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나무의 비밀
레오 페루츠 외 지음, 오용록 옮김 / 이유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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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그는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만나서 생긴 사생아다.” 오스트리아의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버그(Friedrich Torberg, 1908~1979)는 동료 작가인 레오 페루츠(Leo Perutz, 1882~1957)를 이렇게 평가했다페루츠와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두 사람은 보험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페루츠는 오스트리아에 정착해 작가 활동을 하다가 독일 나치(Nazi)의 탄압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페루츠의 소설들은 한동안 잊히다가 작가 사후에 독창적인 환상 문학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망고나무의 비밀(Das Mangobaumwunder, 1916)은 국내에 처음 소개된 페루츠의 장편소설이다. 페루츠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지원했지만, 근시로 인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예비군이 되어 군사 훈련을 받았고, 이 무렵에 망고나무의 비밀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 겸 극작가인 파울 프랑크(Paul Frank)가 공동 필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1915년에 소설이 완성되었다.


망고나무의 비밀은 동양에 대한 서구의 호기심과 취향즉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반영된 소설이다오리엔탈리즘을 논할 때 주로 언급된 분석 대상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나온 문학 및 예술 작품들이다하지만 실제로 북유럽과 동유럽에서도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했다.[주] 오리엔탈리즘은 페루츠가 활동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였고, 동양을 소재로 한 소설과 예술 작품들이 나왔다. 


키르히아이젠 박사는 동양에서 자란 식물에 관심이 많은 독극물 전문가다. 등산가로 유명한 포그 남작은 전문의가 아닌 박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남작의 요청을 수락한 박사는 남작의 저택을 방문한다. 남작의 저택 안에 동양에서 온 식물들로 가득한 온실이 있다. 그런데 남작은 엉뚱하게도 온실에서 일하는 인도인 정원사를 진료해달라고 요구한다. 인도인 정원사는 독사에 물려 사경을 헤맨다박사는 독사가 동양에 서식하며 유럽에 한 번도 들여온 적이 없는 희귀종임을 확인한다. 박사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작을 의심하고, 독사가 어떻게 남작의 저택에 있는지 궁금해한다박사는 나름 추리를 해보지만, 남작의 비밀에 접근하는 박사의 모습은 탐정이라고 보기 어렵다작가는 그에게 불가사의한 현상의 비밀을 밝히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았다


망고나무는 남작의 온실에 있는 식물이다. 박사는 남작의 외동딸 그레틀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두 사람은 망고나무에 사랑의 징표를 새긴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사는 신비로운 주술의 힘이 부녀(父女)와 온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주술의 힘이 밝혀지면서 박사와 그레틀의 결혼은 무산된다.


박사는 동양의 식물을 엄청 좋아하지만, 풍토병이 두려워서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작은 젊은 시절에 인도를 여행하면서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심취한 인물이다. 하지만 힌두교 전통 주술의 무시무시한 힘을 확인한 이후부터 동양에 열광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한다박사와 남작의 오리엔탈리즘 속에 공통적으로 동양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동양에 매료된 오리엔탈리스트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양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박사가 동양의 풍토병을 두려워한다면, 남작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동양의 신비주의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오리엔탈리스트가 생각하는 동양은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미지의 세계이다유럽인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실제로 가본 적이 없는 동양을 바라봤다. 유럽에서의 동양은 인간이 사는 세계가 아닌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환상적이고 무시무시한 소재로 소비되었다.


망고나무의 비밀은 당대의 유행이 반영된 통속 소설이라서 페루츠의 대표작으로 꼽기 어렵다. 게다가 공동 집필한 작품이라서 페루츠의 문학적 능력을 가늠할 수 없다. 소설을 쓴 페루츠 또는 프랑크가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역자가 번역을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번역본에 사실과 맞지 않은 내용이 있다.

 

 

* 208

 

 나는 힌두교 승려들이 파르바티 여신을 기리는 성대한 의식을 보려고 하루 더 아그라에 머물렀죠. 파르바티는 비슈누의 부인으로 물고기 눈을 가진 여신이오.

 

 

파르바티(Pārvatī)는 파괴의 신 시바(Shiva)의 아내이다. 파르바티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유지의 신 비슈누(Vishnu)와 함께 힌두교 3대 신(Trimūrti)으로 추앙받는다.

