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그래비티 - 만화로 읽는 중력의 원리와 역사 어메이징 코믹스
조진호 글 그림 / 궁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중력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없는 사람이다.”

(리처드 파인만)

 

 

 


 Scene #1 95%의 중력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주를 얼마나 아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 자연은 신비 그 자체다. 이 신비함이 글과 숫자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예술과 문학과 과학이 탄생했다. 신비함 속에 있는 오묘한 자연의 질서를 찾아 나선 인간의 호기심은 결국은 우주탄생의 비밀을 찾아 과거로 미래로 우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거대한 우주 물질의 겨우 4%에 해당할 뿐이다. 결국 인간은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안다는 것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에 작용하는 중력의 95%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중력을 논하지 않고는 우주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중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빅뱅 이후 계속 팽창하던 우주에 별과 행성을 탄생시키는데 주요 역할을 한 중력은 여전히 우주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구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도 적당한 지구의 중력이 대기권을 형성해주기 때문이다. 화성은 중력이 약해 대기권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 삭막한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정체를 ‘시간과 공간이 일체가 되어 이루는 물리적 실체인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물체가 주변 공간에 형성하는 '중력장'은 이 물체 주변의 시공간에 변형이 가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질량을 가진 물체가 움직이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파괴되면 이에 따른 파동이 시공간의 일그러짐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이 물체의 질량이 매우 크다면 이를 관측하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 이런 중력장의 파동을 가리키는 말이 ‘중력파’다.

 

중력파의 존재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라 예측되는 것이어서 이론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으나 직접 실험을 통한 검출은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올해 미국 연구진이 우주 빅뱅 직후 있었던 급격 팽창의 결정적인 증거로 중력파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된 지 98년 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다. 중력의 비밀을 규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랜 시간 계속돼 왔다. 이후 천문학과 물리학, 관측 기술 등 우주의 역사와 미래를 다루는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중력의 비밀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Scene #2  무엇이 태양과 지구를 움직이게 하는가?

 

모든 물질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뉴턴의 만유인력은 당시까지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관념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근본원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낙하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중세 천년 동안 서구 사상가의 의식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자연관은 16세기 후반 길버트란 영국 내과 의사가 타파하게 된다. 그가 주창한 내용은 지구가 하나의 자석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배경 중 하나는 자석과 철광석이 본질적으로 동일한데 철광석은 땅 밑에서 캐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중력과 자기력을 서로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동설 옹호론자들도 태양이 지구를 당기는 힘이 자기력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선 태양과 지구는 모두 자석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면 운동이 일어날 수 없는데 자력이나 중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곤혹스러운 해결 과제였다.

 

이런 길버트의 관점을 가장 깊게 받은 과학자 중엔 케플러가 있었는데 그 또한 태양이 지구를 묶어놓는 힘은 자력이라고 여겼다. 그럼 지구가 이렇게 움직이게 하려면 자석인 태양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자리에서 빙글 빙글 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의 자전이란 아이디어가 튀어 나온 것이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틀린 내용이지만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몹시 반성이 앞서게 된다. 아무리 틀린 내용이라지만 앞 뒤 맥락을 보면 말이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선조보다 더 고도의 문명 속에 사는 우리는 왜 이런 의문점을 생각해본 적 자체가 없던가.

 

뉴턴의 시기에도 사람들은 자기력과 중력을 구별하지 못했다. 아니 동일한 것으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보고 한심하게 생각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사항들 중에 과거 및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동일한 것들을 우리는 다른 것으로 여기는 실수도 범하기 때문이다.

 

길버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굳어진 정적인 지구상을 특이하고 탁월한 힘을 가진 고귀하고 생명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지만, 당시 사고방식을 돌아가 보면 이처럼 황당한 논리가 사실은 서양의 근대 과학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지구는 자성 때문에 스스로의 운동 원리를 가질 뿐 아니라, 활성적이고 능동적이며 고귀한 존재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런 관점을 고수한 후로는 지동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1400년 동안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다. 하지만 이 이론대로라면 금성과 수성이 가끔씩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은 전혀 관측할 수 없었다.

