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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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

 

작년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의지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작년에 모 아이돌 여성 그룹 가수의 왕따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 멤버가 다리 부상 때문에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때로는 의지만으로 무리일 때가 있다.”는 글을 남겼다. 그 당시 스무 살도 안 된 멤버는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각종 연예 활동 스케줄에 몸과 정신은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트위터에 정신이 육체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글로 남겼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트위터는 부상으로 쉬고 있는 멤버를 향해서 어떠한 위로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트위터에 “의지의 차이^^ 우리 모두 의지를 갖고 파이팅!” 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의지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에휴 안타깝다” 등의 글을 남겼다.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는 멤버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지 부족으로 보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다. 네티즌들은 특정 멤버 한 사람을 겨냥한 왕따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한순간에 ‘왕따설’ 논란이 일어나게 되자 트위터에 남긴 문제의 해당 글은 삭제되었다.

 

왕따 가해자로 의혹을 받은 가수는 살인적인 활동 스케줄에 지쳐서 힘든 상태를 트위터에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의 시선은 다르게 봤다. 나머지 멤버들은 첫 데뷔를 하면서 지금까지 쭉 아파도 참으면서까지 연예 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기에 막내 멤버의 심경은 ‘의지 부족에서 비롯된 태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의 모습만 가지고 나머지 멤버들의 태도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문제의 멤버가 나쁜 마음을 가진다고 상상해보자.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의지’를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멤버는 특정 멤버의 태도 문제를 근거로 들어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가 있을까? 자유 의지란, 어떠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의지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기 때문에 비도덕적이거나 비이성적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원한으로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나의 살인 행위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의식적 의도를 이유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 근저에 흐르는 사고 속에는 의식적 원천, 즉 '나는 그 사람을 싫으니까 죽이고 싶다'라는 자유 의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 의지가 아니다

 

자유 의지는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 형태이기 때문에 행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유 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신경 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학자. 그는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가정을 반박한다. 자유 의지가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이미 했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그것 대신에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의식적 원천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두 가지 가정만 따져 본다면 자유 의지를 비판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해주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소개하겠다.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은 피실험자들이 손을 움직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갑자기 손이나 손가락을 움직이고 동시에 언제 그 결정을 내리는지 시계를 보고 측정하도록 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손을 움직이겠다는 의지가 발동한 후에 운동피질이 작동하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실혐 결과가 나왔다. 피실험자들의 운동피질이 먼저 활성화된 후에 운동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서 0.3초의 시간 간격을 두고 뇌는 이미 운동을 결정하고, 그 과정이 시작된 후에야 인간은 그것을 깨닫는 과정의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명령하는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사실에 의식한 착각일 뿐이다. 1분 뒤에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뇌에서 미리 결정된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우발적인 행위는 자유 의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유 의지'라는 환상의 역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의지'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자유 의지의 힘으로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과정을 '외재적 요인에 구속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의미와 함께 놓고 본다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의 잣대로 보는 인식의 관점 또한 의문을 제기한다. 자유 의지라는 믿음이 있기에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가해자의 의식적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샘 해리스는 우리가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는 이유를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 가치관, 목표, 편견 등이 반영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면 잘못된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가 급부상함으로써 자유 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뇌가 행동을 결정하는 기관이라면 인간은 더 이상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범죄 행위를 막거나 처벌하는 법적 규범을 다시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 자유 의지의 존립 여부에 대한 문제는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로 적합하나 '도덕적 책임'을 동반한 자유 의지 문제는 한쪽 입장의 손만 들어주기가 어렵다. 우리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 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보는 논리는 위험천만한 주장이다. 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힌 죄에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동등하다. 그래서 도덕적 책임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유 의지 존재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딱 하나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고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하고도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행위의 의사결정이 반드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자신의 책『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이 말을 빗대어 보자면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유 의지’가 만들어 낸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사고와 행동을 위한 미래의 결정을 예측할 수 있다고 과신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자유 의지만으로 완벽한 사람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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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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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과학자는 되고 싶지 않다?

 

 

 

 

 

 

아들: 아빠, 꿈이 뭐였어?

아빠: 천문학자

아들: 그런데 왜 안 했어?

아빠: 어...? 수학이 안 돼서...

아들: 아...

