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Scene #1  호기심에서 시작된 책의 탄생

 

과학은 어느 시대라도 대중이 손쉽게,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과 과학 이론의 괴리는 갈수록 커지고, 지금은 과학자들끼리도 역사적 발견과 그럴 듯한 사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게 됐으니 참 딱한 일이다.

 

빌 브라이슨은 영국에서 여행 전문기자를 오래 했고 썩 재미있고 이름난 여행책을 여러 권 썼다. 그는 양성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쿼크와 퀘이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과학의 문외한’이었다. 그런 그가 왜 갑자기 500쪽이 넘는 과학서에 도전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오르면서 이 거대한 산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호주 평야에 텐트를 치고 누워 ‘저 수많은 별들은 어디서 만들어져 저렇게 밤하늘에 박히게 되었을까’ 하면서 호기심 어린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번쯤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상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우주는 얼마나 큰 세계이며 그 끝은 어디인가.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지구의 생명체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는 이 긴 여행이 끝나고 돌아가면 정말 궁금한 것들, 여러 가지 근원적인 호기심들에 대해 과학자들이 내놓은 답들을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이 한 권의 책이 탄생하게 됐다.

 

 

 

 Scene #2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한 과학 안내서     

     

저자의 호기심이 너무나도 많은 탓일까. 아니면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행자의 기질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것일까. 쿼크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지구 이야기로 돌아오는 등 내용의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방향타를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을 위해서 빌 브라이슨은 과학 도서들을 탐독하고 자료를 수집할 정도로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과학이라는 광범위한 지대를 안내하기에는 ‘과학 여행가이드’로서는 아직 서툰 면이 있다. 브라이슨이 인용하고 참고한 책들은 당장 서점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 과학 저술가가 쓴 것들이다. 좀 더 깊이있는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이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 브라이슨이 인용한 참고도서를 읽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표나 사진 한 점도 없으니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끝까지 읽어나가는 내내 머리가 아프게 느껴질지도. 여행을 위한 안내문 혹은 지도라고 할 수 있는 도표와 사진이 없으니 여행가이드 브라이슨의 문장을 잘 쫓아갈 수밖에.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청소년 독자를 위해서 쉽게 쓴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긴 문장 곳곳에 저자의 유머와 재치가 살아 있다. 원자, 상대성 이론, 유전자, 생명의 진화 과정과 그 과학적 발견은 소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양성자는 알파벳 i의 점에 해당하는 공간에 5,000억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런 양성자를 10억 분의 1 정도의 부피로 축소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게 작고 작은 공간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략 30㎚ 정도의 물질을 채워 넣는다고 상상해 보자. 이제 우주를 만들 준비가 된 셈이다.’ ‘지구 45억 년 역사에서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최근에 등장한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하려면 두 팔을 완전히 펴고 그것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책은 크게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생성과 구성, 원자의 발견과 운동, 생명의 탄생과 진화,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 책 이름 그대로 일반인들이 과학과 관련해 궁금해 할만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첫 장에서는 대폭발(빅뱅) 이론과 팽창 이론이 등장하고, 이어 현대 물리학의 기초인 열역학, 양자론, 상대성이론, 소립자와 초끈 이론이 나온다.

 

에세이스트가 쓴 글답게 책에는 인간적인 냄새가 묻어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에 앞서 사람 얘기다. 과학자는 근엄한 공식과 이론을 만드는 전형적 인물이 아니라, 경쟁자의 성공에 배 아파하고 자기 연구결과에 우쭐대며 종종 괴벽을 가진 인물들로 묘사된다. 원자나 태양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그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론 집착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먼저 발견하고도 영어권 저널에 발표하지 않아 인정받지 못한 과학자들에 대한 연민도 잊지 않았다. 그의 과학사에는 승자만이 살아남는 공식 역사에 가려진 약자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배어있다.

 

저자는 다윈과 헉슬리의 동상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외진 커피숍으로 밀어내고 중앙 홀 계단에 서 있는 리처드 오언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공룡’이란 말을 만든 오언이 얼마나 속 좁고 악랄한 화석연구자였는지를 그는 사료를 뒤져 낱낱이 드러낸다. 판 구조론의 원형인 대륙이동설을 주장한 알프레드 베게너가 지질학이 아닌 기상학자인데다 독일인이란 이유로 그의 탁월한 발상을 반세기 동안이나 애써 묵살한 동시대 지질학자들을 마음껏 야유한다.

 

또 과학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대체 과학자들은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특장은 지구의 내부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인들은 교과서에 실린 지구 내부 그림이 외워야 할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아직 지구 내부에 대해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하다. 지표면에 직접 구멍을 뚫기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지구 밀도를 계산하고 지진이나 지자기 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해낸 결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밝힌다.

 

 

 

 Scene #3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 그 무엇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누군가 내게 태양계에 관해 물으면, 툭 튀어나온 대답이 늘 그랬다. 항성(태양)을 중심에 둔 행성의 공전, 자전, 태양 빛을 받는 행성과 위성 간 그림자가 빚는 현상 등 여러 이야기가 대답에 내재됐으되 기계적으로 ‘학창시절에 외웠던 것’을 꺼냈다.

 

과학 선생님께서 외우기 쉬운 방법이라며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직접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에도 나올 거다”는 각인 작업과 함께였다. 명왕성이 행성 자격을 잃었으니 지금은 ‘수금지화목토천해’겠다.

 

뇌리에 ‘그림 한 장’이 떠오른다. 태양을 중심에 둔 채 태양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순서대로 행성을 늘어놓은 그림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본 우주 그림은 속임수다. 종이 한 장에 모든 것(태양계)을 그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속임수.

 

충격이었다. “실제로 상대적인 크기까지 고려해서 태양계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저자의 서술이 부른 충격이라기보다 늘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되뇐 나의 입버릇에 깜짝 놀랐다. 타성,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아 나태하게 굳어진 습성에 놀란 거다. 처음 놀랐을 때는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독거리려 했다. 쪽을 넘길수록 ‘존재, 그 무엇’은 너무 무거워 가슴 깊숙이 가라앉았다. 과학의 방대한 역사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인간은 다만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엄청난 행운을 얻은 생명체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소박한 진실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자들은 자연의 신비 대부분을 밝혀냈다는 만족감에 젖었다고 저자는 기록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인간의 끈질긴 연구와 탐사를 기다리고 있다. 작은 만족과 순간의 좌절에 머무르지 말고 줄기차게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순수의 전조’라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 들판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천국을 본다 /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고 노래한다. 이렇게 한 알의 모래와 한 송이의 꽃을 관찰하고 호기심을 갖게 되면서 과학은 시작되었고 그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과학자들은 자연과 우주의 신비에 감탄한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질문과 상상력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과학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지한 인간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차츰 그것은 극복해야 할 삶의 조건으로 바뀌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학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길고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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