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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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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5]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계속 되는 일본 극우파의 망언 
  

오늘은 65주년을 맞은 광복절이다. 며칠 전에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 과거사를 사죄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이번 광복절은 우리에게는 의미가 깊다. 한일 과거사의 민감한 화두인 한일 

합방 조약의 무효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담화 내용에 반영하지 않았지만 어두웠던 한일  

과거사의 터널을 벗어나 양 나라의 동반자 관계를 새로이 구축하는 긍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듯이 한일 과거사는 한 번에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일본 정부의 실천 노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번 담화문을 통해서 한일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앞으로 한일 과거사 해결에 진전이 보일 것으로 예상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부 일본 극우파들은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빗댄 어록이
있을 정도로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로 유명한 구로다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이 이번에도 

우리나라 광복절에 맞춰 망언 한 마디 남겨주셨다. 우리나라의 광복은 자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일본의 세계대전의 패망 따른 역사적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예전에 어느 일본의 보수 

정치인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철도와 공장을 세워 한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해줬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극우파들의 망언들은 하나같이 과거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필연적인 

역사라고 정당화 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의 망언  

 

볼테르의 철학소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소설 제목의 동명의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서  

모든 세상은 최선의 세계이며 필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 박사는 라이프니츠를 대변하는 인물 

이다. 그의 대화에는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올 정도로 열렬한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제자인 캉디드는 이름 글자 그대로 팡글로스 교수의 주장을 믿으며 현재의 

상태는 가장 옳다고 믿게 된다. (그의 이름 Candide는 프랑스 어로 ‘순박하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순진한 사내 캉디드는 사촌 퀴네콩드를 사랑지만 숙부에 의해서 쫓겨나고 만다.  

그때부터 그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가는 곳마다 전쟁, 지진, 종교재판, 고문을 겪는다.  

캉디드가 불행에 처한 상황에 몰릴 때마다 팡글로스 박사는 눈치 없이 깨방정을 떨면서 낙관주의 

적인 말을 하고 다닌다. 화산이 일으키고 지나간 포르투갈 리스본의 참혹한 현장에 대해서 팡글 

로스 박사는 망언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에 있는 화산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현재 있는 곳 이외의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 볼테르『캉디드 혹은 낙관주의』p 33 -   

한술 더 떠 세상에서 일어나고 일들은 다 필연적인 현상이며 리스본에 있어난 화산과 지진도  

당연히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말은 정말 박사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나 논리적이지 않는 말이다. 팡글로스 박사의 말에는 리스본에만  

화산이 발생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리스본에만 화산이 일으킨다는 보장은 없다. 화산과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은 리스본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등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는 화산은 리스본에만 발생했을뿐, 다른 곳에는 화산이 일으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리적인 추론을 거부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나태한 귀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처럼 지금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고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다보니 논리적 오류에 빠진 말을 하기도 한다. 만약에 21세기에 팡글로스 

박사가 살아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한 국가적인 재난 사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네티즌들의 뭇매질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8.15와 일본의 8.15의 사정  

소설 속 팡글로스 박사의 모습은 남의 입장을 살펴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  

극우주의자를 떠오르게 한다. 팡글로스 박사가 생각하는 ‘최선의 세계관’은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우리나라가 일본에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정당화시키는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그들은 일본의 

지배가 한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팡글로스 박사가 귀납적 추론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망언에도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광복절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자주 독립국으로 전환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의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공식 선언한 날이다. 

인류의 대재앙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A급 전범들은 그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신’이다. 그래서 2006년에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우리나라 광복절에  

강행한 것은 상대국인 우리나라의 입장을 고려 하지 않은 잘못된 역사적 낙관주의가 만든  

그릇된 행동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수많은 고난의 여정 끝에 캉디드는 퀴네콩드와 팡글로스 박사와 재회하게 되고 그들과 함께 농장 

을 꾸려 산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캉디드는 불행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여정을  

계기로 세상은 꼭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팡글로스 박사는 여전히 낙관주의 

를 고집하고 있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 그는 캉디드에게 이전에 경험했던 불행한 일들이 아니 

었으면 지금의 행복한 시간은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캉디드는 스승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 볼테르『캉디드 혹은 낙관주의』p 200 -

캉디드는 온갖 비참한 체험과 사회적 불합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개선에 의욕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좋든 나쁘든 돌아가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생각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하고 있다.

