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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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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끌리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 완독을 할 겸 남미 계열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칠레 태생)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제목이 참 독특하다.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다?  왜 노인이 연애소설을 읽는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을 결정적으로 읽은 이유는. . . 책의 분량이 얇았기 때문이다. 사실 도서관에서 두 권 짜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최후의 유혹』과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사이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지 많이 고민을 했다. 결국 얇은 책을 좋아하는 나쁜 습관(?)을 이기지 못해 세풀베다의 짧은 책을 선택했다.  

  
 자연을 지키려는 인간 vs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아마존의 숲에서 홀로 사는 안토니오 노인이다. 그리고 노인과의 갈등 구도를 맺고 있는 인물이 뚱보 읍장이다. 그는 아마존 개발에 앞장 서는 권력자로 등장하며 노인과 반대로 자연의 위대함을 모른다. 이야기 초반에보면 아마존의 독거 노인인 안토니오 노인은 초라하고, 읍장이라는 직책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뚱보의 기세는 당당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안토니오 노인이 뚱보 읍장의 사냥 수색대에 합류한 뒤부터는 이야기에서 읍장은 점점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어간다. 질퍽한 늪지대를 지나가는데 노인이 알려준 늪지대를 수월하게 가는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자신은 수색대의 우두머리라고 큰소리치며 절대로 그런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걷지 않는다고 똥고집을 부린다. 노인의 말을 따르지 않은 읍장은 결국에는 가다가 넘어지게 되면서 수색대원들마저도 그를 비웃고 만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무조건 자연을 인간의 생존을 위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정치 권력자의 속물 근성을 세풀베다는 은밀히 조롱하고 있다.  

 자연 vs 인간, 싸움의 미학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갈등은 안토니오 노인과 암살쾡이 사이의 갈등이다. 사실 루이스 세풀베다 이전 세계문학들을 살펴보면 자연 대 인간이라는 골자로 하는 작품이 몇 편 있다. 허먼 멜빌의『백경』의 에이햅 선장 대 흰 고래 모비 딕,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에서의 노인 대 청새치, 상어 떼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굴복하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두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의도는 과감하게 자연과 대결하는데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에이햅 선장이 모비 딕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깊은 바다에 빠져 죽어도, 고생 끝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들에게 다 뜯긴 채 노인이 집으로 돌아와도 결국 자연은 자신에게 패배한 두 인간의 존엄성을 빛나게 해주는 배경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오히려 반대이다. 노인과 암살쾡이의 1 대 1 대면과 대면 후 결과는 긴장감보다는 엄숙미가 느껴진다. 사람을 해친 암살쾡이의 습성과 자취를 파악할수록 노인은 짐승의 힘과 용기에 경탄하면서 둘 중 하나는 살아남게 되는 최후의 대결을 준비한다. 노인에게는 암살쾡이를 죽여서 자신은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암살쾡이의 두 눈을 통해 자신과의 대결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는 확연한 의지를 읽게 된다. 노인과 암살쾡이에게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인간 대 자연. 당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으며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은 이 둘은 어쩔 수 없이 운명의 순리로 마주치게 된 것 뿐이다. 

결국 안토니오 노인은 암살쾡이와의 사투 끝에 살아남는다. 비록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다. 죽은 암살쾡이의 시체를 흐르고 있는 아마존 강에 떠내려가게 함으로써 암살쾡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노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연애소설을 읽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나게 된다. 노인의 안식처는 아마존의 자연을 상징한다. 암살쾡이를 죽였어도 아무 일 없다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애소설 읽기에 매달리는 것은 그냥 자연 속에 몸을 맡겨 본능적으로 살려는 자세이다. 노인이 살고 있는 광활한 아마존에는 인간의 손길을 거치치 않은 자연의 원시성을 간직하고 있는 동물들이 많이 있다. 노인의 암살쾡이 사살은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승리자인마냥 도취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가 무의미하며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는 승자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에 맷돼지와 말벌이 살게 된 이유

아무리 암살쾡이가 인간들을 무참히 죽였다지만 정작 암살쾡이가 인간들을 향한 살기를 드러낸 이유는 자연에 해를 가하려는 인간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암살쾡이 입장에서는 총을 들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연을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암살쾡이가 어쩔 수 없이 날카로운 어금니와 발톱을 인간들에게 향한 것은 사필귀정이다. 