아빠(내레이션): 수학이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모 어린이 학습지 CF 속 대사이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신의 꿈인 천문학자가 되지 못한 이유에 관해서 얘기를 해준다. 그러자 아들은 뇌리를 스치는 질문을 한다. “그런데 왜 안 했어?” 꿈을 왜 이루지 못했느냐는 질문에 그 이유가 나온다. 바로 이유는 수학을 못해서. 그리고는 아들은 짧은 탄식과 함께 아버지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수학이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도록”

 

굳이 수학 때문에 천문학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 광고를 보는 부모 자녀들에게는 일리가 있을 수 있겠다. 그래서 수학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계기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단지 수학을 못한다고 해서 천문학자가 될 수 없는가. 질문의 요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학습의 기초가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과학자가 될 수 없느냐는 것이다. 학습의 밑바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과학자를 꿈꾼다는 것은 질퍽한 진흙 위에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뿐만 아니라 수학 지식의 습득 또한 필수조건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학생의 과학, 수학 학구열은 외국의 학생과 비교하면 실로 엄청나다. 잠을 줄일 정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많은 분량의 학습을 소화한다. 그래서 전 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수학 국제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 학생의 입상 순위가 꽤 높은 편이다. 현재 국제올림피아드 종목은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정보, 천문 등으로 총 7개다. 매회 각 종목의 올림피아드에서 한국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선전에 비하면 이공계열 관련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의 수가 적은 점은 아이러니하다. 작년에 작성된 '공학기술계 우수인력 양성을 위한 조사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공대생들이 갖고 싶은 직업 1위는 의사, 한의사였고, 그다음이 공무원과 금융인이다. 정작 전공을 살려 공학자나 과학자, 기술자가 되겠다는 응답은 3.1%에 불과할 뿐이다. 공대생 10명 가운데 공학과 관련된 직업을 희망하는 학생이 채 1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가 과학을 하는가

 

우리나라 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 위해서는 학습의 노력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과학을 공부할 수 있게 만드는 ‘문화’가 중요하다. 그러한 문화가 제대로 발달한다면 학생들은 과학적 경험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배양할 수 있게 된다. 이공계 학생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진출을 돕기 위한 인센티브 도입 또는 연구 환경 개선 등과 같은 정부의 정책만으로 이공계의 척박한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면서 다방면으로 대중과학을 위해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 중인 로런스 크라우스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과학에 참여시키는 방법 중 하나는 자신들을 과학자처럼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을 과학자처럼 생각하게 만들면 이 사람들은 다른 상황에서도 문제에 더 잘 대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것은 과학 연구의 발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p 262)

 

크라우스는 자신의 직업인 과학자를 지원하는 현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과학자는 고도의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한정된 직업이라고 규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과학, 수학 기초 지식이 어느 정도 습득했다고 해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자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선결 조건이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그 선결 조건을 이루는 중요한 핵심의 근원은 바로 과학적 경험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경험’이란 강제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참여의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 접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을 통해 과학자처럼 생각해보는 과정을 의미한다. 과학 교사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인공 화산을 만들어 실험하거나 눈의 결정체를 사진으로 촬영해서 과제로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교육 활동’ 역시 과학적 경험을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좋은 방식이라고 볼 수 없다. 에디슨, 뉴턴과 같은 호기심이 왕성하면서도 벌써 과학적 사고를 하는 습관이 있는 학생이라면 이러한 교육 활동도 특별한 과학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학생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연구 실습과 과제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편이다.

 

크라우스의 대담자로 나선 디자이너 나탈리 제레미젠코는 적극적 참여로서의 과학적 경험이 축소되어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옳든 틀리든 간에 자신만의 연구와 관찰을 토대로 과학적 사고를 표현하고 형성할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은 정부 및 교육기관은 누가 과학을 하며 또는 어떻게 과학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전문가라는 과학자들을 앞세워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일을 할 뿐이지 대중이 과학에 쉽게 접근, 참여하는 유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와 대중들 간에 세워져 있는 벽이 견고하게 세워져 있는 이상 누구나 과학자가 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은 에디슨의 어머니를 본받아야 한다

 

산업혁명으로 과학과 기술이 끝없이 발전하고 있을 무렵인 1860년대 당대의 물리학자였던 영국의 캘빈 경은 물리학의 발전은 이미 끝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캘빈 경의 낙관적인 믿음은 섣부른 판단이 되어버렸다. 세기가 넘어간 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뉴턴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밀렸으며 양자역학의 등장은 기존의 상식과 자연을 대하는 시각 자체를 완전히 바꿔버린 시발점이 되었다. 지금도 시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과학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복잡성, 네트워크가 강조되는 지금까지도 과학에 관한 관심과 추세가 달라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과학은 캘빈 경의 시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컴퓨터과학, 복잡성 과학 그리고 빅데이터(Big date) 과학 등 학문 분야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과연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네트워크 과학 연구에 이바지한 바라바시가 소개한 일화는 과학에 관한 관심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대중의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 아들은 이제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물었습니다. “달에 가고 싶지 않니?” 아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뇨, 관심 없어요.” 그러나 페이스북과 인터넷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입니다. 웹에도 관심이 많죠. (p 389)

 