 

 

 


[] 존 맥켄지, 박홍규 외 옮김,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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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03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사 크리스티와 프란츠 카프카가 결혼이 가능할까요????? 아니 사생아라고 했나? 그것도 좀 불가능할 것 같은데..... ㅎㅎ

cyrus 2021-03-03 14:59   좋아요 0 | URL
국내에 번역된 페루츠의 소설이 <망고나무의 비밀>을 포함해서 총 세 권이에요. 그런데 이 세 작품만 가지고 페루츠가 사생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요. ^^;;

smellslikeyou 2021-03-04 0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사생아란 얘기가 아니라 두 작가의 특징을 모두 연상시키는 소설을 썼다는 뜻의 비유적인 표현이에요. <망고나무의 비밀>은 저도 별로였고 다른 두 작품을 추천합니다.

cyrus 2021-03-04 08:41   좋아요 0 | URL
<스웨덴 기사>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앤드루 포터(Andrew Porter)의 소설집을 읽은 김영하 작가와 달궁인들은 포터의 대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약칭 빛과 물질’)에 찬사를 보냈지만, 나는 호평 일색이 좋게 보이지 않았다.


















[달의 궁전 2월의 책]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문학동네, 2019)





빛과 물질의 화자인 헤더는 대학생이다. 헤더는 서른 살 연상인 물리학과 교수 로버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다. 헤더는 로버트가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집으로 초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로버트를 의심하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나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는 듯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아래쪽을 흘끗 내려다보는 살짝 불안한 습관이 이상하게도 내 자신감을 북돋워주었다. 강의실 밖에서는 얘기라곤 나눠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이미 핏속부터 편안하고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농담을 주고받기 쉬운 나이 많은 남자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앞에 두고 부끄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무해한 존재가 되는 그런 남자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이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중에서, 90~91쪽)



타인을 쉽게 믿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호의를 의심할 정도로 각박해진 요즘 현실을 생각하면 로버트의 초대에 선뜻 응하는 헤더의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다내가 헤더의 정서적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지난달에 읽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단편소설 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궁리, 2021)




맨스필드의 소설에 나온 영국인 가정교사는 독일에서 일하게 되어 그곳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탄다. 그런데 가정교사는 혼자 외국에 가본 적이 없고, 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정교사 소개소에 일하는 여자가 독일에 가려는 가정교사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에게 충고한다.



 “나는 항상 여자들에게 누군가를 믿기보다는 처음에는 의심하는 게 낫다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악의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게 선의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말해주곤 해요좀 너무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영악하게 세상물정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죠?”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55~56)



가정교사는 자신이 난감한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도움을 준 친절한 노인에게 호감을 느낀다. 노인은 자신의 명함을 가정교사에게 건네준다. 명함에 적힌 노인의 직업은 참사관(Regierungsrat, 공무원)이다. 노인의 정체를 파악한 그녀는 그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노인의 초대를 받아 그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간다. 집안일을 하는 가정부를 제외하면 노인도 로버트 교수처럼 혼자 사는 남자다. 노인은 가정교사 앞에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그는 가정교사에게 키스 한 번 해달라고 요구한다. “나이 든 남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린 가정교사중에서, 74) 노인은 강제로 가정교사에게 입맞춤하고, 깜짝 놀란 그녀는 밖으로 도망친다.


누군가를 믿기 보다는 의심하라. 가정교사 소개소 직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타인에 향한 의심의 눈길이 그 사람의 참된 모습과 진심을 훼손하는 흉기가 돼선 안 된다. 세상 물정을 잘 아는 영악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많다. 그중 몇몇은 본심을 숨긴 채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영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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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3-02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리뷰는 여러모로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구려

cyrus 2021-03-02 17:12   좋아요 0 | URL
타인을 언제까지 의심해야 하고, 그 의심을 언제 거둬야할지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계속 의심만 하다가는 타인의 진심을 못 볼 수 있거든요.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에야 진심을 뒤늦게 확인할 때가 있어요. 아무튼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아요. ^^;;

수이 2021-03-02 17:1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마음이 제 마음입니다

stella.K 2021-03-02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앤드루 포터는 좀 호불호가 있는 것 같아.
나의 경우 몇몇 단편은 나름 괜찮았는데
나머지는 지루해서 걍 중고샵에 팔아버렸지.ㅋ

cyrus 2021-03-02 17: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제가 괜찮게 본 앤드루 포터의 소설은 <구멍>, <피부>, <코네티컷>이었어요. ^^
 
카르밀라 - 태초에 뱀파이어 소녀가 있었다
조셉 토마스 셰리든 르 파뉴 지음, 김소영 외 옮김 / 지식의편집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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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박혜영 님 보세요.