 
간혹 뉴스을 보게 되면 도심 한복판에 야생 맷돼지가 돌아다닌다거나 사람이 사는 집에 말벌 떼들이 커다란 벌집을 틀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소방대원들이 동원되어 맷돼지는 사살되고, 벌집은 가차없이 파괴된다. 인간의 눈에는 도시 속에 있는 맷돼지와 말벌은 우리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만 비춰질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시에 살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다. 단지 살고 싶은 보금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존재가 쉽게 노출되는 인간의 보금자리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을 도시로 불러들이게 한 것은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는 인간의 행위가 만든 현상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는 못된 사고와 행위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리지지 않는 한 자연 파괴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만은 우리 인간들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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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열린책들 세계문학 82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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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86] 향수

 

 

 

 

『향수』에 대한 기억 속의 향수(鄕愁) 
 

오랜만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걸로 포함하면 총 네 번째이다. 최근에 읽었던 때가 군 복무 시절이다. 군 생활 다 꿰뚫고 있다는 신의 계급(?) 병장 때는 말년 휴가를 가기 전까지 주말을 포함한 하루하루가 지루함의 연속이다. 그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낙은 부대에 마련한 작은 독서실에서 책 읽는 것이었다. 그 곳 책꽂이 에서 하얀 책표지가 없는 구판으로 출간된『향수』가 눈에 띄었다. 집에도 구판으로 나온 책이 있었고 오랜만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 책을 보게 되니깐 책 제목처럼 갑자기 집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은 향수(鄕愁)가 느껴지고 그 밖에 옛날 이 책과 관련된 사춘기 시절의 조그마한 추억들도 떠올랐다.

이 책을 처음 구입하고 읽었던 때가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 때 샀던 구판의 겉표지는 지금과 다르다. 구판은 흰색 바탕에 아르누보 형식의 무늬가 있다. 지금의 개정판은 그르누이에게 체취를 빼앗긴 채 희생당한 여인 중의 한 명인지 아니면 향수에 취해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문학적 위상이 높아진 지금은 ‘열린책들 문학전집’ 시리즈 중의 하나로 나오고 있다. 학교에서 이 책을 읽었을 때 책 제목의 부제 때문에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주위에 친구들은 이 책을 추리소설로 오해를 하기도 했으며 몇 몇은 왜 이런 암울한 제목의 책을 읽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오해가 다 책 표지에 ‘살인자’라는 제목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읽게 되었는데 그 때 교실은 남녀공학이었고 짝꿍은 여자였다. 짝꿍은 머리도 좋아서 공부도 잘하고 나름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가 읽은『향수』를 그 친구가 읽을 수 있게 빌려준 기억이 있다. 그 친구에게 짝사랑한 감정은 없었지만 이성이 내가 읽고 있는 책에 관심을 가져준 것 자체가 내 인생으로서는 처음이었기에 특별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은 그 애가 이 책을 완독하지 못한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실『향수』의 딱딱한 전개와 문장은 여자들이 끝까지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조그만 참고 읽었더라면 이 책의 뛰어난 작품성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더 씁쓸했던 것은 그 아이가 성적 관리를 위해서 공부에 집중하다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었다.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입시 위주의 학교 공부에 매달려야만 하는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중학생 시절의『향수』와의 첫 만남은 충격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무고한 25명의 소녀들을 해하는 과정은 냄새에 집착하는 그르누이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고, 사형을 받기 전에 완성된 향수를 바르고 사형장에 등장하자 그 곳에 모인 시민들이 집단 성관계를 맺는 장면은 세상을 무아지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르누이 향수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결말에도 향수의 위력은 그르누이의 잔혹한 죽음으로 몰고 간다. 향기에 취한 부랑자들이 한 순간에 식인종으로 돌변하여 그르누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장면은 여태까지 읽었던 문학 작품들의 주인공의 최후 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특성 없는 남자

  