만약에 나로호 발사 장면을 실제로 또는 TV 생중계로 본 아이들에게 한번 묻고 싶다. “나로호와 같은 로켓을 만들어 보고 싶지 않니?” 이 질문에 분명 일부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뇨, 관심 없어요.” 이 아이들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에 관해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들이 더 관심을 두는 것은 페이스북과 인터넷이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어린 시절 닭이 알을 품는 과정에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궁금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알을 가슴 품에 안아보는 실험을 했다. 에디슨의 실험은 바보 같은 일이었지만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실험을 반대하거나 크게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왕성한 호기심을 마음껏 풀 수 있도록 칭찬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 폭이 점점 좁아지는 상황 속에서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언한다는 것은 수백 년 전 캘빈 경의 오류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인간성의 해방과 창조성의 발견에 길을 열어 준 새로운 사회의 형성이었다. 과학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과학 참여와 과학적 사고를 철저히 무시하는 사회적 풍토를 버려야 한다. 오늘날 과학자는 에디슨의 어머니를 본받아야 한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과학을 가르치기만 한다면 주입식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교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 과학자들은 자신들 때문에 아이들, 아니 과학자를 희망하는 이공계 학생들의 꿈을 방해하지 않는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대중의 시선으로 과학이 처한 현실을 파악할 줄 아는 혜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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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2-2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에는 패스하렵니다. 꾹 참고 절반을 읽었는데 책을 읽는 것이 즐겁지 않네요. 그래도 읽던 것이 아쉬워서라도 조만간에 서평을 써야겟지요....
 
진화론 산책 - 소설보다 재미있는 진화의 역사
션 B. 캐럴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Biz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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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창조론자 요구에 항복하다

 

지금은 시들었지만 올해 최근에 과학교과서를 둘러싼 창조론과 진화론이 격돌한 적이 있었다. 기독교계 단체인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교진추)는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종(種)이 아니고 말의 진화 계열은 상상의 산물"이라며 교육과학기술부를 대상으로 현행 과학 검인정교과서 내 관련 자료 삭제를 요청했다. 이에 해당 교과서를 펴낸 출판사 일곱 곳 중 여섯 곳은 시조새 부분을, 세 곳은 말 진화 부분을 각각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교과서에서 진화론이 삭제된 것을 놓고 세계적인 과학전문지 <네이처> 온라인판은 '한국,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했다'(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독교 창조론자들의 요구에 항복하는 한국 과학계에 대해서 학문적 차원의 우려와 조롱을 표명하는 기사였다. 창조론의 공격 앞에서 적극적인 반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과학계의 태도는 특정 종교의 교리가 교과서에 반영되는데 일조하고 있다. 진화론이 과학교과서에서 퇴출된다는 사실은 교육적 측면에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진화론에 대한 공격은 다윈이 처음으로 진화론을 주장할 때부터 유래되었던 보수적인 기독교 복음주의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완벽하지 못한 진화론의 틈새를 파고들어 교묘하게 음지의 창조론을 대중들의 관심사로 끌고 들어오고 있다.

 

 

 

 진화론으로 향하는 산책로에서 만난 과학자들

 

 

  

 

 

찰스 다윈에게 큰 영감을 준 독일의 박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 (왼쪽)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윌레스 (중간)

인류 조상의 화석 발굴에 주력하여 진화론을 증명한 네덜란드의 의사 프랑수아 토머스 뒤부아 (오른쪽)

 

 

 

진화론은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 아닌, 반드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핵심적 이론이다. 진화론은 갑자기 하늘에서 한 사람의 머리로 뚝 떨어져서 나온 게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연구를 통해서 얻은 결론들을 종합해서 하나의 전체적인 이론으로 정립되어진 집합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진화론'이라고 하면 대중들은 한번쯤은 이러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진화론을 연구하고 증명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생물학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진화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결정적 원인이 다윈을 포함한 박물학자들의 수많은 모험과 탐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션 B. 캐럴이 쓴 『진화론 산책』을 읽어본다면 진화론이 왜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서는 안 되는 과학적 이론인지 확인할 수 있다. 제목만 본다면 대중들에게 진화론을 소개하기 위해서 쓴 개론서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 선생님처럼 지루하게 진화론을 강의하듯이 설명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인류의 진화 과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학자들의 탐험의 여정을 들려줌으로써 진화론이 증명되는 과정을 보다 쉽고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진화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초보 독자들은 제목대로 '산책'하듯이 가볍게 과학자들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원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  첫 번째 지점, 찰스 다윈

 

