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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
살레안 마이발트 지음, 이수영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누드화는 뜨거운 감자다. 예전에는 유명 화가나 사진작가가 누드화를 그리거나 누드사진을 찍으면 예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외설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196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영향이 커지면서 예술계에서 여성의 누드는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다. 나체 또는 누드 하면 여성 누드모델과 남성 화가를 제일 먼저 떠올리기 쉽다.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은 걸작으로 알려진 누드화와 누드사진 속에 남성의 음란한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남성 중심 미술사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다시 쓰면서 역사의 뒤로 사라진 여성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는 여성 예술가(화가, 조각가)들의 손에서 탄생한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역사적 및 사회적 맥락을 통해 살펴본다. 왜 우리는 누드(남성, 여성)를 소재로 한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막아 버린 시대적 분위기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차디찬 편견이다. 《여성 화가들이 그린 나체화의 역사》는 누드화와 누드 조각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고대 사회부터 남성의 몸은 이성, 선(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여성의 몸은 철저히 열등한 몸으로 취급받았다. 사회의 기득권이 된 남성들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남성 신학자들은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Eve)의 죄를 잊지 않았고, 그들은 여성의 몸을 욕망과 타락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남성 예술가들은 남성과 여성 누드 모두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타락하기 쉬운 여성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국가와 교회는 여성이 누드를 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면 제일 먼저 누드를 관찰하면서 습작을 해야 한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여성들은 누드를 참관할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셈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드를 그리려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누드를 보고 그린 여성을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비난했고, 해부학 지식이 반영되지 않은 어설픈 누드화를 보면서 비웃었다.
여성 화가들이 누드를 그리는 일은 가십거리였다. 남성 화가들만 독점하고 있던 누드화 열풍에 여성 예술가들이 설 자리는 적었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들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들의 실험 정신까지 비난했다. 18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화가 줄리아 라마(Giulia Lama)는 그림 속 남성의 페니스를 정면으로 향한 상태로 그렸다. 남성 화가들은 그녀가 누드화 제작의 금기를 깨뜨렸다고 비난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시대에 활동한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은 초상화 제작으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화가였다. 그런 그녀도 누드화 제작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인기 있는 여성 화가를 바라보는 사교계의 따가운 시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성 화가들은 누드화를 그리려면 온갖 비난과 추문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책은 중세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누드화 및 누드 조각을 남긴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다. 여기에 페미니즘 미술 비평가들에게 재평가를 받으면서 유명해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등이 나온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일화까지 공개한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누드모델이 된 이유가 흥미롭고, 독일의 대문호 괴테(Goethe)가 여성을 위한 누드화 수업이 개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도 이채롭다.
이 책의 분량은 적다. 그러나 여성이 누드화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너무나도 길다. 다행히 그녀들의 도전과 인고의 시간은 ‘역사’가 되어 이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