비록 첫 만남은 소설 속 자극적인 설정과 장면에 치중하였지만 몇 번 반복해서 읽어보니 이제는 그런 설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그르누이가 왜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는지 충분히 이해할만 했다. 그 끔찍했던 행동들은 잃어버리고 있었던 인간적인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에 TV 프로그램에서 아기들은 엄마의 모유를 정확히 알아맞힌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기들의 감각 능력은 성인으로서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데 특히 후각이 발달하여 엄마의 모유 냄새를 알아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르누이는 일반적인 아기들보다 더 우월한 후각 능력을 가졌을지 모른다. 아기였을 때부터 냄새를 맡기 위해서 유난히 조그마한 코를 벌름거리는 것이 전에 그르누이를 사랑스러워 했던 테리에 신부가 한 순간에 혐오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불행하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가슴을 품어보지도 못했고 모유도 먹어보지도 못했다. 그르누이의 어머니는 그를 썩어가는 선 조각 더미에 버리고 도망간다. 자궁 속에 갇혔던 아기들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품 안에 안기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애 처음 느껴보는 동시에 그 아기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로 인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그르누이는 그런 고귀하고 행복한 특권을 누리기 못했다. 자신의 체취를 가지지 않은 그르누이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 존재 받지 못하는 그냥 살아 숨만 쉬는 특성 없는 인간이었다.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탐욕스럽게 유모의 젖을 빨고 심하게 코를 벌름거렸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르누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맡는 순간이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천사와 같은 아기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악마의 아기로 보았다. 
  

 

 ‘인간’이 되지 못한 '향수의 신' 그르누이 

 

그르누이가 추구했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향수는 자신의 잃어버린 체취. 즉,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자아의 결정체이다. 결국에는 처형당하기 직전에 그르누이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바른 채 등장한다. 드디어 자신을 경멸했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게끔 매혹시켜버린다.

 

  따뜻한 인간적 영혼도 없이 오로지 반항심과 역겨움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작은 키에 구부정한 모습, 절름발이에 추한 얼굴로 보기만 해도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가, 외모와 마찬가지로 내면 세계 역시 괴물인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데  

  성공한 것이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구판, p 358 -

하지만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는 너무나 훌륭했던 나머지,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인간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가 향수의 신이 되고 말았다. 25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죽이면서까지 향수를 완성했건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증오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르누이는 자신에게 향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혐오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자신만을 위해 만들었던 향수가 25명의 소녀들에게 빼앗아 섞어 만든 조잡한 향수에 불과하다는 것과 이 향수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체취가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커다란 절망감을 빠지게 된다.

  그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다. (중략)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이날은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수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면을
  쓰면 얼굴이 없는 것과 같아서 그는 완전히 무취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구판, p 360~361 -

몸에 남은 향수의 향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공기 중에 증발되고 만다. 그가 만든 위대한 향수는 일시적이나마 상실된 자아의 단점을 커버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봉책이었다. 결국 사형장에서 보여준 그르누이의 모습은 온 몸에 잠시 겉돌고 마는 향수 냄새와 같은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자아의 가면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채 특성 없는 간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인간적인 향기를 지닌 사람

 

그르누이가 살았던 17~18세기 유럽에는 향수를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치장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히 자신의 몸에서 나는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향수를 뿌렸다. 당시 17~18세기 유럽은 위생 관리가 취약했던지라 아무리 잘 사는 왕이나 귀족일지라도 몸에 악취가 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결한 냄새를 드러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향수의 성분 특성상 몸에 나오는 악취를 제거할 수가 없다. 악취와 향수의 향기가 결합되어 오히려 더 이상한 냄새만 나올 뿐이다. 지금은 상대방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혹은 이성을 매혹시켜 사랑을 받기 위해서 향수를 애용한다. 그 중에도 자신의 정확한 체취를 알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남에게 드러내기 싫은 체취를 가리기 위해서 자신이 향기에 취할 정도로 남발한다그러다보니 그르누이처럼 자신의 진실한 체취를 알지 못한 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의 주제와 내용에 관련이 없는 결론이지 인간적인 향기를 지닌 사람이란 바로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따스해져 오는 사람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소박한 사람 
  

   - 이정하향기로운 사람』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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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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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5]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계속 되는 일본 극우파의 망언 
  

오늘은 65주년을 맞은 광복절이다. 며칠 전에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우리나라 과거사를 사죄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이번 광복절은 우리에게는 의미가 깊다. 한일 과거사의 민감한 화두인 한일 

합방 조약의 무효와 종군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담화 내용에 반영하지 않았지만 어두웠던 한일  