 

역자님의 글 마지막에 있는 남성 십자군에 의해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라는 문장(295)은 제가 2019년에 썼던 표현(“남성 십자군”,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과 비슷합니다.

 


*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여성이 아니다] 2019826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55237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저는 2019년에 작성한 글을 절대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서 책의 별점을 낮게 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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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작가 레 파누(Le Fanu, 르 파뉴 또는 레 파뉴라고 부르기도 한다)공포문학의 대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미국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문학 비평집 공포문학의 매혹(Supernatural horror in literature, 1927)에 레 파누의 이름만 언급했다무슨 이유에서인지 레 파누가 쓴 작품을 단 한 편도 소개하지 않았다.


















* 르 파뉴 카르밀라(지식의편집, 2021)


평점: 3점   ★★★   B

 

 

* H. P. 러브크래프트 공포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




 

레 파누의 대표작은 카르밀라(Carmilla, 1872). ‘카르밀라뱀파이어(Vampire)로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이다. 이 작품은 브램 스토커(Bram Stoker)드라큘라(Dracula, 1897)에 영향을 주었다레 파누는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인 1872년에 단편집 <In a Glass Darkly>를 발표했다. 이 책에 총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렸는데, 그중 한 편이 바로 카르밀라<In a Glass Darkly>에 수록된 녹차(Green Tea, 1869)는 종종 카르밀라》와 함께 언급되는 소설이다.

















 

*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마로니에북스, 2017)




 

<In a Glass Darkly>는 동서양 고전을 집대성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문학적으로 가치가 있다. 뱀파이어 문학 작품의 계보에서 차지하는 카르밀라》의 위상은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비슷하다. 다음 내용은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1에 있는 <In a Glass Darkly>(우리말 제목은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의 설명문이다.



 이 작품은 사악한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실렸다가, 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간행되었다. 각각의 이야기는 화자인 독일인 외과 의사 마르틴 헤셀리우스의 환자 사례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야기들을 묶어 통일된 화자의 역할을 하는 헤셀리우스는 자신이 목격한 어둠에 일관성과 명확성분석과 진단과 묘사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것이 레파뉴의 의도였다면 이 책은 실패작으로 보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어떤 이론도 확립되지 못하며, 어떤 의미도 발견되지 못한다. 대신 이야기들은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끈질기고 오싹한 창조물들에 의해 결합된다. 이들은 잔인한 판사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희생자[1]부터 목사의 머리를 통해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는 상상할 수 없는 악의에 찬검은 원숭이[2]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건 간에, 흔들리지 않는 의지에 차서 자신의 목표물을 좇는다. 그러나 남자를 홀리는 흡혈귀 레즈비언 카밀라(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가장 잊을 수 없는)의 예에서 보듯, 이들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도 지니고 있다. 카밀라는 영혼이 아닌 육체의 망령으로, 후에는 쾌락과 증오, 육체적 흥분과 혐오를 동일 선상에 놓는 흡족한 눈동자로 화자를 빨아들인다. 레파뉴는 이제껏 보지 못한 공포와 욕망으로 우리 자신의 망령들을 가장 현대적이고 사라지지 않는 유령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보여준다.




 

[1][2]밑줄은 내가 표시했다. [1]하보틀 판사(Mr. Justice Harbottle, 1872)의 줄거리이며 [2]녹차의 줄거리다. 올해 1월에 나온 카르밀라번역본(지식의 편집)하보틀 판사녹차가 수록되었다.
















 

 

* [e-Book] 르파뉴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올푸리, 2020)

 

 


하보틀 판사는 레 파누가 185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을 새롭게 고쳐서 쓴 작품이다

















*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 2006)

 

* [품절] 르 파뉴 카르밀라(초록달, 2015)

 


 

카르밀라는 다양한 제목으로 여러 차례 번역되었는데, 뱀파이어 문학 작품 선집인 뱀파이어 걸작선에도 수록되었다. 2015년에 초록달 출판사카르밀라번역본을 펴냈다. 그러나 그 책에 실린 녹차에 일부 문장이 누락되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 번역이 좋지 않다.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최근에 나온 지식의편집 출판사카르밀라번역본 출간 소식이 반갑긴 한데, 이 번역본에도 오역과 역주의 오류가 있다.