진화론으로 향하는 산책로 중에서 아무래도 익숙한 지점은 바로 '찰스 다윈'일 것이다. 다윈이 본격적으로 진화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22세 때 비글 호 항해에 나서기 시작할 때부터다. 다윈이 평생 진화론을 탐구하게 되는 지적 여정의 반은 비글 호 항해 시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애초에 진화를 밝혀내기 위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배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탐험에 동승할 젊은 과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자마자 모험심을 주체하지 못해 비글 호 탐험을 결심했던 것이다. 영국을 출발해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무인도와 호주를 거치는 긴 항해의 여정이었다. 몸이 약한 다윈은 줄곧 배멀미에 시달리다 잠잠할 때를 틈타 해양 무척추 동물을 연구했다. 배가 상륙하면 열심히 화석과 동식물 표본을 수집했다. 파타고니아 섬에서 운좋게 멸종한 거대 매머드 화석을 발견했고, 안데스 산맥에서는 다른 연대의 화석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지층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큰 성과는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핀치의 부리에 주목한 것이었다. 섬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른 핀치의 부리는 훗날 진화론의 토대가 된다. 다윈은 탐험길에서 발굴, 수집한 화석 표본들을 본국에 있는 학자나 생물학회에 보냈다. 이러한 수많은 화석 표본 덕분에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하나하나씩 증명해나갈 수 있었다.

 

 

 #2  두 번째 지점,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

 

재미있게도 다윈이 비글 호 탐험을 통해 화석을 수집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젊은 영국인도 말레이 제도를 중심으로 여행하면서 동물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레스다. 그 역사 다윈처럼 진화의 기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데나 여행을 하면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8년동안 말레이 제도의 수많은 섬들을 여행하면서 표본 수집과 자연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탐사를 통해 월레스도 다윈과는 다른 접근 방법으로 자연선택과 진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3  찰스 다윈과 월레스, 우연히 만나는 교점

 

비글 호 항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다윈은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본격적으로 진화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탐구의 매듭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세상 앞에서 공표하기를 꺼려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창조론을 단 한 번에 뒤집힐 수 있다는 이단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중과 학회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연구 발표를 망설였던 것이다. 그러자 다윈이 주저하고 있던 사이에 월레스는 말레이 제도 여행을 통해서 얻은 진화에 대한 결론을 한 편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놀랍게도 월레스가 쓴 논문의 내용은 다윈이 연구했던 내용과 일치한 내용이 많았다. 이에 다급해진 다윈은 독자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동일한 개념을 착안한 월레스가 진화론을 자신보다 먼저 발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와 함께 공동 저자로 학회에 발표할 것을 제안했다. 이미 전부터 다윈과 교류를 맺고 있으며 순진하고 착한 품성을 지닌 월레스는 다윈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할 획기적인 이론의 발견이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을 못했으며 오히려 관심조차 없었다. 무명의 학자에 불과했던 월레스는 이미 학계로부터 인정받은 다윈으로부터 진화 연구에 대해서 조언을 얻는다거나 그 주제를 중심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월레스에게 다윈이라는 존재는 음지에 가려질뻔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양지로 나오게 해준 '지적 동료'이자 '은인'이었다. 지금은 진화론이라고 하면 월레스보다는 다윈이라는 이 익숙한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윈의 진화론'의 일부는 월레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4  생소하지만 꼭 가봐야 할 지점, 훔볼트와 뒤부아

 

요즘 진화론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다윈과 월레스의 관계가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오랜 세대 걸쳐 이루어진 진화론 탐구의 전체 역사를 감안한다면 일부에 불과하다. 다윈과 월레스가 연구를 위해서 위험한 탐험길에 용기 있게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 훔볼트의 존재가 있기에 가능했다. 독일 출신의 알렉산더 훔볼트는 지리학과 천문학, 생물학, 광물학, 화학, 해양학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 여러 분야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또한 탐험가였다. 남미와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지질과 식생 등을 탐사하고 연구했다. 그 이름은 세계 곳곳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훔볼트는 진화론 탐구에 있어서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지 않았지만 훗날 다윈이 박물학자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다윈이 비글 호에 탑승하며 배멀미를 잊기 위해서 읽은 책이 바로 훔볼트가 쓴 여행기였다. 젊은 다윈은 선배 과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 또한 훔볼트에 비견할만한 위대한 성과를 발견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훔볼트는 젊은 후배 과학자들이 생명의 근원을 찾기 위한 모험의 길에 뛰어들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현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사진

 

 

 

훔볼트가 남긴 위대한 과학의 발자취는 다윈과 월레스에 이어 네덜란드의 의사까지도 따르게 할 정도로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젊고 전도유망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29세의 프랑수아 토머스 뒤부아는 자신의 직업을 과감하게 버리고 동인도 제도로 떠났다. 뒤부아 역시 다윈과 월레스의 진화론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다윈이 예견한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화석을 발견하려고 결심했다. 그야말로 인류의 기원에서 '읽어버린 고리'를 찾고자 하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는 과감하게 가족과 함께 수마트라로 건너가게 되면서 그 곳 일대를 조사하여 화석 발굴에 주력했다. 그러나 열대 지방 특유의 습한 기후와 질병은 엘리트 생활에 익숙한 뒤부아를 괴롭혔다. 그러나 탐구 열정만큼 꺾을 수는 없었다. 수마트라, 자바 일대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탐사한 끝에 뒤부아는 오래된 인류의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뒤부아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라는 학명을 붙였다. 훗날 자바 원인(Java 猿人) 발견의 단서가 되었는데, 동시대의 다른 화석 인류와 함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불리게 된다.

