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지혜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방향만 알려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먼저 닦고 거친 스승의 식견은 그 자체로 제자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드물지 않다. 청출어람(靑出於藍). 비록 제자일지라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공자는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았던 제자 안회(顔回)를 총애하였다. 예술에서도 청출어람의 예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화가 겸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의 공방에서 미술 수련을 받았다. 도제 생활 6년 이상을 한 제자는 스승의 그림 작업에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베로키오는 도제 생활 6년도 채 안 된 다빈치에게 자신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다빈치는 그림 왼쪽에 있는 천사를 그렸다. 어린 제자의 훌륭한 그림 솜씨에 감탄한[1] 베로키오는 천부적인 재능 앞에 좌절했고, 그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 오광수, 박서보 감수 모로(재원, 2004)

* 발터 니그 조르주 루오(분도출판사, 2013)

* 임식순 루오(서문당, 1992)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의 관계는 보는 이에겐 애틋하다. 모로는 제자들의 재능과 개성을 존중하는 스승이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면서 제자들의 실력을 파악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매우 즐겁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나는 여러분이 밟고 지나가는 다리다.”  [2]

 

 

모로는 매주 일요일에 제자들을 만나 예술에 관한 토론을 했다. 토론 모임에 참석한 제자들 중 한 명이 조르주 루오였다. 그는 그 당시 스승과의 만남을 회상하며 스승의 인품에 감탄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가르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는 인정이 많았으며, 그가 갖고 있던 생명과 뉘앙스에 대한 섬세한 경의는 우리를 얼마나 감동시켰던가.”  [3]

 

 

젊은 루오는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아 성공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모로는 제자의 심정을 이해했으며 루오에게 그림을 급하게 그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모로는 루오가 추구하게 될 예술적 성향을 간파했다. 그는 루오가 우울하면서 검소한 분위기가 감도는 종교적 예술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루오는 종교적 심성을 담은 그림을 남겼다. 모로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작업실은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모로 미술관의 초대 관장으로 루오가 임명되었다. 미술관 관장으로 활동하면서 받는 월급이 적었지만, 루오는 금전적 혜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미술관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루오에게 모로는 스승 이상의 존재였다. 루오는 모로를 좋은 아버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각별하게 대했다. 모로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대담한 묘사를 선보여 야수주의(Fauvisme)를 탄생시켰다.

 

 

 

 

 

 

 

 

 

 

 

 

 

 

 

 

 

 

 

 

 

 

 

 

 

 

 

 

 

 

 

 

* 알렉상드르 라피에르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민음사, 2001)

* 크리스티나 하베를리크, 이라 디아나 마초니 여성예술가(해냄, 2003)

* 주디 시카고,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

* 이명옥 센세이션-세상을 뒤흔든 천재들(웅진지식하우스, 2007)

 

 

 

 

제자의 앞길을 가로 막은 나쁜 스승이 있다.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화가의 친딸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화가의 딸은 열일곱 살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그녀는 벌써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런데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다. 그는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그녀와의 결혼을 원했다. 하지만 타시의 제안은 자신의 강간죄를 덮기 위한 비열한 꼼수였다. 타시는 자신이 내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아르테미시아의 아버지는 타시를 고발했다. 딸의 순결은 가문의 명예와 직결된 문제였다. 아버지는 타시를 강간죄가 아닌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세상은 아르테미시아의 고통을 외면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수군거렸다. 심지어 타시는 그녀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거짓 주장을 했다. 7개월 동안 진행된 소송 끝에 강간죄가 입증돼 타시는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타시가 받은 죗값은 고작 1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판 결과가 나온 이후 타시에게 그림을 주문한 고객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재판을 승리로 이끈 아르테미시아였지만, 남은 건 상처였다. 모진 고문과 수모는 그녀가 가진 재능의 날개를 꺾이게 만들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불행을 딛고, 붓을 다시 쥐었다.

 

 

 

 

 

 

그녀의 대표작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화가의 개성이 충만한 걸작이다.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Judith)는 적장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쥔 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남성 화가들이 그린 유디트는 팜 파탈(femme fatale)’에 가까웠으며 치명적 매력으로 적장을 유혹해 그를 죽음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였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성적 범주에 속한 유디트를 그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자의식을 담은 아르테미시아를 그렸고, 유디트를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현했다.