※ 《죽은 연인이 수록된 번역본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지만지, 2013)

 

* [품절]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소설(민음사, 2010)

 

* 이규현 엮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프랑스(창비, 2010)

 

*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책세상, 2006)

 

 

 

번역자와 지식의 편집출판사는 카르밀라최초의 여성 뱀파이어로 소개했다(초록달 출판사도 책 앞표지에 카르밀라를 최초의 여성 뱀파이어라고 소개한 문구를 넣었다). 뱀파이어 문학 작품의 계보를 제대로 확인했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카르밀라는 최초의 여성 뱀파이어가 아니다. 카르밀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한 소설들이 몇 편 있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소설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죽은 연인(La morte amoureuse, 1836)이다. 이 소설의 영문 제목은 클라리몽드(Clarimonde)’. 클라리몽드는 소설에 나오는 여성 뱀파이어의 이름이다.

 

 




* 카르밀라(지식의편집) 중에서, 53

 

 그는 누렇고 까맣고 자주색이 섞인 옷을 입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끈과 벨트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벨트에는 온갖 물건들이 달려 있었다. 등에는 환등기와 흰독말풀이 담긴 상자 두 개를 지고 있었다.

 

[원문]

 

 He was dressed in buff, black, and scarlet, and crossed with more straps and belts than I could count, from which hung all manner of things. Behind, he carried a magic lantern, and two boxes, which I well knew, in one of which was a salamander, and in the other a mandrake.



 

흰독말풀은 가지과의 한해살이풀에 속한 식물이다. 흰독말품과 같은 식물로 잘못 알려진 맨드레이크(mandrake)는 가지과의 여러해살이풀에 속한다. 두 개로 갈라진 형태인 맨드레이크의 뿌리는 사람의 하반신처럼 생겼다. 과거 유럽인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가 만드라고라(mandragora)라고 하는 정령이라고 믿었다. 뿌리에 정령은 존재하지 않지만, 정령의 이름은 맨드레이크의 학명(Atropa mandragora) 속에 있다. 몇 몇 역자들은 맨드레이크를 흰독말풀로 옮기는데, 정확한 명칭은 ‘맨드레이크.


 


* 하보틀 판사(지식의편집) 중에서, 262

 

 카웰 부인은 갑작스럽게 고인의 이야기를 들추어낸 것에 대해 소리를 지르며 비난했고, 보란 듯이 눈물을 터뜨렸다네. 평소라면 하보틀 판사가 유쾌하게 수도꼭지 터진 것 같다.’며 놀렸겠지만, 그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

 

[원문]


 Mrs. Carwell squalled on this sudden introduction of the funereal topic, and cried exemplary “piggins full,” as the Judge used pleasantly to say. But he was in no mood for trifling now, and he said sternly.

 

 

‘piggin’은 수직으로 된 손잡이가 달린 통이다.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물을 담을 수 있다. “piggins full”을 직역하면 ‘(무언가를) 가득 채운 통이 되는데, 역자는 수도꼭지 터진 것 같다로 의역했다.




* 하보틀 판사(지식의편집) 중에서, 281

 

 아이스쿨라피우스(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리스의 의학과 치료의 신역주)의 후예였던 헤드스톤 박사는 그런 우는 소리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네.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는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라틴어 이름이다. 둘 다 동일한 존재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 ‘아이스쿨라피우스는 로마 신화에 언급되는 이름이다. 따라서 로마의 의학과 치료의 신이라고 써야 한다.


















* 모니크 위티그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 (행성B, 2020)


평점: 4점   ★★★★   A-





카르밀라는 남성을 유혹하는 여성 뱀파이어라기보다는 레즈비언 뱀파이어에 더 가깝다. 나는 2019년에 카르밀라의 정체성을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보는 이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여성이 아니다] (2019826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55237




이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의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글을 참고했다. 이듬해에 모니크 위티그의 에세이 선집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가 출간되었다.










지식의 편집출판사가 내 글을 볼지 모르겠으나, 출판사와 역자의 행태에 유감스럽다. 나름 정성 들여 쓴 독자 서평에 있는 문장을 허락 없이 도용하는 일은 지식의 편집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 썼던 표현(‘남성 십자군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이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책 소개 글역자의 말에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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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7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든 파티 - 캐서린 맨스필드 단편선 에디션F 6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정주연 옮김 / 궁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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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점


4점   ★★★★   A-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 때 총을 묘사했으면, 그 총은 무조건 발사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작가 체호프(Anton Chekhov)는 이야기꾼이 복선을 활용하지 않으면, 복선에 몰입한 독자를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복선으로 활용된 문학적 장치를 체호프의 총이라고 한다. 복선은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때로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 변화를 더욱 부각해준다