과거사의 터널을 벗어나 양 나라의 동반자 관계를 새로이 구축하는 긍정적인 첫걸음이었다.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말이 있듯이 한일 과거사는 한 번에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사를 

 직시하려는 일본 정부의 실천 노력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번 담화문을 통해서 한일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앞으로 한일 과거사 해결에 진전이 보일 것으로 예상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일부 일본 극우파들은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빗댄 어록이
있을 정도로 한국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로 유명한 구로다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이 이번에도 

우리나라 광복절에 맞춰 망언 한 마디 남겨주셨다. 우리나라의 광복은 자주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일본의 세계대전의 패망 따른 역사적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예전에 어느 일본의 보수 

정치인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서 철도와 공장을 세워 한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해줬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극우파들의 망언들은 하나같이 과거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필연적인 

역사라고 정당화 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의 망언  

 

볼테르의 철학소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소설 제목의 동명의 주인공의 모험을 통해서  

모든 세상은 최선의 세계이며 필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캉디드의 스승인 팡글로스 박사는 라이프니츠를 대변하는 인물 

이다. 그의 대화에는 “모든 것은 최선의 상태에 있다”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올 정도로 열렬한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제자인 캉디드는 이름 글자 그대로 팡글로스 교수의 주장을 믿으며 현재의 

상태는 가장 옳다고 믿게 된다. (그의 이름 Candide는 프랑스 어로 ‘순박하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순진한 사내 캉디드는 사촌 퀴네콩드를 사랑지만 숙부에 의해서 쫓겨나고 만다.  

그때부터 그의 험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가는 곳마다 전쟁, 지진, 종교재판, 고문을 겪는다.  

캉디드가 불행에 처한 상황에 몰릴 때마다 팡글로스 박사는 눈치 없이 깨방정을 떨면서 낙관주의 

적인 말을 하고 다닌다. 화산이 일으키고 지나간 포르투갈 리스본의 참혹한 현장에 대해서 팡글 

로스 박사는 망언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에 있는 화산은 다른 곳에 있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사물은 현재 있는 곳 이외의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 볼테르『캉디드 혹은 낙관주의』p 33 -   

한술 더 떠 세상에서 일어나고 일들은 다 필연적인 현상이며 리스본에 있어난 화산과 지진도  

당연히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말은 정말 박사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나 논리적이지 않는 말이다. 팡글로스 박사의 말에는 리스본에만  

화산이 발생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리스본에만 화산이 일으킨다는 보장은 없다. 화산과 
지진과 같은 자연 재난은 리스본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이탈리아, 아이슬란드 등 다른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는 화산은 리스본에만 발생했을뿐, 다른 곳에는 화산이 일으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리적인 추론을 거부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마는 '나태한 귀납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팡글로스 박사처럼 지금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고  

상대방의 생각을 무시하다보니 논리적 오류에 빠진 말을 하기도 한다. 만약에 21세기에 팡글로스 

박사가 살아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한 국가적인 재난 사고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네티즌들의 뭇매질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8.15와 일본의 8.15의 사정  

소설 속 팡글로스 박사의 모습은 남의 입장을 살펴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  

극우주의자를 떠오르게 한다. 팡글로스 박사가 생각하는 ‘최선의 세계관’은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우리나라가 일본에 지배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정당화시키는 사고방식과 유사하다. 그들은 일본의 

지배가 한국이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식이었으며 한국의 독립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팡글로스 박사가 귀납적 추론을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망언에도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광복절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자주 독립국으로 전환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의 8월 15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공식 선언한 날이다. 

인류의 대재앙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A급 전범들은 그들에게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신’이다. 그래서 2006년에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우리나라 광복절에  

강행한 것은 상대국인 우리나라의 입장을 고려 하지 않은 잘못된 역사적 낙관주의가 만든  

그릇된 행동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지켜나가야 합니다

수많은 고난의 여정 끝에 캉디드는 퀴네콩드와 팡글로스 박사와 재회하게 되고 그들과 함께 농장 

을 꾸려 산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캉디드는 불행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여정을  

계기로 세상은 꼭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팡글로스 박사는 여전히 낙관주의 

를 고집하고 있다. 작품 마지막 부분에 그는 캉디드에게 이전에 경험했던 불행한 일들이 아니 

었으면 지금의 행복한 시간은 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캉디드는 스승에게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 볼테르『캉디드 혹은 낙관주의』p 200 -

캉디드는 온갖 비참한 체험과 사회적 불합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개선에 의욕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좋든 나쁘든 돌아가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떻게 생각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하고 있다.