올해는 65주년 광복절뿐만 아니라 한일합방 100주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서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 담화문 발표뿐만 아니라 한일 학자들이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공동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이 이전보다 한일 간의 과거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수탈한 한국의  

문화재 반환 등 과거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태도에  

대해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이번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문이 이전처럼 한국의 비위를 맞춰 

주기만 했던 립서비스였는지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한일 학자의 한일합방 무효  

공동선언은 단순히 한일합방 100주년을 기념하는데 의의를 두지 말고 이번 선언을 계기로 한일  

학자들 간의 정기적인 연구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 단순히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말로만 사과 

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해서 과거사를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의 태도가 긍정적이다고 해서  

과거사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전망은 금물이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  

근대사는 어떻게 보면 기억하기 싫은 역사적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국사의 한 부분 

이므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어두웠던 역사를 배움으로써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으며 어긋나 있는 일본 간의 관계도 개선할 수 있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협력적으로 과거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의 밭이 어딘지 알고  

스스로 알고 지켜나가는 것이며 일본 역시 낡은 역사적 낙관주의를 폐기시키고 한국과 함께  

역사의 밭을 가꾸는데 협력적인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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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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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47] 베니스에서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 예술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화가와 음악가들. 

우리는 그들을 통틀어 Artist. 즉, 예술가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거나 ‘거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거나 식음전폐까지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집중력을 쏟아낸다. 예술적인 집중력이 발휘하게 되면 예술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지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성격은 괴팍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심리상태는  

전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하게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되면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지속되는 영감(靈感)의 부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별나면서도 정상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에게는 별도로  

‘기인(奇人)’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기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는 남다른  

행동과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게 마련인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행동을 가지고 ‘기인’이라고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인 예술가들은 그런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 스스로 떳떳하게 인정하고 다니는 정말  

‘기인’다운 기인 예술가들 더러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런 삶을 보면  

불가사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예술에 대해서 집념이 아닌 집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다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만 짊어져야 하는 특수한 운명인 것일까?  

 

 

 토머스 만, 소설가 아센바흐, 예술가로서의 기질

유명한 문학 작가들은 독특한 예술가들의 실제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을 쓰거나 그런 그들의  

삶과 예술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도 예술가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작가들도 상상력을 요하는 문학이라는 예술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라면 가지게 되는 독특한 기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에게 이런 주제가 참으로 흥미로웠을 것이다. 작가, 위대한 예술가, 독특한 기질. 이런 삼박자 

를 고루 갖춘 문학작품이라면 아마도 토마스 만의『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토마스 만은 세계대전 당시 양심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던 독일의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센바흐 또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작품 속  

소설가는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아센바흐는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런 행동과 기질은 흡사 동성애자와 같다. 재미있게도 아센바흐라는 독특한  

인물을 가공한 토마스 만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토마스 만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즐긴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세계 문학사 사상 동성애 커플로 유명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서 말년에 불우하게 산 오스카 와일드 등이 유명하다. 음악가들은  

동성애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생상(피겨 선수 김연아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연기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던 <죽음의 무도>의 작곡가)은 서양 음악사상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특히 생상은 스스로 ‘남색꾼’이라고 자처했으며 토마스 만처럼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통해서 작곡의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예술가들 중에서 왜 동성애자가 많은지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동성애적 코드도 예술가들에게만 드러날 수 있는 독특한 기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간과하기 쉬운 아센바흐의 예술가다운 기질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아센바흐가 타치오에게 매혹되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베네치아에서 

까지 따라와 결국에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 제목인 ‘베네치아에서 

의 죽음’은 주인공 아센바흐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전체상 동성애적 코드가 다분히  

드러나 있지만,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동성애적 예술가의 일생이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중편소설, 그리고 독일의 위대한 지성이라는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센바흐를 동성애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주장일  

뿐이다. 원래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숨겨진 동성애적 본능이 

타치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자칫 동성애자라는 오명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 

나타나있는 아센바흐의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특히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아센바흐의 성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화자의 서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 조숙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는 명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중략) 그는 고등학생일 때 벌써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에 그는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명성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고, 짧은 편지글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신뢰를 주는 작가인 그에게 많은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호의를 베풀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익혔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298 -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명망(名望) 있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명령을 하고 이에 대해 고통을 안기는 행동이 미덕의 진수라고 여긴다. 자신이  

생각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엄격한 자기통제를 건다.