 

1500년대 초 코페르니쿠스는 이 점을 지적하며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창했던 지동설을 지지했다. 그는 각각의 천체들은 제각기 고유한 무게를 갖고 있는데 그 무게는 중심으로 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생각은 200년 후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계승된다.

 

 

 

 

뉴턴은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겼다고 생각했다. 질량이 있는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작용한다. 혹자는 묻는다. 만유인력과 중력이 어떻게 다르냐고. 중력은 만유인력에 지구 자전에 따른 원심력을 더한 힘이다. 만유인력과 원심력이 일치하는 공간이기에 사과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그의 중력이론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만약에 지구가 한 순간이라도 공전을 멈춰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구는 태양의 인력에 의해 순식간에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녹아버릴 것이다. 반대로 지구가 지금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공전한다면 지구는 원심력에 의해 공전궤도가 더 커지게 되든지, 태양의 영향권을 벗어나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구가 지금의 속도로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동시에 자전하는 덕분에 우리는 4계절과 밤낮이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Scene #3  “중력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부입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중력이라는 미처 알지 못했던 힘에 의해서. 중력은 가장 기본적인 우주의 질서 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체의 추락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지만 중력이 가지는 절대적인 힘을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중력이 무엇이라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그럴 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에는 중력이 존재한다. 하늘의 구름, 그리고 구름과 빌딩 사이의 공기 속에도 중력이 있으며, 우리가 흔히 무중력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우주 공간에도 그 크기가 작을 뿐 어김없이 중력은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는 중력은 태양과 달의 위치에 따라 매 순간 그 크기를 달리 한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당연한 중력의 존재를 쉽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뉴턴의 중력 발견 이후 과학은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마침내 지구의 중력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됐다. 지구 탈출의 꿈을 실현시켜준 거대한 비행체인 로켓. 지구 중력의 구속력을 이겨내고 지구 밖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던 인간에게 로켓은 우주에 도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수많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왔던 인류의 노력은 과학을 거듭 발전시켜왔다. 중력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할수록 과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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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5-15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양의 자전'이라니, 왜 지금까지 한번도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cyrus 2014-05-1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 hnine님. 이 책이 만화라서 기본적으로 알아두면 좋은 과학상식이 쉽게 소개되고 있어요. 만화책으로 오랜만에 고등학생 때 배운 과학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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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오래된 이 논쟁과 관련, 생물학자들은 대부분 달걀 쪽 손을 들어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의 이론 때문이다.

 

닭은 잠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임기를 다하면 사라져버리는 일시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생명의 숨을 이어온 알 속의 DNA야말로 진정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이다. 적어도 이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닭이라는 생명에게는 말이다. 닭은 알이 더 많은 닭을 낳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기계일 뿐이다.

 

달걀 속의 DNA는 물론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의 DNA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어느 성공적인 한 복제자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DNA은 오로지 자기의 분신을 만드는 일밖에 모르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 불렀다.

 

이제 ‘이기적 유전자’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생소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기적인 유전자가 어떻게 이타적 인간을 만들어내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도킨스는 유전자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동종의 유전자가 번식할 수 있도록 한 개체가 혈연관계에 있는 다른 개체를 돕는 혈연선택 가설을 주장하지만, 나와 전혀 혈연관계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이나 친절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결점이 있다.

 

 

 