올해는 65주년 광복절뿐만 아니라 한일합방 100주년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서 

일본 총리의 과거사 사과 담화문 발표뿐만 아니라 한일 학자들이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공동 

선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이 이전보다 한일 간의 과거사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수탈한 한국의  

문화재 반환 등 과거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보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태도에  

대해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이번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문이 이전처럼 한국의 비위를 맞춰 

주기만 했던 립서비스였는지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한일 학자의 한일합방 무효  

공동선언은 단순히 한일합방 100주년을 기념하는데 의의를 두지 말고 이번 선언을 계기로 한일  

학자들 간의 정기적인 연구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 단순히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말로만 사과 

하는 것을 기다린다고 해서 과거사를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일본의 태도가 긍정적이다고 해서  

과거사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낙관적인 전망은 금물이다.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  

근대사는 어떻게 보면 기억하기 싫은 역사적 상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국사의 한 부분 

이므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어두웠던 역사를 배움으로써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으며 어긋나 있는 일본 간의 관계도 개선할 수 있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협력적으로 과거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역사의 밭이 어딘지 알고  

스스로 알고 지켜나가는 것이며 일본 역시 낡은 역사적 낙관주의를 폐기시키고 한국과 함께  

역사의 밭을 가꾸는데 협력적인 자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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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20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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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47] 베니스에서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 예술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화가와 음악가들. 

우리는 그들을 통틀어 Artist. 즉, 예술가라고 말한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탄생한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거나 ‘거장’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도 얻는다. 하지만 대부분  

예술가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거나 식음전폐까지 마다하지 않는 무서운  

집중력을 쏟아낸다. 예술적인 집중력이 발휘하게 되면 예술가들은 신경이 예민해지게 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가들의 성격은 괴팍하고 까다롭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심리상태는  

전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하게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되면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지속되는 영감(靈感)의 부재,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 자살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떤 예술가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별나면서도 정상적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에게는 별도로  

‘기인(奇人)’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기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보다는 남다른  

행동과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가지게 마련인데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격과 행동을 가지고 ‘기인’이라고  

불러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기인 예술가들은 그런 자신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 스스로 떳떳하게 인정하고 다니는 정말  

‘기인’다운 기인 예술가들 더러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런 삶을 보면  

불가사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그렇게 예술에 대해서 집념이 아닌 집착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우리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다거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만 짊어져야 하는 특수한 운명인 것일까?  

 

 

 토머스 만, 소설가 아센바흐, 예술가로서의 기질

유명한 문학 작가들은 독특한 예술가들의 실제의 삶을 모티브로 하여 작품을 쓰거나 그런 그들의  

삶과 예술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시와 같은 문학 작품을 쓰는  

작가들도 예술가이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작가들도 상상력을 요하는 문학이라는 예술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예술가’라면 가지게 되는 독특한 기질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에게 이런 주제가 참으로 흥미로웠을 것이다. 작가, 위대한 예술가, 독특한 기질. 이런 삼박자 

를 고루 갖춘 문학작품이라면 아마도 토마스 만의『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일 것이다.  

토마스 만은 세계대전 당시 양심적인 지성으로 손꼽히던 독일의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아센바흐 또한 소설가이다. 그리고 작품 속  

소설가는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질의 소유자이다. 아센바흐는 미소년 타치오에게  

반하게 된다. 그런 행동과 기질은 흡사 동성애자와 같다. 재미있게도 아센바흐라는 독특한  

인물을 가공한 토마스 만도 동성애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토마스 만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동성애를 즐긴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두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세계 문학사 사상 동성애 커플로 유명한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동성애 
스캔들로 인해서 말년에 불우하게 산 오스카 와일드 등이 유명하다. 음악가들은  

동성애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생상(피겨 선수 김연아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연기 배경 음악으로 사용했던 <죽음의 무도>의 작곡가)은 서양 음악사상 널리  