 

     

 

 진화론은 탐구의 열정을 지닌 과학자들의 노고

 

다윈의 등장 이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 속에서 가려졌던 진화의 비밀이 한꺼풀씩 세상 앞에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절대적인 논리를 앞세워 세계를 지배하던 종교계의 거센 반발은 채 10년을 가지 못했다. 신학자들의 논리는 30여년에 걸쳐 자연을 관찰하며 얻어낸 과학자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모든 생물에서 진화가 진행 중이라는 대전제는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까지 미국과 유럽내 일각에서는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거나 창조론을 교과서에 추가해야한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종교계마저 진화론에 맞춰 사상을 재무장하고 있다. 진화론이 위대한 것은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최종 이론'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 탄생의 과정은 생명의 기원을 발견하고자 위험이 도사리는 탐험을 마다하지 않은 과학자들의 노고이다. 오랜 세월동안 쌓아온 이들의 수많은 탐구의 열정들을 생각한다면 진화론이 창조론에 밀려 교과서에서 퇴출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허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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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2-09-2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찰스와 엠마'라는 다윈의 러브 스토리 쟁여놓고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혹~하는 걸요.
날 잡아 트라이투 해봐야겠어요, ㅋ~.
잘 지내시죠?^^

cyrus 2012-09-21 17:1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나무꾼님.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 학교 다니고 있어요. ^^
이 책 어렵지 않습니다. 진화론이 발견되는 과정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태풍이 지나고 난 뒤부터 어느 새 가을 날씨가
찾아왔네요. 아침 저녁이 쌀쌀하니 감기 조심하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2-09-2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훔볼트를 소개하니 반갑습니다.제가 좋아하는 남자입니다.탐험가와 과학자와 문필가의 소질을 모두 가지고 있죠.훔볼트 이름을 딴 해류와 펭귄도 있죠.

cyrus 2012-09-24 16:26   좋아요 0 | URL
저도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옛날에 나온 것 중에
<훔볼트의 선물>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된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자주 다니던 동네 도서관에
인적 드문 지리학 분야 서가에 꽂혀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 책이 나온지 오래되서 그런지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더군요.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정재승의 시네마 사이언스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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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영화 <레인맨>에서 동생 찰리가 자폐증 증세를 보이는 형 레이먼드의 옆을 지켜주지 못한 채 그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가로챘더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주인공이자 강박증 환자인 소설가 멜빈이 인내심이 강한 캐럴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결말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될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운명도 한 순간에 180도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일상생활이나 상식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암기에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의 삶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 한 편 덕분에 자폐증 환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특히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자폐증 환자 레이먼드는 숫자와 언어에서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이라는 개념을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심어놓았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자폐증 환자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강하다. <레인맨>의 레이먼드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완벽한 기억력을 지녔다거나 2005년 세계수영선수권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움으로써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자폐증 수영선수 김진호 씨의 사례를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자폐증 환자들은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를 받고 있으며 환자의 가족들 역시 자폐증 환자를 돌보면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자폐증 환자의 특징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작년 '미국 정신과 저널(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 온라인판에 미국 예일대의대 어린이연구센터의 김영신 교수팀은 한국 어린이 38명 가운데 1명이 자폐증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이나 유럽엣의 자폐증 발생률의 3배 가까운 수치다. 그리고 이번 연구를 통해서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어린이 중 3분의 2가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학교에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원인을 모르고 치료도 받지 않고 있었다. 이런 학생들은 대부분 병의 중간단계인 야스퍼거스 증후군으로 분류되어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조금 달랐다.

 

