다를 뿐 저자명과 내용은 동일하다. 이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 모두 영화 <카미유 클로델>에 나오는 장면이다. 어떤 여자(Une femme)는 원래 카미유의 삶을 극화한 연극 제목이다. 안느 델베가 이 연극의 공연을 연출했다. 영화 원작은 안느 델베가 쓴 전기가 아니라 폴의 손녀가 1984년에 발표한 전기다.

 

 

 

 

 

 

 

2.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 독일, 1867~1945)

    

 

 

 

 

 

 

 

 

 

 

 

 

    

 

* 민혜숙 케테 콜비츠(재원, 2009)

* 조명식 케테 콜비츠(재원, 2005)

 

    

 

독일의 판화가 겸 조각가 케테 콜비츠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사회 문제의 실상을 판화로 기록하여 세상에 알리려고 했다. 케테는 1980년대 우리나라의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자인 케테는 초기에 농민 항쟁이나 파업을 주제로 한 동판화를 제작한다. 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녀의 아들이 전사한다. 그 후로 케테는 전쟁의 참상과 전시 속에 고통 받는 민중의 모습을 주로 표현한다. 불행하게도 두 번째 세계 대전이 일어나 손자까지 전사한다. 아들과 손자의 죽음은 지켜본 케테는 말년에 죽음을 주제로 한 판화를 제작한다.

 

실천문학사 출판사에서 나온 케테 콜비츠 평전은 절판되었다. 그녀의 생애와 예술론을 함께 기술한 책으로는 케테 콜비츠(재원)이 유일하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동명의 책이 있다. 책을 참고하거나 구매하기 전에 저자명과 목차를 잘 확인해야 한다. 일단 2005년에 나온 케테 콜비츠(재원)는 도록 형식으로 된 책이다. 작가 소개와 작품 설명에 대한 내용이 많지 않다. 2009년에 나온 케테 콜비츠는 분량이 얇지만, 그래도 작가의 생애와 예술론이 간략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3. 메레 오펜하임(Méret Oppenheim, 독일, 1913~1985)

    

 

 

 

 

 

 

 

 

 

 

 

 

 

 

 

  

* 로라 톰슨 초현실주의(시공아트, 2014)

* 카트린 클링죄어 르루아 초현실주의(마로니에북스, 2008)

    

 

 

메레 오펜하임은 초현실주의 그룹에 활동한 초현실주의자다. 그녀의 대표작은 털로 덮인 아침식사. 이 작품은 찻잔과 받침, 찻숟가락 세트를 모피로 감싼 오브제(objet). 그녀는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피카소(Picasso)와 대화를 나누다가 모피로 덮인 찻잔 세트를 생각해낸다.

 

 

 

 

 

 

 

 

    

오펜하임은 그저 관객을 놀라게 해주려고 이런 기괴한 오브제를 선보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저것은 찻잔 세트다’)과 사물의 용도마저 모피로 덮어버린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상황을 의심한다. 이 오브제 작품은 모피 찻잔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가 파이프 한 개를 그려놓고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뻔뻔하게 말했듯이(그림 제목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오펜하임은 모피 찻잔을 관객들 앞에 들이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찻잔이 아니다.” 찻잔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말인가. 오펜하임이 설정한 사물의 배반을 바라본 관객은 혼란스럽다. 

 

 

 

 

 

 

+1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미국, 1945~ )

 

    

 

 

 

 

 

 

 

바바라 크루거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다. 크루거는 사진이나 그림 위에 문장을 넣은 포토몽타주를 만들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그녀의 대표작은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이다. 후자의 작품은 여성의 임신 선택권 보장을 촉구한 미국 페미니스트들의 시위가 벌어졌던 시기에 나왔다. ‘당신의 몸은 전쟁터’는 지금도 페미니스트들의 시위 구호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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