  그가 그러한 재능에서 비롯된 과제를 가냘픈 두 어깨에 떠안고 앞으로 계속 나아 

  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극도의 규율이 필요했다. (중략)  그는 가슴과 등에  

  찬물을 끼얹으며 아침 일찍 일찍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원고지 머리말에 놓인 은촛대에 한 쌍의 기다란 초를 밝히고, 오전에 열정적이고도  

  양심적인 두서너 시간 동안의 수면으로 비축해 둔 힘을 예술에 전부 쏟아 부었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300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  

하지만 아센바흐도 너무 과한 예술가적 기질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작품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자기통제 뒤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지천명(知天命)’ 50세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젊음의 혈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처럼 인간 아셴바흐도 점점 나이가 들면 예전의 예술적 재능이 퇴화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 중반기 작품들이 후반기 작품보다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와 대표작들은 대부분 재능의 물이 올랐을 젊은 시절 때에 쓴 것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작품 구상이 이전보다 진전이 없다는 것은 예전보다 창작 능력이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이미 상실해버린 젊음, 즉 혈기왕성했던 창작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통해서 갈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집념이 결국에는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베네치에에 오면서까지 타치오를 쫓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걸지도 못한다. 즉, 타치오는 고차원적인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아셴바흐는 

눈 앞에 그토록 좋아하던 타치오가 있으면서도 말을 걸어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치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게 되는데 결국에는 예술가들이 가지게 되는 열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었을 때의 예술적 재능을 찾기 위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보인 아센바흐는 

도리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재능의 불씨마저 꺼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좌절감과 동시에 작품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괴로움 끝에 자살하는 예술가와 다름없는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센바흐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시 중에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와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 뜻풀이를 하면 하얀 산발의  

미친 사내)가 물에 빠져 죽자, 백수광부의 아내도 따라 죽는 것을 본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여옥에게 가서 알려주었더니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에 맞추어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 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전문, 출처: 위키백과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은 아센바흐의 넋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딱 알맞다. 아센바흐는  

타치오를 보기 위해서 기어코 곤돌라를 타고 죽음의 땅 베네치아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리고  

원통하게도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센바흐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비록 이상적인  

예술의 실현을 이루지 못한 부질 없는 집착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마지막 여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여정은 예술가인 아센바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아센바흐는 심장 속에 숨어 있었던 예술적 본능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도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여도 어색하지가 않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그는 미소년을 쫓아다니는 동성애적 소설가가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고자 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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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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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비극적인 부녀(父女),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남성 유아의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에서 등장하는  

작품 동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남성 유아의 성 정체성 형성을 설명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인물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행위들을 해 버린 그는  

자신의 과오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비극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절대적인 힘에 희생당하여 괴로워하는 인간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닮은 덴마크 왕자 햄릿과 더불어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심리학 용어로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 중에는 오이디푸스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안티고네’이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렸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를 이끌어준 사람이 

유일하게도 안티고네뿐이다. 오이디푸스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게 되어 두 명 다 죽게 된다. 

남은 두 딸, 주인공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만 남게 되었는데 이 때 테베의 새 왕인 숙부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만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법령을 내린다. 안티고네는 숙부의  

법을 거역하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손수 치뤘는데 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남인 하이온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녀를 따라  

자살하였고, 그의 어머니인 에우뤼디케도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로 자기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인간이 만든 법을 거역하고  

신(神)을 따르려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 안티고네.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주변  

사람들의 잇다른 죽음.오랜 옛날, 당시 비극을 관람했던 고대 그리스의 관객들이나  

지금도 이 작품을 읽는 현대인들에게는 두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죽느냐 ‘장님으로’ 사느냐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비극적 운명의 희생양으로 치부하기에는   

뛰어난 작품성에 비하면 낮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오이디푸스는 근친 결혼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있다.  프로이트 때문에 정작 오이디푸스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며 심리학 용어 속의 인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의로운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과오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반(反) 인륜적인 행위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심지어 어머니와 근친혼을 하고 만다.  

우리나라 법 규정상 근친혼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우리나라 법정에 서게  

된다면 ‘존속살해’ 혐의로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 그리고 심하면 사형까지  

처해질 것이다. 비록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정해진 신탁의 운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지만 그는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 왕위에 물러나 테베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이디푸스의 죄가 중범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제대로 죄의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의 죄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떳떳이 인정한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고 심장을 찌르게 되었다면 

죽어서도 신이 정한 운명에 대한 원망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보다 눈을 찌른 그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다. 
 