자폐증은 지적 수준은 보통이지만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과 상호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정서적인 유대감도 일어나지 않는 증후군으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를 보인다. 사회적 교류가 잘 되지 않으며 의사소통이 어렵고 언어 발달이 늦으며 행동상의 문제, 특정분야에만 치우친 관심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자폐증 특유의 성격상 특징은 '서번트 신드롬'이라고 해서 특별한 재능 수준으로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꼭 모든 자폐증 환자들이 '서번트 신드롬'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전체 자폐증 환자 중 약 10% 정도만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신드롬'이란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현상이 전염병과 같이 전체를 휩쓸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자폐증 환자 전체가 뛰어난 암기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자폐증 환자의 특별한 재능 자체를 '신드롬'이라고 규정, 명명하기에는 사실은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심리학계에서는 비상한 재능을 가진 자폐증 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를 '서번트 신드롬'이라는 대중적으로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자폐적 천재'(Autistic savant)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자폐증 환자들의 근본적인 발병 원인이 무엇이며 정신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이들에게 유독 왜 일반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는 '자폐적 천재'를 보이는 걸까?  지금까지도 그 원인에 대해서 수많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원인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자폐 증세의 발병에 작용할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다. 자폐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지금, 자폐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과학자들 그리고 자폐증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가족들이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자폐증이 과연 가족의 유전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다. 자폐증으로 진단받은 아이를 자녀로 둔 부모라면 꼭 가지게 되는 편견 중 하나가 바로 양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를 자폐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 자폐증이 가족의 유전적 요인에 의해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까지는 나쁜 양육 환경과 방식 때문에 자폐증이 발병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폐증은 가족의 유전자에서 이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뇌 구조 자체에서 이상을 일으킨다고 보면 된다. 자폐증 환자의 뇌를 들여다보면 측두엽 안에 존재하는 감정이나 공격성을 담당하는 아미그달라와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부분이 정상인의 뇌에 비해 덜 발달되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강박증 또한 단순히 마음의 병이라기보다는 엄밀히 과학적으로 규명해본다면 뇌의 생물학적 요인이 강박장애 발생과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뇌 영상 연구 결과를 통해서 강박장애에서 특정 신경회로 영역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약물치료 내지는 행동요법치료 후 이러한 영역의 문제가 정상화 됨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래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면 약을 먹지 않고 상담이나 행동치료를 통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사회생활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는 환자가 많다. 일부 민간생명보험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을 들어 보험가입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는 등 사회적인 편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 정신적 장애 환자들을 더욱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 '힐링'(Healing,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힐링' 가운데서도 자연 치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화학적 치료가 부작용이 많다는 점에서 몸이 병을 이기도록 하는 자연 치유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환자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환자의 정신을 좀 더 안정시켜줄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정신 장애 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치료법은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가족들 또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지인들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캐럴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던 멜빈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먼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캐럴이다. 그리고 따뜻하게 먼저 마음을 열어줌으로써 그가 타인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인식하도록 항상 그의 곁을 지켜줬다.

 

이번에 새로 발간한 정재승 교수의 신작은 단순히 영화를 통해서 뇌과학의 세계를 흥미롭게 들여다보고 설명하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고통받고 있는 정신 장애 환자들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인식이 각성되기를 강조하고 있다. 정신 장애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뇌과학의 역할이지만 정신 장애 환자들이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뇌과학이라는 학문이 정신적 약자들을 위한 치유의 과학으로써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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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심비우스 - 이기적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는가? 다윈의 대답 시리즈 1
최재천 지음 / 이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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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육강식, 적자생존', 왜곡된 다윈의 진화론

 

 

 

 

 

자연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작동된다? 

일부 맞는 부분은 있지만 자연의 세계가 꼭 그렇게 강한 자들에게만 유리한 '그들'만의 무대는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하면 약육강식, 적자생존을 떠올린다. 그동안 진화론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다윈가 살던 19세기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유럽의 힘센 나라들은 세상의 곳곳을 집어삼켰다. 자연 상태에서도 강하고 흉포하며 교활한 자들이 살아남게끔 되어 있다. 강대국의 입장에서는 힘없는 나라를 억누르고 차지하는 것에 대해서 특별한 문제로 삼지 않았다. 만약에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정당성을 반박하는 이가 있었다면 당하는 게 억울하다면 국력을 키우면 될 것이라고 맞섰을 것이다. 이렇듯 다윈의 진화론은 억압과 침략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로 쓰이곤 했다.

 

진화론은 또 20세기 들어 군비경쟁이나 자유경쟁 논리, 우생학, 사회진화론 분야에서 오도된다. 인종 차별과 여성 차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은 진화론적으로 적응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기괴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특히나 '경쟁'을 강조하는 시장자유주의의 현대사회에도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 같은 용어는 그대로 유효하고, 생명 탄생이나 인종 차별, 성차별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진화론 등장 자체가 단순히 과학사를 떠나서 인류사에 있어서 너무나 큰 획기적인 사건임은 분명하고 그 영향력도 인류 전반에 미쳤기 때문이다.

