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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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리한 관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처음으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맨 처음 제목 속의  

‘고도(Godot)’가 땅에서 하늘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고도(高度)’ 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고도’는  사람 이름이었다. 작품 내용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두 인물의 상황을 그린 것이다. 제1막부터 보게 되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이 두 사람이 작품 속 주인공들이며 고도를 기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막부터 이들은  이름 모를 시골길에서 만나게 된다. 이 두 인물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직업인지 알 수 있는 상세정보는 없다. 다만 에스트라공의 ‘공(公)’이 공작의 지위인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로 보아서는 블라디미르보다는 높은 계급에 추측할 수 있다.  

1막의 대화 속에서도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나으리’라는 단어와 높임말을  

쓰는 대사가 딱 한 번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부조리극인만큼 에스트라공의  

공작이라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친구처럼 대화를 하지만  

의미 없는 대화일 뿐이다.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거까지고 티격태격  

말다툼하며 괜히 지나가는 럭키와 포조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계급의 차이를 떠난 친한 친구 사이라고 말하기에는 보기 어렵다.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그런 알고 지내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아니, 또 너로구나!  

  에스트라공  그래서? 
  블라디미르  다시 만나니 반갑다. 아주 떠나버린 줄 알았는데. 
  에스트라공  나도 그래.
  블라디미르  우리가 다시 만난 걸 어떻게 축하한다?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나,  

                      껴안아줄게. 
 

   에스트라공에게 손을 내민다.

  에스트라공  (짜증스럽게) 조금 있다가. 조금 있다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0 -  


 

  

 계속되는 무의미한 대화

이들의 대화는 가면 갈수록 부조리의 진수를 보여준다.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블라디미르는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리어 신발 벗는데 생기는 고통을 한 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무안한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에게 단추나 제대로 끼우라고 반격하고 있다.  

결국 이 두 사람에게는 부조리한 면이 있으면서도 서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이 대화가 진행된다.    

 

 

  에스트라공  (약한 소리로) 좀 거들어줘!

  라디미르  아프냐? 
  에스트라공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블라디미르  (화를 내며)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에스트라공  너도 아팠냐?

  블라디미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에스트라공  (집게손가락을 가리키며) 그렇다고 단추까지 안 끼고 다닐 거야 없지 않아? 

  블라디미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참 그렇군. (단추를 채운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1막 p 12 -

 

그리고 이들은 미지(未知)의 인물을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의미한 대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하나의 막이 끝날 무렵에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2막이 시작되면 1막과 같은  

장소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재회한다. 1막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자마자  

동문서답과 의미 없는 대화는 계속되며 2막에서도 그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가 곁에 있어도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는 ‘고도’에 대한 상징성은 다양하다.
작가는 고도의 정체성을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독자나 관객들에게 고도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독자나 직접 무대를 보는  

관객들도 무형(無形)의 고도를 기다리게 하는 참여성의 효과를 주고 있다.  
 

고도가 희망 또는 자유이며, 현대인의 상실한 목적의식 등 다양한 해석이 많이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말하자면 블라디미르가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에스트라공이며, 반대로  

에스트라공이 만나고 싶어 하는 고도는 블라디미르라는 것이다. 이들은 서로 만나면  

티격태격한다. 대화는 별 의미 없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만나게 해주는  

원인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고도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서로 친하지 않는 이들이  

굳이 만나서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에게는  

서로서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존재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기다리는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희망이자 행복인 '고도'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희망과 행복이 우리 삶 가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가족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과 노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또는 희망을 찾기 위해서 되지도 않을 복권에  

매달리거나 돈만 많이 모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부조리한 현실에 매몰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블라디미르  너는 속으로는 반갑지? 안 그래?  

  에스트라공  뭐가 반가워? 
  블라디미르  날 다시 만나서 말이다. 
  에스트라공  그럴까?
  블라디미르  그렇다고 해봐,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에스트라공  뭐라고 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나는 반갑다>라고 해봐.
  에스트라공  난 반갑다.
  블라디미르  나도. 
  에스트라공  나도.
  블라디미르  우린 반갑다.
  에스트라공  우린 반갑다. (침묵) 그래 반가우니 이제 무얼 한다?
  블라디미르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참 그렇지.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01 - 
 

 

 둘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2막이 끝나가는 부분에서는 이번에도 고도가 오지 않음을 알게 되고 다음 날에도  

고도를 기다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은 다음에 올 때는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대화가 막바지로 갈수록  두 인물의 

심리 변화가 나타난다. 에스트라공은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블라디미르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트라공의 ‘끈’이 부조리한 삶에 사는  

두 인물이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에스트라공  정말 내일 또 와야 하나?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그럼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져 오자.  