알려진 동성애자이다. 특히 생상은 스스로 ‘남색꾼’이라고 자처했으며 토마스 만처럼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통해서 작곡의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예술가들 중에서 왜 동성애자가 많은지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동성애적 코드도 예술가들에게만 드러날 수 있는 독특한 기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간과하기 쉬운 아센바흐의 예술가다운 기질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아센바흐가 타치오에게 매혹되어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던 베네치아에서 

까지 따라와 결국에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설 제목인 ‘베네치아에서 

의 죽음’은 주인공 아센바흐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 전체상 동성애적 코드가 다분히  

드러나 있지만,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동성애적 예술가의 일생이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문학사적으로 유명한 중편소설, 그리고 독일의 위대한 지성이라는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센바흐를 동성애자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주장일  

뿐이다. 원래 그는 동성애자가 아니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숨겨진 동성애적 본능이 

타치오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발현되었을 뿐이다. 자칫 동성애자라는 오명 때문에 정작 작품 속에 

나타나있는 아센바흐의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놓칠 우려가 있다. 특히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다. 아센바흐의 성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화자의 서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사실 조숙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는 명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중략) 그는 고등학생일 때 벌써 명성을 얻었다. 10년 후에 그는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 명성을 관리하는 법을 익혔고, 짧은 편지글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신뢰를 주는 작가인 그에게 많은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호의를 베풀고, 

  이를 중요하게 여기는 법을 익혔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298 -   


그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운명이 예술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명망(名望) 있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의 삶을 택하게 된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명령을 하고 이에 대해 고통을 안기는 행동이 미덕의 진수라고 여긴다. 자신이  

생각는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즉,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엄격한 자기통제를 건다.

  그가 그러한 재능에서 비롯된 과제를 가냘픈 두 어깨에 떠안고 앞으로 계속 나아 

  가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극도의 규율이 필요했다. (중략)  그는 가슴과 등에  

  찬물을 끼얹으며 아침 일찍 일찍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원고지 머리말에 놓인 은촛대에 한 쌍의 기다란 초를 밝히고, 오전에 열정적이고도  

  양심적인 두서너 시간 동안의 수면으로 비축해 둔 힘을 예술에 전부 쏟아 부었다.  

   

   - 토마스 만『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홍성광 역, p 300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다  

하지만 아센바흐도 너무 과한 예술가적 기질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작품 창작에  

대한 엄격한 자기통제 뒤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포하고 있다. 그의 나이는 하늘의 뜻을  

알고 있다는 ‘지천명(知天命)’ 50세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젊음의 혈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처럼 인간 아셴바흐도 점점 나이가 들면 예전의 예술적 재능이 퇴화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이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 중반기 작품들이 후반기 작품보다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유와 대표작들은 대부분 재능의 물이 올랐을 젊은 시절 때에 쓴 것이 많은 것도  

그런 현상과 관련이 있다. 작품 구상이 이전보다 진전이 없다는 것은 예전보다 창작 능력이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결국에는 예술가로서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아센바흐는  

이미 상실해버린 젊음, 즉 혈기왕성했던 창작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 아름다운 소년
타치오를 통해서 갈구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술에 대한 집념이 결국에는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베네치에에 오면서까지 타치오를 쫓았지만 결국에는 그에게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걸지도 못한다. 즉, 타치오는 고차원적인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아셴바흐는 

눈 앞에 그토록 좋아하던 타치오가 있으면서도 말을 걸어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타치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죽게 되는데 결국에는 예술가들이 가지게 되는 열망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 젊었을 때의 예술적 재능을 찾기 위해서 지나치게 집착을 보인 아센바흐는 

도리어 콜레라에 걸려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재능의 불씨마저 꺼버리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예술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지지 않음에 대한 좌절감과 동시에 작품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괴로움 끝에 자살하는 예술가와 다름없는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센바흐여, 그 물을 건너지 마오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시 중에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라는 작품이 있다. 작가와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많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백수광부(白首狂夫, 뜻풀이를 하면 하얀 산발의  

미친 사내)가 물에 빠져 죽자, 백수광부의 아내도 따라 죽는 것을 본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여옥에게 가서 알려주었더니 여옥이 공후라는 악기에 맞추어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 속으로 들어가셨네.
  원통해라, 물 속에 빠져 죽은 임.
  아아, 저 임을 언제 다시 만날꼬.