 

 

 

 

 

 

 

 

 

 

 

 

 

 

 

 

 

 

 

 

*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동녘, 2017)

 

 

 

스승은 제자들 중 한 두 사람을 선택해 총애했다. 자신의 지식이 왜곡되지 않고 순수하게 애제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 집착한 스승은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최악의 스승은 제자의 재능을 죽일 뿐만 아니라 제자의 인생마저 망가뜨린다. 중국 명나라 말기 사상가 이탁오(李卓吾)진정한 스승이 되려면 친구가 될 수 있어야 하고 진정한 친구가 되려면 스승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제자와 함께 공부한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려면 스승은 새로운 것을 배울 줄 알아야 하며 제자의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 또 스승은 제자의 비판을 경청해야 한다. 그러면 제자는 스승의 인도(引導)를 믿고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제자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스승. 그 모습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언급한 스승의 파레시아(Parrhesia)’[4]라고 할 수 있겠다.

 

 

 

 

 

 

[1]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베로키오가 소년 다 빈치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난 것에 화가 났다고 썼다.

 

[2] 오광수, 박서보 감수 모로(재원, 2004) 10~11

    

[3] 같은 책, 10~11

 

[4] 미셸 푸코 진실과 담론(동녘, 2017)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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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06 17:13   좋아요 0 | URL
미술사에 ‘나쁜 스승-좋은 제자’ 조합이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쁜 스승’은 제자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고, 제자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스승입니다.

sprenown 2017-12-0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담스러워 하시니 더이상 칭찬과 감탄의 댓글은 달지 않을 게요.^^. ㅎ. 안목과 식견이 있으신 분들의 비판적 댓글을 기대합니다.^^..

cyrus 2017-12-06 17:16   좋아요 0 | URL
제가 매일 글을 자주 올리는 편이라서 부담스러우면 ‘좋아요’ 안 눌러고 되고, 댓글 달지 않아도 됩니다. 평소에 관심 가질 만한 주제의 글이 아니라면 ‘패싱’해도 됩니다. ‘코리아 패싱’은 있어선 안 되지만, ‘사이러스 패싱’은 괜찮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7-12-06 17:34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패싱‘ 완전 우껴요.
사실 저도 ‘좋아요‘를 좀 남발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좋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잘 읽었다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요번 ‘비회원 좋아요‘ 사건으로 느끼는 바가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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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웨이,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전 ‘좋아요‘에 인색하진 않을렵니다~ㅅ!

cyrus 2017-12-07 10:01   좋아요 0 | URL
To. 양철나무꾼님 / 저도 ‘글 잘 읽었습니다.’, ‘글 한 편 쓰느라 고생했어요.’, 이런 의미로 ‘좋아요’를 눌러요. 제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분의 글에는 무조건 ‘좋아요’를 눌러요. ‘좋아요’를 받은 만큼 ‘좋아요’로 돌려주는 식이죠. ^^

sprenown 2017-12-06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왜이러세요...댓글은 달지 않더라도(못하더라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꼼꼼히 끝까지 읽고, ‘좋아요‘는 누를 거예요.ㅎㅎ

cyrus 2017-12-06 17:25   좋아요 1 | URL
sprenown님 편한 대로 하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0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항상 느끼지만 꼼꼼한 자료와 종합해서 내놓는 글은 참 좋군요. 아르테미시아 사연을 듣고 그림을 다시 보니 확실히 달라보이네요. 유디트를 그린 다른 남성 작가들과의 차별성이 느껴집니다..

cyrus 2017-12-07 09:55   좋아요 0 | URL
원래 카라바조의 그림과 비교해서 올리려고 했는데, 귀찮아서 안 했습니다. 사실 검색 하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그림입니다. ^^

psyche 2017-12-07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아르테미시아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림이 달라보여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건가봐요.

cyrus 2017-12-07 09:57   좋아요 0 | URL
화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그림이 좋아요. 화가의 삶만 안다면 그림을 이해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그림은 어렵지 않고, 공감하기 쉬워요. ^^

yamoo 2017-12-07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디트에 관한 그림이 좀 있는 걸로 압니다. 그중에서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가 가장 유명하죠. 저도 미술사 관계된 책에서 아르테미시아 이야기는 읽었습니다. 명화는 그에 얽힌 신화나 이면의 이야기를 읽고 보는 게 그림 이해에 절대적인 도움이 됩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인다 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