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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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47] 베니스에서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 예술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화가와 음악가들. 

우리는 그들을 통틀어 Artist. 즉, 예술가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거나 ‘거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거나 식음전폐까지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집중력을 쏟아낸다. 예술적인 집중력이 발휘하게 되면 예술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지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성격은 괴팍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심리상태는  

전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하게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되면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지속되는 영감(靈感)의 부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별나면서도 정상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에게는 별도로  

‘기인(奇人)’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기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는 남다른  

행동과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게 마련인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행동을 가지고 ‘기인’이라고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인 예술가들은 그런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 스스로 떳떳하게 인정하고 다니는 정말  

‘기인’다운 기인 예술가들 더러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런 삶을 보면  

불가사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예술에 대해서 집념이 아닌 집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다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만 짊어져야 하는 특수한 운명인 것일까?  

 

 

 토머스 만, 소설가 아센바흐, 예술가로서의 기질

유명한 문학 작가들은 독특한 예술가들의 실제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을 쓰거나 그런 그들의  

삶과 예술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도 예술가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작가들도 상상력을 요하는 문학이라는 예술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라면 가지게 되는 독특한 기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에게 이런 주제가 참으로 흥미로웠을 것이다. 작가, 위대한 예술가, 독특한 기질. 이런 삼박자 

를 고루 갖춘 문학작품이라면 아마도 토마스 만의『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토마스 만은 세계대전 당시 양심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던 독일의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센바흐 또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작품 속  

소설가는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아센바흐는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런 행동과 기질은 흡사 동성애자와 같다. 재미있게도 아센바흐라는 독특한  

인물을 가공한 토마스 만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토마스 만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즐긴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세계 문학사 사상 동성애 커플로 유명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서 말년에 불우하게 산 오스카 와일드 등이 유명하다. 음악가들은  

동성애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생상(피겨 선수 김연아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연기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던 <죽음의 무도>의 작곡가)은 서양 음악사상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특히 생상은 스스로 ‘남색꾼’이라고 자처했으며 토마스 만처럼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통해서 작곡의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예술가들 중에서 왜 동성애자가 많은지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동성애적 코드도 예술가들에게만 드러날 수 있는 독특한 기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간과하기 쉬운 아센바흐의 예술가다운 기질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아센바흐가 타치오에게 매혹되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베네치아에서 

까지 따라와 결국에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 제목인 ‘베네치아에서 

의 죽음’은 주인공 아센바흐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전체상 동성애적 코드가 다분히  

드러나 있지만,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동성애적 예술가의 일생이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중편소설, 그리고 독일의 위대한 지성이라는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센바흐를 동성애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주장일  

뿐이다. 원래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숨겨진 동성애적 본능이 

타치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자칫 동성애자라는 오명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 

나타나있는 아센바흐의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특히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아센바흐의 성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화자의 서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 조숙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는 명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중략) 그는 고등학생일 때 벌써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에 그는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명성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고, 짧은 편지글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신뢰를 주는 작가인 그에게 많은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호의를 베풀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익혔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298 -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명망(名望) 있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명령을 하고 이에 대해 고통을 안기는 행동이 미덕의 진수라고 여긴다. 자신이  

생각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엄격한 자기통제를 건다.

  그가 그러한 재능에서 비롯된 과제를 가냘픈 두 어깨에 떠안고 앞으로 계속 나아 

  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극도의 규율이 필요했다. (중략)  그는 가슴과 등에  

  찬물을 끼얹으며 아침 일찍 일찍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원고지 머리말에 놓인 은촛대에 한 쌍의 기다란 초를 밝히고, 오전에 열정적이고도  

  양심적인 두서너 시간 동안의 수면으로 비축해 둔 힘을 예술에 전부 쏟아 부었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300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  

하지만 아센바흐도 너무 과한 예술가적 기질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작품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자기통제 뒤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지천명(知天命)’ 50세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젊음의 혈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처럼 인간 아셴바흐도 점점 나이가 들면 예전의 예술적 재능이 퇴화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 중반기 작품들이 후반기 작품보다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와 대표작들은 대부분 재능의 물이 올랐을 젊은 시절 때에 쓴 것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작품 구상이 이전보다 진전이 없다는 것은 예전보다 창작 능력이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이미 상실해버린 젊음, 즉 혈기왕성했던 창작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통해서 갈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집념이 결국에는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베네치에에 오면서까지 타치오를 쫓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걸지도 못한다. 즉, 타치오는 고차원적인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아셴바흐는 

눈 앞에 그토록 좋아하던 타치오가 있으면서도 말을 걸어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치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게 되는데 결국에는 예술가들이 가지게 되는 열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었을 때의 예술적 재능을 찾기 위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보인 아센바흐는 

도리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재능의 불씨마저 꺼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좌절감과 동시에 작품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괴로움 끝에 자살하는 예술가와 다름없는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센바흐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시 중에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와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 뜻풀이를 하면 하얀 산발의  

미친 사내)가 물에 빠져 죽자, 백수광부의 아내도 따라 죽는 것을 본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여옥에게 가서 알려주었더니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에 맞추어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 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전문, 출처: 위키백과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은 아센바흐의 넋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딱 알맞다. 아센바흐는  

타치오를 보기 위해서 기어코 곤돌라를 타고 죽음의 땅 베네치아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리고  

원통하게도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센바흐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비록 이상적인  

예술의 실현을 이루지 못한 부질 없는 집착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마지막 여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여정은 예술가인 아센바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아센바흐는 심장 속에 숨어 있었던 예술적 본능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도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여도 어색하지가 않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그는 미소년을 쫓아다니는 동성애적 소설가가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고자 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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