 

 안티고네의 순결 
 

안티고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보다 수준 높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신만을 따르려는 안티고네는 불의에 맞서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크레온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로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뤼네이케스에게는 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만든다. 크레온의 모습은 사회 현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자기식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잘못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확실한 방법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다. 그러나 부당한 사회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려는 올바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처럼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오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죽음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서 크레온은 ‘정의’로 상징되는 

안티고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형선고 받은 안티고네는 권력자들에게 힘없이  

무너지는 민중의 정의다. 타인의 개입으로서 정의가 사라질 바에 안티고네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정의를 제 손으로 지키려고 한다. 안티고네의 순결은 곧 ‘정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경의는 곧 정의에 대한 경의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크레온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코로스의 대사를 통해 정의에 대한 경의를 모독한  

권력자의 최후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안티고네』천병희 역, p 149 -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안티고네의 의지

어느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회 윤리위원회는 
의원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징계를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원을 고소한  

학생들은 분명히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관련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들을 통해서 허위적인 반론 보도문을  

게재하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놓고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대 개인, 국가 대 개인 등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의 찾기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미미하기만 

하다. 하나의 사회 문제가 자신의 일에 관련이 없다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안일한 태도는 결국에는 시민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누리려는 정치인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정치적 비리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는 

크레온과 같은 인물이 기세등등 날뛸 것이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죽을 때까지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의지.  성숙한 우리나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덕목이다. 문제의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정치인들을 뽑은 시민들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티고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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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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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48]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1월 1일 새벽,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이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백남준이 주도 하에 존 케이지 등 전위 예술가와 대중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여 실시간으로  

위성 생중계한 퍼포먼스를 제작하였다. 퍼포먼스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퍼포먼스로 인해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는
20세기 예술사의 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통해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빅 브라더 사회가 오지 않았음을 위성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역사적인 생중계 이후 언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비평가들은  

백남준의 위성 방송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미디어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 생활 및 사상의 통제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지배 기구를  

상징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그리고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권력의 일당독재화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유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빅 브라더의 눈은  

일상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마저  들이댄다.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이면서도  

은밀한 성 생활까지 감시하면서 욕구 충족을 위한 성 생활을 억제한다. 작품 속  

빅 브라더의 사회는 처음부터 결말까지 전체주의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전체주의 사회에 굴복해버리고 마는 윈스턴 최후의 독백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빅 브라더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미디어의 존재를 무서워하고 부정하면서도
결국에는 미디어의 매력에 사로잡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流刑)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417 -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미디어도 다변적으로 발달하였다. 범죄 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설치한 CCTV에서부터 이제 방송에서는 일반인부터 유명  연예인까지 개인의 일상  

생활이 TV와 인터넷으로 전파되고 있다. 특히 트위터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달됨으로써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예전보다 신속한 정보 소통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모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트위터에 올린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개인 정보 유출은 사생활 초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트위터의 개방성을 악용한 범죄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는 빈집털이범  

경력이 있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다른 사람의 트위터에 공개된 일거수일투족의
기록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빈집털이범들은 트위터에 자신의 여행 일정을 올린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 미디어 제국주의

미디어를 지배한 빅 브라더는 인간의 공공장소에서까지도 영항을 미친다.
예전 극장에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지배정권에 관한 보기 좋은 소식들을 알려주었던  

‘대한 늬우스’처럼 빅 브라더 사회의 극장에도 전체주의 정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홍보성이 짙은 영상물이 스크린에 전파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 만 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18 -

이 대목에서 무시무시한 점은 잔혹한 전쟁 영화 장면에서도 관객들이 전혀 연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수잔 손택은 전쟁의 참혹성에 관해서 쓴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대중들은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의 상실에 대해서 지적을 하였다. 빅 브라더 체제의 사람들은 범람하고 있는  

미디어의 거짓된 영상으로 인해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려는 능력이 상실되었다.

정치 지배 세력이 미디어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현상은 다원주의인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나라의 민영 TV 방송국을  

3개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 미디어 그룹의 소유주이다. 동시에 이탈리아 세리에 A 축구  

명문 팀인 AC 밀란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미디어 매체와  

AC 밀란을 총괄하는 통합적인 그룹을 만들었다. 속내에는 자신의 기업이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사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많은 부정적인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3선이나  

총리직을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1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계적 정세의 배후에도 베를루스코니보다 더한 미디어의  

지배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지구촌의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는 칭찬과  

‘비도덕적인 악덕 자본가’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왕 루퍼트  

머독이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와 이와 관련된 사업만 해도 총 52개국 780여 종에 달하며  

한때 미국 LA 다저스의 소유주이기도 했었다. 머독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이라크 타도에 한 몫을 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라크를 세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머독이 장악하고 있던 미디어의
힘이 컸다. 미디어의 무서운 전파력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다. 대부분 전 세계  

사람들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의 허황된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미국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중심부를 공습하였다. 