이에 대해서 매트 리들리는 인간이 과연 이기적 존재인가, 이타적 존재인가라는 해묵은 논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타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과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이 저술한 『상호부조 : 진화의 한 요소』』에 대한 언급으로 책을 시작한다. 귀족계급 출신이자 혁명가였던 크로포트킨은 삶이 피투성이의 난투 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본 당대의 홉스나 헉슬리와는 달리, 삶의 특징은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결정적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책에서 그 사례를 들고 있다. 187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었던 크로포트킨은 동료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옥에 성공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감옥으로부터 그를 탈출시킨 것은 바로 ‘상호부조’였고, 이것은 그 자신이 혁명가로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한 ‘신뢰’의 산물이었다고 기술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이기성은 동물성의 유산이며 도덕성은 문명의 유산’이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협동은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동물적 전통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부여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절반은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회의 뿌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처럼 이타주의적 본능이 어떻게 삭막한 경쟁과 도태의 이기적 세계에서 살아남았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기 때문이다. 이타주의로 똘똘 뭉친 무리는 다른 무리들과 싸우거나 먹이를 찾는 데 더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타주의가 단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신을 선호하는 이기주의자들과 이타주의자들이 경쟁할 때를 생각하면 당연히 이기주의자들이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경제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서도 쓰이고 있는 게임이론은 배신과 협력을 하는 경쟁자들 간의 갈등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는 이론인데, 이타주의가 전투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이기는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한 번만 볼 것 같은 사이라면 이기적인 것이 훨씬 유리하다.

 

인간의 두뇌는 게임이론이 보여준 자연의 법칙을 그대로 반영한 회로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잘 웃고 호의를 베풀며 대화를 하는 습성이 있다. 함께 술자리를 같이하며 뭉치자고 외치는 이상한 습관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적대적인 배신행위에도 민감하다. 회사에서도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관례나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잘리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리들리는 네가 주면 나도 준다는 식의 이 같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은 관계가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또한 경쟁적이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만약 두 개체의 만남이 일회적이고 우연성이 높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쩌다 마주친 녀석한테 뭘 줘 봤자 언제 그것을 되돌려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들리의 주장과 비슷한 반복-호혜성 가설은 반복되지 않는 상황, 다시는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 보이는 호의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들을 먼저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승무원 故 박지영 씨가 그렇다. 헌혈도 내 피가 누구에게 수혈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덕망 있는 이들을 칭송하고 희생과 협동을 사회 제일의 덕목으로 존중하지만 우리 사회가 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박지영 씨 같은 이들보다는 남의 불행을 나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아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동방예의지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철저하게 ‘동방무례지국’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의 변화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유전자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비록 한 몸 속에 들어앉아 있지만 제가끔 다른 족보를 가진 유전자들이 언제나 일사불란하게 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화장품 회사 긴자마루칸의 회장이자 유명 저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먼저 자기 앞가림을 해야 남을 도울 방법이 떠오른다. 인간의 뇌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DNA는 자신을 먼저 지키는 구조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나의 DNA안에 있어도 제각기 자기만의 복제를 꿈꾸기도 한다. 그래서 흔히 유전자를 국회의원에 비유한다. 자신의 지역구만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면 나라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유전자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 손을 잡을 줄 안다. 즉 개체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이기적 유전자가 일시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생명의 모습은 언뜻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약간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면 내 스스로가 철저하게 겸허해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그리곤 자연의 일부로 거듭나게 된다.

 