영국에서 활동한 뉴질랜드 출신의 작가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는 체호프의 영향을 받은 단편소설을 남겼다. 캐서린은 동성 연인인 폴란드 작가를 통해 체호프의 단편을 접하게 된다. 1910년 초에 캐서린은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개작한 이야기를 썼다. 아마도 캐서린은 습작기를 보내면서 복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체호프의 필력에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차 한 잔(A Cup of Tea, 1922)가든파티(The Garden Party, 1922)와 함께 반드시 거론되어야 할 캐서린의 대표작이다(번역본 후미에 수록 작품의 원제명이 있다제목 옆에 적힌 연도는 집필 연도이자 처음 소설이 발표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 서평에 적힌 연도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근거로 한 발표 연도이다차 한 잔체호프의 총이 있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 속에 역설적인 결말로 이끄는 복선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 로즈메리 펠(Rosemary Fell)은 결혼한 부르주아 여성이다. 그녀는 앤티크 상점에 마음에 드는 작은 에나멜 상자를 발견하지만, 비싼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서 구매를 포기한다.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로즈메리는 최고급 차를 마시면서 씁쓸한 순간을 잊으려고 한다. 행색이 남루한 스미스(Smith)라는 여자가 로즈메리에게 갑자기 다가와서 차 한 잔 값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은 로즈메리는 스미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한다. 로즈메리의 남편은 낯선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로즈메리의 행동을 꾸짖으면서도 스미스가 예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미스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부탁한다. 로즈메리는 스미스에게 관심을 보인 남편의 태도에 충격을 받는다. 남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로즈메리는 스미스에게 현금을 주고 돌려보낸다그녀는 남편에게 앤티크 상점에 진열된 작은 상자를 사도 되냐고 허락을 구한다. 남편은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지만, 로즈메리는 작은 상자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쁜 아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작은 상자는 로즈메리가 소유하고 싶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복선이다. 나는 이 문학적 장치를 맨스필드의 작은 상자라 부르고 싶다. 캐서린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야기 속의 소품을 잊지 않았다. 캐서린은 이야기 초반부에 묘사한 상자를 결말에 다시 언급한다. 남편은 상자를 갖고 싶은 로즈메리를 돈 잘 쓰는 우리 자기라고 부른다독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상점의 작은 상자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로즈메리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작은 에나멜 상자는 로즈메리의 소유물이 되지만, 결말을 전체적으로 보면 로즈메리는 남편의 소유물이다.


차 한 잔이 독립적인 존재로 살지 못한 여성의 상황을 그린 소설이라면, 죽은 대령의 딸들(The Daughters of the Late Colonel, 1921)은 주체적이고 욕망 있는 삶을 살지 못한 여성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 소설이다죽은 대령의 딸들은 가부장적 분위기에 짓눌려 살아온 자매이다어린 가정교사(The Little Governess, 1915)는 여성 혼자서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없는 세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소설로 읽힐 수 있다. 가정교사가 겪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과장된 허구가 아니라 오늘날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들이다. 


이 단편 선집에 수록된 브레헨마허 부인, 결혼식에 가다(Frau Brechenmacher Attends a Wedding, 1910),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Je ne parle pas français, 1917), 서곡(Prelude, 1918), 뜻밖의 사실(Revelations, 1920)은 국내 초역 작품이다. ‘Prelude’전주곡을 뜻하는 단어다. 역자는 우리말 제목을 서곡(overture)’으로 정했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캐서린의 소설에 관심 있는 학자와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으려면 하나로 통일된 소설 제목으로 불러야 한다. 나 같으면 프렐류드라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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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2-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 책 처음 나온 거 아니지?
암튼 설 잘 지내라. 맛있는 것도 마이 묵고.ㅋㅋ

cyrus 2021-02-12 11:54   좋아요 0 | URL
네, 맨스필드의 단편 선집의 가장 흔한 제목이 ‘가든파티’에요. 누님도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막시무스 2021-02-1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마음이 무거우시겠지만 설명절은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cyrus 2021-02-12 11:57   좋아요 0 | URL
위로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위독할 정도로 크게 편찮지 않아요. 위장에 있는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요. 이틀 입원하고 퇴원해요. 그런데 현재 혹의 상태가 악성이라면 심각해요. 그런 최악의 진단 결과가 안 나오길 바랄 뿐입니다. 막시무스님도 설 연휴 잘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