전 세계로 방영된 공습 장면에 세계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1984>에서 전쟁 영화  

장면을 보는 관객들처럼 ‘세계 공공의 적’ 후세인의 나라가 파괴되는 모습에 환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국과 거대 미디어 제국의 합작에 희생당하는  

이라크의 모습에 세계 평화 존속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지배계층에 의해  

미디어가 통제되고 이를 권력 유지에도 이용하는 ‘미디어 헤게모니’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미국 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 속에서도
그는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을 힘입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했던가.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였던 동명의 부시 대통령도  

1994년 재임 당시, 이라크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CNN을 통해서  

전 세계로 방영되게 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전 세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동조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1984> 속의 미디어 헤게모니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하나의 나라를 통제하고 있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세계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미디어 제국주의’가 형성됨으로써 지금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믿는 미디어에 발등 찍혀버린 백남준 
 

백남준의 퍼포먼스 제목에는 조지 오웰의 영혼을 만나 당신의 예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소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리고 과학 기술로 발달된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찬가를  

불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백남준이 불렀던 희망찬가는 이제 그만  

불러야할 때이다. 백남준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거대한 키메라로 진화된 새로운 빅 브라더의  

존재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시도하고자 했던 미디어를 이용한 세계  

통합은 거꾸로 미디어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미디어가 올바르게 성장해주기를 바랐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의 악동으로  

자라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백남준은 믿고 있었던 '미디어'에게 자신의 발등이  

찍혀버리고 만 셈이다.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윈스턴처럼  

빅 브라더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펼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다.  

윈스턴과 같이 빅 브라더에 대항했다가 나중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남 일처럼 같이 여겨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 미디어는 현대 문명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지구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미디어는 TV와 컴퓨터를  

이용해 우리의 감각을 마사지하고 있다. 지금도 24시간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수많은 정보들이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를 무조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용한, 그리고 올바르고 진실한 정보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디어 정보에 대한 적극적인 안목이 있어야 앞으로 계속  

위세를 부리게 될 미디어의 빅 브라더에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용 관련 기사 자료 출처 

["트위터에 휴가계획 올리면 큰일나요"] 한국일보 7월 21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07/h2010072116385822450.htm

[이탈리아 권력·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2일자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221758265&code=90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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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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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한 관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처음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맨 처음 제목 속의  

‘고도(Godot)’가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고도(高度)’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고도’는  사람 이름이었다. 작품 내용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인물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제1막부터 보게 되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며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막부터 이들은  이름 모를 시골길에서 만나게 된다. 이 두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직업인지 알 수 있는 상세정보는 없다. 다만 에스트라공의 ‘공(公)’이 공작의 지위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보아서는 블라디미르보다는 높은 계급에 추측할 수 있다.  

1막의 대화 속에서도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나으리’라는 단어와 높임말을  

쓰는 대사가 딱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부조리극인만큼 에스트라공의  

공작이라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친구처럼 대화를 하지만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다.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거까지고 티격태격  

말다툼하며 괜히 지나가는 럭키와 포조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계급의 차이를 떠난 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보기 어렵다.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니, 또 너로구나!  

  에스트라공  그래서? 
  블라디미르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주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에스트라공  나도 그래.
  블라디미르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

  에스트라공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0 -  


 

  

 계속되는 무의미한 대화

이들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부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발 벗는데 생기는 고통을 한 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무안한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단추나 제대로 끼우라고 반격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에게는 부조리한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이 대화가 진행된다.    

 

 

  에스트라공  (약한 소리로) 좀 거들어줘!

  라디미르  아프냐? 
  에스트라공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블라디미르  (화를 내며)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에스트라공  너도 아팠냐?

  블라디미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에스트라공  (집게손가락을 가리키며) 그렇다고 단추까지 안 끼고 다닐 거야 없지 않아? 

  블라디미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참 그렇군. (단추를 채운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2 -

 

그리고 이들은 미지(未知)의 인물을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대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하나의 막이 끝날 무렵에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2막이 시작되면 1막과 같은  

장소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재회한다. 1막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자마자  

동문서답과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되며 2막에서도 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가 곁에 있어도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고도’에 대한 상징성은 다양하다.
작가는 고도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독자나 관객들에게 고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직접 무대를 보는  

관객들도 무형(無形)의 고도를 기다리게 하는 참여성의 효과를 주고 있다.  
 