겸허한 자세를 갖는다면 인간의 이러한 특성은 우리에게 사회를 선물한 미덕이다. 이타적 유전자가 나타난 것도 결국 종족 보전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자신은 전혀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이기적 돌연변이체가 나타나지 않아야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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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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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은 아름답다. 그녀의 평온하면서도 기품 있는 표정을 보노라면 진정한 미모는 선명한 이목구비나 날씬한 목이 아니라 얼굴 뒤에 숨은 열정과 단단한 내면, 세상을 바라보는 애정과 연민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서전 『희망의 이유』에서 본 그녀의 어린 시절의 한 토막에서 이 여성의 ‘오늘’이 어떻게 있게 됐는지를 볼 수 있다. 그녀가 만 두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 어린 소녀는 가족들과 바닷가에 갔다가 달팽이들을 물통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달팽이는 바다를 떠나면 죽는다고 얘기했을 때 제인은 발작할 지경이 되었고 그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은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제인을 도와 달팽이들을 바다로 바삐 돌려보내야 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과의 교감이 뛰어났던 구달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는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를 따라 세렝게티 초원으로 가서 초기 인류의 화석 발굴에 참가했고 인간의 과거 모습을 추적하다가 침팬지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연구를 위해 탄자니아 곰베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는 침팬지를 관찰하면서 인간과의 유사성에 놀라워한다. 도구를 사용하여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는 ‘도구적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위협하는 보고였다. 또한 침팬지도 의사소통을 하고, 원한과 배려의 감정을 나누며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는다는 점은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구달의 보고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동종 집단의 갓 태어난 새끼를 잡아먹는 암컷 침팬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배신자 집단과 잔인하게 전투를 벌이는 침팬지들의 모습은 인간의 유전자 안에 이기적 폭력성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달은 인간의 문명을 걱정한다. 개별적 경험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집합 문화를 이루고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바로 ‘문화종분화’이다. 문화종분화가 극단화되면 민족, 종교, 이념, 성별 등에 따른 배타적 패거리주의가 발생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구달은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성은 극복이 불가능한 것일까. 구달에 의하면 사랑도 동물적 본성이다. 그녀는 40년간의 영장류인 침팬지 연구와 보호활동을 통해 인간을 보다 풍부하게 알게 됐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됐다. 네덜란드의 한 동물원에 살고 있는 암컷 침팬지는 두 마리의 수컷 침팬지가 싸운 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을 때마다, 둘 사이에 끼어들어 ‘털 고르기’라는 놀라운 솜씨로 화해를 주선한다. 침팬지는 부모 자식뿐 아니라 형제자매 간, 그리고 같은 처지의 고아들끼리 극진한 동정심을 보인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남을 구조하는 이타적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또 어른 수컷 침팬지가 물에 빠진 동료의 새끼를 구하려다 익사했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인간이 침팬지보다 못할까. 침팬지는 동료 침팬지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 있을지언정,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을 의식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정의를 지키고, 이웃을 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구달은 인간이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라고 말한다. 침팬지도 친구를 돕다가 죽을 수 있지만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인간은 고문을 알면서도 저항운동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낯선 타인을 위해 철도에 뛰어든다. 악과 사랑의 두 가지 방향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 인간만의 독특한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그녀는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힘’을 강조한다. 선한 영혼을 따라 과학의 이름으로 헤쳐 놓은 지구를 생명 가득한 공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정신, 즉 ‘희망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공존할 수 있고, 우리를 품은 환경을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침팬지 연구가로서 동물보호와 환경보호에 나섰다는 그녀의 프로필만을 봤을 때, 소박한 자연보호 의식을 가진 서양의 여성과학자였다.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제인 구달은 세상과 유리되어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환경파괴로 인해 그녀의 친구들인 침팬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봤으며, 곰베 지역 주변의 분쟁으로 인해 연구생들이 납치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JGI)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침팬지와 야생동물의 현장 연구 및 보호사업을 펼쳤다. 침팬지 등 포획된 동물의 보호에도 나섰다.

 

그녀에게서 ‘영혼을 담은 과학’은 곧 실천임을 배운다. 우리가 어머니 지구 안에서 어린아이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너와 나의 구체적 행동에 그 결과가 달려 있다.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인 구달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철학과 평화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하는 종교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침팬지를 제3자의 시선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직접 감정을 이입해서 이해하고 대화할 존재로 바라본다. 젊은 나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침팬지 연구에 뛰어들어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는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 이상으로 그녀에게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희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그녀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침팬지 탐구는 결국 인간탐구였다. 침팬지도 우리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분노를 느끼는데도 그저 이용과 도구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침팬지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식탁의 별미로 마구잡이로 사냥되고 인간 병의 백신을 위한 실험재료로 사용된다. 인류의 환경파괴와 전쟁, 이기와 탐욕을 우려한다.