 

사실 이 등식은 다윈의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그의 '성전'을 끼고 세상으로 뛰쳐나간 '전도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실제로 다윈은 그런 용어를 즐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화론에 처음으로 '적자생존'을 도입한 사람이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다. 스펜서는 생물학자가 아니기에 실제로 생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명확히 이해했다기보다는, 그저 생물학 이론들을 차용해 현실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럴듯하게 설명했을 뿐이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생태학자들, 특히 남성 생태학자들은 95%가 자연계의 치열한 경쟁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추세는 달라졌다. 자연계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무조건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이제는 '호모 심비우스'다


흔히 '협동'은 인간만이 가진 고도의 기술이고 동물은 단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를 비추어본다면 오히려 생각했던 것과는 거꾸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시장자유주의의 원리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경쟁의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등바등하게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일부 생물들 중에는 자신과 전혀 다른 종(種)들과 경쟁을 하기보다는 서로 협동하면서 인간 사회보다 더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는 자연의 세계에서 잘 살아남고 있다.

 

현생인류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학명의 어원 속에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의미를 뜻하고 있다. 하지만  최재천 교수는 결코 그 어원처럼 영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연을 잘 이용해 만물의 영장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무차별적인 세계화, 국가간 빈부격차, 환경 오염 등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 문제에 있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는 이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즉 '더불어 사는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한테서 공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호모 심비우스는 공생을 뜻하는 'Symbiosis'에서 착안한 말로 그가 만들어 쓰는 말이다. '함께'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 'syn'과 '삶'이라는 뜻의 'biosis'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동안 최재천 교수의 글을 관심있게 읽어 본 독자라면 용어가 낯설어도 그 의미만큼은 무척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공생', '협조'의 방식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알이 닭을 낳는다』와 같은 대중들을 위한 과학 에세이집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알면 사랑한다'라는 메시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다가 올해 초에 다윈의 진화론를 새롭게 조명한 『다윈 지능』을 통해 '호모 심비우스'라는 새 용어로 정립하여 '공생'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강조하게 되었다. ('다윈의 대답' 시리즈의 첫 번째를 장식하는『호모 심비우스』는 작년 12월에 처음 초판본이 출간되었고『다윈 지능』은 그 다음 올해 1월 초에 출간되었다) 

 

그는 자연계가 수차례 멸절 위기를 겪었음에도 다양성을 회복한 것은 '니치'(Niche), 곧 자기만의 독특한 공간을 갖고 공존해왔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구의 생물 중량 중 으뜸인 것은 식물, 개체수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곤충인데,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을 대신해 곤충이 꽃가루를 날라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으며 공생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는데, 그 속에 아즈텍개미들이 입주하여 산다. 나무는 개미에게 집은 물론 개미들이 선호하는 단백질이 함유된 뮬러체라는 먹이도 제공한다. 개미들은 그 대가로 나무를 모든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이파리를 갉아먹는 모든 초식동물들은 물론 물과 햇빛을 두고 경쟁할 다른 주변 식물들까지 제거해준다. 아즈텍개미와 트럼펫나무는 진화의 역사를 통해 공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p 34~36)

 

 

'니치'를 통한 공생의 생존방식의 대표적인 예가 트럼핏나무와 아즈텍개미의 관계이다. 트럼핏나무는 대나무처럼 속이 비어 있고 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식물로는 드물게 동물성 단백질이 풍부하게 들어 있는 뮬러체라는 물질을 분비해 줄기 내부에 사는 아즈텍개미에게 숙식을 제공한다. 뮬러체는 아즈텍개미가 좋아하는 먹이 중 하나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아즈텍개미는 트럼핏나무를 위한 보답으로 나무 전체를 순찰하면서 온갖 포식동물로부터 보호한다.

 

 

 

 

 

 '공생'이 없는 생태계 = 동반멸종

 

 

 

 

 

생태 피라미드

(그림출처: http://cafe.naver.com/iyh0606/3)

 

 

 

 

생물학 용어 중에 '생태 피라미드'(Ecological pyramid)라는 것이 있다. 생물군에 있어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각 단계의 개체군의 양적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먹히는 동물의 수는 그것을 먹는 동물의 수보다 항상 많다. 따라서, 먹히는 동물을 저변으로 하고, 먹는 동물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형태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생태계 피라미드(또는 먹이 피라미드)라고 부른다. 저변 동물은 초식성이고 소형이며 다수이다. 정점 동물은 육식이고 대형이며 소수이다. 이 피라미드를 구성하는 동물의 한 종류가 멸종하면 '생태계' 피라미드는 무너진다. 이는 곧 자연 파괴를 뜻한다.

 

 

 

 

 

 

개미가 멸종하면 그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동식물들이 줄줄이 멸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이 같은 공생-동반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 최근 보전생물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치밀한 공생관계를 맺으며 엄청난 생물다양성을 이룩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이제 전례 없는 환경 파괴로 인해 그들이 멸종의 길을 걷게 되면서 공생이 동반멸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공생관계를 잘 이용하면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을 복원하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p 94) 

 

 

하지만 단순히 먹고 먹히는 관계로 인해 특정 종이 사라진다고해서 생태계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공생을 통해 살아남은 동식물의 관계가 '환경 파괴'로 인해 어긋나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던 다른 동식물도 멸종하게 되어 생태계 전체가 교란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공생-동반 멸종'(Mutualism coextinction)이라고 한다.