  블라디미르  그래.
  에스트라공  디디.
  블라디미르  왜?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중략)  

 

  블라디미르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제2막, p 158 -

 

만약에 사무엘 베케트가 또 하나의 막, 3막을 만들었다면 이 두 사람을 죽게 되는 결말을  

선택했을까?  고도가 영영 오지 않더라도 이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고도를 못 만나면 죽겠다는 말은 거짓된 한탄뿐이다. 연세 드신 분들이 가끔 ‘빨리  

죽어야 편하지.’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 날에 고도를 기다리기 위해서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이 둘은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에스트라공의 ‘끈’은 자신과 블라디미르를 연결해줌으로써 존재하게  

만들고 있는 매개체이다. 다음 날에 끈을 가지고 옴으로써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의지는 부조리하고 각박한 삶 속에서도 살아가려는 일상인들의 생존력이기도  

하다.   
 

 

 기다리다 지친다

<사기열전> ‘소진열전’에 미생(尾生)이라는 인물의 일화가 나온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미생은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오지 않았지만 미생은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서 다리 밑의 물이
불어나는데도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 장소인 다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결국 그는 넘쳐나는 물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소진은 미생의 일화를 인용하여
자신의 신의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장자> ‘도척편’에서는 도척은 미생의 행동은  

어리석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후세에 미생은 미련하게 약속을 지키는 융통성 없는  

사람을 가리키게 되었으며 이런 약속을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고 하게 된다.

고도를 향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도 어떻게 보면 ‘미생지신’의 양면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기다림은 살아가는데 중요한 일도 아니며 부질없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알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고도를 만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리고 미생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질없는 존재나 일에 대해서 큰 미련을 갖는 버릇이 있다.  

복권을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여러 번 구입해도 언젠가는
꼭 1등에 당첨되리라 믿는 사람, 2PM의 노래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못 잊어 기다리다가 
지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희망과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으며 아무리 상대방이
보고 싶고 사랑한다지만 상대방은 당신을 알아주지도 않는다. 결국에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 고지식하게
믿는 외곬들이 자기 스스로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주위를 둘러보아라. 우리가 바라는 희망과 행복은 어쩌면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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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1-2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정말 별 시나리오를 다 쓰면서 괴로워했는데.. 그 고도가 고도를 말함이 아닌걸 알아도..아마도 그때부터 우리말이
지니는 동음이의적 표현에 더욱 환상마저 갖으며....ㅎㅎㅎㅎ어렸던..내가..

cyrus 2015-01-22 15:40   좋아요 0 | URL
이거 완전 오래 전에 쓴 글에 댓글을 남기시다니, 부끄럽습니다. 꼭 벌거벗은 제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ㅎㅎㅎ 이때가 이 작품이 독자(관객)에게 무얼 말하고 싶은지 제 맘대로 생각하면서 글로 끼적거렸던 시절이에요. ^^

[그장소] 2015-01-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비밀인데..알라딘 램프가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서 찾아줘요..묶은 글..찾아..이것도 네가 좋아할 스타일이야..
어때?..이러는 거죠..진짜예요..(-_ど) 어때..? 그치?? 거봐..좋아할줄 알았다니까...이런다니까요...신기하게.

cyrus 2015-01-22 20:02   좋아요 0 | URL
북플에 `읽고 싶은 책` 추천글 말하시는군요. 신기하네요. 5년 전의 글을 보여주다니.. ㅎㅎㅎ

[그장소] 2015-01-22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닌데..그렇게 찾은것은..ㅎㅎ
스마트폰도..북플도 초보라서..뭘 움직이는지 통모르고 주사위를 던지는지도 모르죠..ㅎㅎ
그냥..아..이 책 좋았지..싶으면..그다음..이렇게.글이 떡..와요..읽다보면..헉..시간이 역순하고 있음을..아는..거죠..cyrus님이 글이 예전것..이라 말 하지않았다면..실감도 채 못할..만큼..^^! 마법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