 

“인간이 품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합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기쁨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 (278쪽)

 

하지만 이러한 잘못을 극복해낼 힘 또한 인간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조금씩이라도 노력하는 길 밖에 없으며, 인간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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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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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과학으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다

 

천도(天道), 즉 하늘의 이치가 옳은지 그른지 헷갈린다는 뜻으로 얄궂은 세상의 이치를 한탄하는 말이다. 삶의 정도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벌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별 탈 없이 살 수도 있다는 불공정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사마천은 이런 세상을 안타까워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 죽었다.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기열전 1』 ‘백이열전’에서 임의 발췌, 64~65쪽)

 

사마천의 푸념이 오늘의 이 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유독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착한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세상 정말 ×같아”라는 욕이 나온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뱉는 이런 자조 섞인 한탄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한 단면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과연 인간은 선량한 존재인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학창시절에 분명히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배운 적이 있다. 이제 새삼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사악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인간을 다스리려면 군주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머리를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칸트는 인간에게는 선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성적 존재라고 함으로써 합리적 도덕적 인간들이 모여 사는 완전히 개화한 문화의 왕국을 꿈꾸었다. 서양식 성악설과 성선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있었던 형이상학적 신념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게놈 프로젝트니 유전자 복제니 하는 것들은 모두 분자 생물학의 성과들이다. 분자 생물학을 태동시켜 인간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단서는 DNA 발견이었다. 바로 이 DNA가 생명 단위는 유전자라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생물학의 한 분야인 진화론을 유전자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진화의 단위가 종인지 종 내의 특정한 집단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전자의 발견은 이제 이러한 불투명한 논의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현재 많은 진화론 학자들은 대체로 진화의 단위를 유전자라고 보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를 종래 다윈식 용어를 빌려 말하면 아종 내의 특정한 집단이 선택의 단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유전자 선택설, 혹은 집단 선택설이라고 부른다.

 


 Scene #2  계산된 이기심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유전자를 보호하고 전승시키기 위해 유전자 자신이 만들어 낸 갑옷과 같은 보호 장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제 유전자 선택설에 따르면 심지어 인간 신체마저도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인간의 각종 행위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설사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체가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보존에 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된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이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 보존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설명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의 한 축이 무너짐을 느낀다.

 

그런데 도킨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이 ‘계산된 이기심’임을 분명히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5개 정도 조건 전략자를 가정하여 진화 시뮬레이션을 전개한다. 5개 정도 조건 전략자에는 비둘기파, 매파, 보복파, 허풍파, 시험보복파이다. 비둘기파는 싸움을 피하는 조건 전략자다. 반면에 매파는 싸움을 걸고 완전히 패배하기 전까지는 물러설 줄 모른다. 보복파는 매파에 대해서는 매파처럼 비둘기파에 대해서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허풍파는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반격을 해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 시험 보복파는 매파처럼 싸움을 걸되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계속 매파로 행동하고 상대가 강한 모습을 보이면 비둘기파로 변신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개 전략자 모두를 서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면 보복파와 시험 보복파만이 진화적으로 안정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결론은 야생 동물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도 동물의 한 종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꾀하는 종족이라는 측면에서 상기한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인간들이 일견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어떠한 종류의 사안에 대해 합의를 하거나 협정을 맺는 사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이 전원 의식적으로 장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은 하늘이 주신 저 능력, 즉 이성을 저렇게 간교하게 사용하는구나 하고 탄식하였겠지만, 도킨스에 따른다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곧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인 적대감을 낳는 성급한 탐욕뿐 아니라 사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계산된 이기심 또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이 책은 과학의 성과에 근거하여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Scene #3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


인간의 의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들도 적지 않을 터이다. 특별한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인류에 봉사하는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조차 모두 ‘유전자의 명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생물 세계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은 모두 유전자 존속과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기계인 생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이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 때문에 일부 생물학자들은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선동하는 초(超)다윈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며 자연선택 과정을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기적 유전자론이 진화론을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그럴듯하게 설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도 이 같은 유전자 진화론 때문이다. 인간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불멸의 복제자인 유전자라니,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실제로 유전자 불멸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예상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이내지만 유전자 생존 단위는 100만년 이상이기 때문이다.도킨스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진화론의 효과적인 옹호를 위해서일 뿐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진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개체와 유전자는 관점만 다른 것일 뿐 차이가 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두 가지 견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둘 다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 그대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을 결정짓는 유전자가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자체가 이기적이라는 뜻이다. 이기적인 것은 유전자이고, 인간 개개인은 유전자의 목적을 수행하는 ‘생존기계’일 뿐이다. 인간 개체가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저런 유전자를 진화시키고 이어받은 것뿐만 아니라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를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개체를 이러저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Scene #4  유전자의 지배를 받지만, 극복할 수 있다 


사실 도킨스의 이론은 다분히 결정론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 특별할 것 없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존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면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도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교훈이 단순히 인간도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생명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인간 진화의 역사 역시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역사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점부터가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다.