 

부전나비의 애벌레는 다른 나비의 종과는 다르게 개미굴에서 자란다. 개미가 직접 부전나비의 애벌레를 개미굴로 데리고 들어와 일종의 보모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살아있는 애벌레가 개미들이 마음껏 포식할 수 있는 먹잇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생태계를 먹고 먹히는 과정만이 작용하는 세상으로 인식하는 '경쟁'에 익숙한 인간의 머리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다)  부전나비는 개미굴 속에서 개미들의 도움으로 자란다. 부전나비와 공생 관계의 개미가 살기 위해서는 실내온도가 높은 토양에서 군락을 형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풀이 많이 자라지 않으면서 햇볕이 많이 드는 토양이라면 개미뿐만 아니라 부전나비의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러한 공생 관계를 모른 채 점차 개체수가 줄어드는 부전나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식지에 인간과 동물들이 넘나들지 못하게 말뚝을 쳐서 아예 보호관리구역으로 만들게 된다면 부전나비의 수가 늘어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가 않다.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게 되면 서식지에 수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식물들이 자라나게 되면서 햇빛을 받지 못하는 토양의 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개미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환경 상태가 되어버린다. 보호관리구역에 개미가 살 수 없다면 이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전나비 애벌레 또한 생명유지를 보장할 수 없다. 당연히 부전나비의 수가 더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보호관리구역을 해체하고 그 곳에 소나 말을 풀어놓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소와 말이 풀을 뜯어 먹음으로써 토양에 햇볕이 들게 되어 온도가 상승한다. 그러면 그 곳에 다시 개미가 살게 되고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부전나비의 수도 늘어나게 된다.

 

 

 

 

 공생하는 인간이 사회 경쟁력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확실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이기적인 동물로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남을 해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피부색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종교가 다르다고 원수처럼 서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이기적 인간이 얻는 이익은 이타적 인간이 얻는 이익보다 늘 크다. 그러나 이는 결국 소멸, 파괴, 파멸이라는 결과를 남긴다. 그래서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고립된 상태로 주위 생명체를 무시하고 살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공생의 생존 방식을 볼 수 있다. 개미는 진드기를 돌봐주고, 진드기 분비물을 영양분으로 섭취하고 살아간다. 악어새는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 주는 대신 먹이를 얻어먹고 있다. 살벌할 것 같은 동물의 세계도 이렇게 공생의 관계가 많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견해가 다르다고 상대를 증오하는 일이 많다. 진보 세력은 보수 세력이 전부 없어지면 세상에 낙원이 올 것이라 상상하고, 보수는 진보가 사라져야 세상이 평화로울 거라 생각한다. 어떤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자신의 인종만이 단언 우수하기 때문에 지구상에 살아남아야 된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공생할 줄 아는 동식물보다도 생각이 짧다.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인간 세계에만 보지 말고 자연 세계에 한번 들여다봐야 한다. 또, 동물들의 지혜로운 공생관계를 알아 인간 사회에 접목하여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볼 수 없다.

 

'호모 심비우스'는 단순히 공생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만 아니다. '공생'의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온갖 전자기기를 통해 사이버 세상과는 그렇게 잘 공감하는 듯하지만 바로 자기 옆에 있는 친구와는 교감하지 못하는 이러한 '불통'(不通) 사회에 무조건 '공생'을 강조한다는 것은 '우이독경'(牛耳讀經)으로 그칠 뿐이다.  '알면 사랑한다'라는 말처럼 동식물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공생'을 알게 되는 '공감'이 형성된다면 우리 주위에 있는 타인들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을까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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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7-22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재천 교수의 이야기에 딱히 태클을 거는 것은 아니고, 위의 이야기들에 상당히 공감합니다만, 자연을 어떻게 보는가는 상당수 인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자연의 동식물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것이고, 그 방식을 인간이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글의 논의대로 동식물의 진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부분을 인간이 강조해서 보는가의 문제도 또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cyrus 2012-07-23 18:55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공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는데요. 상리공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공생의 의미입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종이 서로 이익을 얻으면서 돕는 것이죠. 이와는 조금 다른게 편리공생인데 한 쪽에만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이익 또는 불이익을 얻지 않으면서 돕는 관계를 말합니다. 사실 최재천 씨의 책을 읽게 되면 공생을 강조하면서 설명하는 것 같은데 편리공생에 대해서는 언급이 잘 없더군요. (정확한 기억이 아닙니다. 공생의 정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잠깐 편리공생에 대해서 설명할 수도 있고요) 어찌 보면 이러한 관점도 동식물의 관계 특정 부분만을 인간의 생활방식과 견주어 강조할 수도 있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