  -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전문, 출처: 위키백과 -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은 아센바흐의 넋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딱 알맞다. 아센바흐는  

타치오를 보기 위해서 기어코 곤돌라를 타고 죽음의 땅 베네치아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리고  

원통하게도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센바흐를 비난할 이유가 없다. 비록 이상적인  

예술의 실현을 이루지 못한 부질 없는 집착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마지막 여정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베네치아 여정은 예술가인 아센바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아센바흐는 심장 속에 숨어 있었던 예술적 본능을 거부하지 않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도 ‘위대한 예술가’라는 칭호를 붙여도 어색하지가 않다.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그는 미소년을 쫓아다니는 동성애적 소설가가 아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고자 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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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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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비극적인 부녀(父女),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남성 유아의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에서 등장하는  

작품 동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남성 유아의 성 정체성 형성을 설명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인물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행위들을 해 버린 그는  

자신의 과오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비극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절대적인 힘에 희생당하여 괴로워하는 인간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닮은 덴마크 왕자 햄릿과 더불어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심리학 용어로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 중에는 오이디푸스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안티고네’이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렸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를 이끌어준 사람이 

유일하게도 안티고네뿐이다. 오이디푸스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게 되어 두 명 다 죽게 된다. 

남은 두 딸, 주인공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만 남게 되었는데 이 때 테베의 새 왕인 숙부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만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법령을 내린다. 안티고네는 숙부의  

법을 거역하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손수 치뤘는데 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남인 하이온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녀를 따라  

자살하였고, 그의 어머니인 에우뤼디케도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로 자기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인간이 만든 법을 거역하고  

신(神)을 따르려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 안티고네.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주변  

사람들의 잇다른 죽음.오랜 옛날, 당시 비극을 관람했던 고대 그리스의 관객들이나  

지금도 이 작품을 읽는 현대인들에게는 두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죽느냐 ‘장님으로’ 사느냐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비극적 운명의 희생양으로 치부하기에는   

뛰어난 작품성에 비하면 낮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오이디푸스는 근친 결혼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있다.  프로이트 때문에 정작 오이디푸스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며 심리학 용어 속의 인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의로운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과오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반(反) 인륜적인 행위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심지어 어머니와 근친혼을 하고 만다.  

우리나라 법 규정상 근친혼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우리나라 법정에 서게  

된다면 ‘존속살해’ 혐의로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 그리고 심하면 사형까지  

처해질 것이다. 비록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정해진 신탁의 운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지만 그는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 왕위에 물러나 테베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이디푸스의 죄가 중범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제대로 죄의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의 죄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떳떳이 인정한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고 심장을 찌르게 되었다면 

죽어서도 신이 정한 운명에 대한 원망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보다 눈을 찌른 그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다. 
 

 

 안티고네의 순결 
 

안티고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보다 수준 높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신만을 따르려는 안티고네는 불의에 맞서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크레온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로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뤼네이케스에게는 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만든다. 크레온의 모습은 사회 현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자기식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잘못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확실한 방법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다. 그러나 부당한 사회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려는 올바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처럼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오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죽음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서 크레온은 ‘정의’로 상징되는 

안티고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형선고 받은 안티고네는 권력자들에게 힘없이  

무너지는 민중의 정의다. 타인의 개입으로서 정의가 사라질 바에 안티고네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정의를 제 손으로 지키려고 한다. 안티고네의 순결은 곧 ‘정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경의는 곧 정의에 대한 경의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크레온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코로스의 대사를 통해 정의에 대한 경의를 모독한  

권력자의 최후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안티고네』천병희 역, p 149 -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안티고네의 의지

어느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회 윤리위원회는 
의원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징계를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원을 고소한  

학생들은 분명히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관련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들을 통해서 허위적인 반론 보도문을  

게재하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놓고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대 개인, 국가 대 개인 등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의 찾기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미미하기만 

하다. 하나의 사회 문제가 자신의 일에 관련이 없다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안일한 태도는 결국에는 시민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누리려는 정치인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정치적 비리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는 

크레온과 같은 인물이 기세등등 날뛸 것이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죽을 때까지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의지.  성숙한 우리나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덕목이다. 문제의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정치인들을 뽑은 시민들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티고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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