 

여전히 인간이 유전자에 휘둘리는 생존기계라는 사실에 찝찝한 독자가 몇 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도킨스는 이타성을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밈(Meme) 이론이 그것이다. 유전자(Gene)에 대응시켜 도킨스가 만들어낸 용어인 밈은 ‘문화적 진화’의 단위다. 생명체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형질을 후세에 전달하는 것처럼, 밈도 자기복제를 통해 사회와 인류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비록 생존을 위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유전자의 의지에 대항할 수 있다.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생존기계일 뿐이겠지만 그 기계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유전자 때문이 아닌 인간의 자율의지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그저 인간도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란 결론을 내린다면 오해다. 인간이 수많은 생명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이성이라는 선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책에서 찾아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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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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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다른 날 걸어 보리라! 생각했지요.
인생 길이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프로스트, ‘걸어 보지 못한 길’ 중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는 삶이란 숲으로 난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느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지 못한 첫 번째 길을 아쉬워하며 다음 날을 위해 이 길을 남겨둔다. 길은 언제나 또 다른 길로 이어지기에 누구나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기는 어렵다. 그저 자기가 선택한 길이 더 나은 길이길 바라며 숲으로 계속 걸어 들어갈 뿐이다. 그 결과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래서 무언가를 처음 시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채 인식하지 못한 것의 중요성을 발견해야 하고 그것이 왜 가치 있는 것인가를 밝혀내야 하며 동시에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구자의 임무이자 그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작업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무관심, 빈정거림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처음 말했거나 행하였거나 깨달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수고에 대한 당연한 답례일 것이다. 그래서 레이첼 카슨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이름 중의 하나이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인류가 숲으로 난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마치 시인처럼 읊은 책이다. 카슨은 인류가 ‘성장’과 ‘개발’이라는 인간만을 위한 이기적인 길을 선택함으로써 자연에게 무슨 짓을 하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비록 카슨은 화학적 방제로 해충을 박멸하려던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키게 되었는지를 주로 조사했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우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인류가 택한 길이 결국은 자기들이 사는 땅을 오염시키고, 나무들을 시들게 하고, 지저귀던 새들마저 떠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침묵의 봄’을 불러올 것임을 예언하였다. 나비가 없으니 꽃도 피지 않고, 새들이 없으니 봄도 오지 않는 그런 죽음의 적막만이 가득한 인류의 미래를 말이다.

 

카슨의 남다른 점은 전체를 볼 줄 아는 그녀의 시적 상상력에 있다. 그녀는 미국 전역의 무차별적인 DDT 방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지맞는 시장이 필요했던 화학산업계와 기업과 연결된 미국농무부와 같은 정부 관료들, 또 기업과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은 과학자들 간의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결탁이었음을 너무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특정 식물이나 곤충을 박멸하기위해 뿌려대는 살충제가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특정 생물에게만 작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 독성물질이 토양과 지하수로 스며들어가 물고기와 곤충, 새들과 인간에게로 순환하며 지구생태계 전체를 파괴시킨다는 것도 볼 줄 알았다.