고도가 희망 또는 자유이며, 현대인의 상실한 목적의식 등 다양한 해석이 많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블라디미르가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에스트라공이며, 반대로  

에스트라공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라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만나면  

티격태격한다. 대화는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주는  

원인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서로 친하지 않는 이들이  

굳이 만나서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에게는  

서로서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희망이자 행복인 '고도'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희망과 행복이 우리 삶 가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또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 되지도 않을 복권에  

매달리거나 돈만 많이 모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부조리한 현실에 매몰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블라디미르  너는 속으로는 반갑지? 안 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01 - 
 

 

 둘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2막이 끝나가는 부분에서는 이번에도 고도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되고 다음 날에도  

고도를 기다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은 다음에 올 때는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가 막바지로 갈수록  두 인물의 

심리 변화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블라디미르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트라공의 ‘끈’이 부조리한 삶에 사는  

두 인물이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나?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져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중략)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58 -

 

만약에 사무엘 베케트가 또 하나의 막, 3막을 만들었다면 이 두 사람을 죽게 되는 결말을  

선택했을까?  고도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못 만나면 죽겠다는 말은 거짓된 한탄뿐이다. 연세 드신 분들이 가끔 ‘빨리  

죽어야 편하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 날에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이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에스트라공의 ‘끈’은 자신과 블라디미르를 연결해줌으로써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매개체이다. 다음 날에 끈을 가지고 옴으로써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부조리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가려는 일상인들의 생존력이기도  

하다.   
 

 

 기다리다 지친다

<사기열전> ‘소진열전’에 미생(尾生)이라는 인물의 일화가 나온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오지 않았지만 미생은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서 다리 밑의 물이
불어나는데도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 장소인 다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결국 그는 넘쳐나는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소진은 미생의 일화를 인용하여
자신의 신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장자> ‘도척편’에서는 도척은 미생의 행동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후세에 미생은 미련하게 약속을 지키는 융통성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런 약속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고 하게 된다.

고도를 향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도 어떻게 보면 ‘미생지신’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며 부질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고도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리고 미생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질없는 존재나 일에 대해서 큰 미련을 갖는 버릇이 있다.  

복권을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여러 번 구입해도 언젠가는
꼭 1등에 당첨되리라 믿는 사람, 2PM의 노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 기다리다가 
지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희망과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으며 아무리 상대방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지만 상대방은 당신을 알아주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믿는 외곬들이 자기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주위를 둘러보아라. 우리가 바라는 희망과 행복은 어쩌면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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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정말 별 시나리오를 다 쓰면서 괴로워했는데.. 그 고도가 고도를 말함이 아닌걸 알아도..아마도 그때부터 우리말이
지니는 동음이의적 표현에 더욱 환상마저 갖으며....ㅎㅎㅎㅎ어렸던..내가..

cyrus 2015-01-22 15:40   좋아요 0 | URL
이거 완전 오래 전에 쓴 글에 댓글을 남기시다니, 부끄럽습니다. 꼭 벌거벗은 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ㅎㅎㅎ 이때가 이 작품이 독자(관객)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제 맘대로 생각하면서 글로 끼적거렸던 시절이에요. ^^

[그장소] 2015-01-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비밀인데..알라딘 램프가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서 찾아줘요..묶은 글..찾아..이것도 네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어때?..이러는 거죠..진짜예요..(-_ど) 어때..? 그치?? 거봐..좋아할줄 알았다니까...이런다니까요...신기하게.

cyrus 2015-01-22 20:02   좋아요 0 | URL
북플에 `읽고 싶은 책` 추천글 말하시는군요. 신기하네요. 5년 전의 글을 보여주다니.. ㅎㅎㅎ

[그장소] 2015-01-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닌데..그렇게 찾은것은..ㅎㅎ
스마트폰도..북플도 초보라서..뭘 움직이는지 통모르고 주사위를 던지는지도 모르죠..ㅎㅎ
그냥..아..이 책 좋았지..싶으면..그다음..이렇게.글이 떡..와요..읽다보면..헉..시간이 역순하고 있음을..아는..거죠..cyrus님이 글이 예전것..이라 말 하지않았다면..실감도 채 못할..만큼..^^! 마법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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