 

지금도 생태보호 운운하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좌빨’이라고 몰아세우는 데, 40년이나 전에, 그것도 기업발전으로 풍요로운 미국건설에 여념이 없던 냉전적 상황에서, 더구나 남성중심 과학계의 차별적 분위기 속에서 한 여성의 몸으로 그토록 용기 있게 주류세력들과 맞섰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살충제의 광범위한 사용은 독성 성분이 먹이사슬을 통해 축적돼 인류까지 위험에 처하게 된다. 책 출간 10년이 지난 후 비로소 미국 내에서 DDT의 생산과 사용이 금지됐으며 영국에서는 그 몇 년 뒤에 사용이 금지됐다. 카슨의 적들은 말라리아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죽어가는 것은 DDT 사용 금지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카슨을 많은 사람들을 죽인 대량 살육자라 강박한다. 일부 과학자들은 DDT가 먹이사슬에 축적되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DDT에 저항성을 갖는 모기가 출현했기 때문에 생산 및 사용을 금지시켰다며 이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집단은 현재의 말라리아 창궐이 카슨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자 세계보건기구(WHO)도 2006년 DDT를 실내 벽면이나 건물 지붕, 축사 등에 뿌리는 것을 권장한다고 발표했다. DDT의 복권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본다면 그녀의 선구안이 과연 옳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겠다. 그녀가 『침묵의 봄』에서 예측한 미래, 즉 생명이 사라진 텅 빈 지구와 DDT로 인한 암의 증가에 관한 내용은 모두가 빗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카슨의 저작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인간이 스스로 이뤄낸 것들에 대한 반성과 의심하는 법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사실, 카슨의 경고는 DDT와 그 유사 화학약품에 의해 가해진 위협이라는 관점과 인류가 직면한 생태적 위험 모두에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토양에서 씻겨나간 화학물질들은 지류와 강으로 흘러든 다음 궁극적으로 바다 바닥에 축적된다. 그러나 바닥에 사는 물고기를 포획하기 위해 저인망 어선이 바닥을 지속적으로 홅는 관계로 DDT를 포함한 독소들은 끊임없이 물속에서 교반된다. 육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두 갈림길에 서 있다. 하지만 로버트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에 등장하는 갈림길과 달리 어떤 길을 선택하든 결과가 마찬가지이지는 않다.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해온 길은 놀라운 진보를 가능케 한 너무나 편안하고 평탄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다." (305쪽)

 

마지막 장에서 카슨은 프로이트의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에게 두 갈래 길이 놓여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 온 길은 편하고 반반한 고속도로로 우리는 그 위를 달리며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지만 그 끝에는 ‘파멸’이라는 끔찍한 도착지가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아직 우리가 많이 가보지 못한 길로 지구의 보존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마지막 남은 길이다. 그리고 이제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한다.

 

자연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에 순응하지 않는다. 인체건 곤충이건 그 방어벽을 무너뜨리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반드시 상상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류에게 반격해 온다. 과학에 흠뻑 젖어 편리한 생활과 문명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과학이 주는 불편한 진실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카슨의 교훈을 잊어 가고 있다. 카슨은 우리 자신이 자연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믿었다. 『침묵의 봄』은 자연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 연관돼 있다는 명백하고도 중요한 메시지를 제시했다. 그녀 때문에 우리는 야생생물들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먹이사슬의 취약성을 이해하게 됐으며 이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강력한 녹색운동을 펼쳐올 수 있었다. 지금 환경은 더 좋아졌는가? 우리는 지구를 잘 보존하고 있는가? 또는 이전보다 더 위험해졌는가? 『침묵의 봄』이 출판된 지 50년이 지난 지금 지구는 더 온난화됐으며, 해수면은 더 상승하고 산호초는 파괴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성과에 도취되어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다는 오랜 진실과 대자연 앞에 선 인간이 가지는 겸손을 잊은 채 살고 있었다. 카슨의 예언은 틀렸기에 오히려 여운이 깊게 남는다. 우리는 그녀의 예언으로 인해 파멸로 향하는 길에서 유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연을 통제한다’는 말은 생물학과 철학의 네안데르탈 시대에 태어난 오만한 표현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접근법은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숲이 무성해야 곤충이 살고, 곤충이 살아야 새들이 살고, 새들이 살아야 사람도 산다. 자연계는 승자 독식의 사회가 아니다. 지구위의 모든 생물은 나눠먹고, 같이 살아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모든 생물은 먹이사슬의 고리를 이루면서 공존 공생하는 자연 생태계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탐욕이 봄의 침묵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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