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부터 1994년까지 전국 영화관에 가면 무료로 보는 ‘그것’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늬우스’이다. 유신 시절 영화관에 가면 누구나 애국가를 들었다. 본 영화가 시작되기 전, 삼천리금수강산의 영상이 펼쳐지면서 애국가가 울리면 관객들은 암흑 속에서 일어나 차렷 자세로 경의를 표했다. 그리곤 울며 겨자 먹기로 보아야 했던 영상이 ‘대한늬우스’였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세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중략)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세상 떼어 내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동명 시집 37쪽)
황지우는 이 시를 통해 군사문화의 외면적 강압을 비판했다. 시에서 언급된 ‘이 세상’은 많은 문제를 내포한 사회였다. ‘대한늬우스’는 노골적인 국정 홍보물이었다. 정부의 시각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중립성이나 객관성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정권유지를 위한 홍보물이라는 비판을 받아오다 1994년 12월 31일 2040호를 끝으로 폐지됐다. 강압과 침해의 의미로 남게 된 추억이 2009년에 한 번 부활한 적이 있었다. 문체부가 제작한 ‘대한늬우스-4대강 살리기 편’이였다. 비록 상영기간이 한 달에 불과했지만, 1970년대의 시계로 거꾸로 돌린 문체부의 행보는 유신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문화를 향유하는 행위다. 개인의 일상에까지 권력에 의한 획일적인 강요가 침투해 있다면 문화는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쓴 시를 두 번 다시 보기 싫다. 혐오감이 난다."
황 시인은 자신의 처녀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출간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이 시집의 ‘자서(自序)’ 첫머리에 시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썼다. 사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억압과 부패, 그리고 비(非) 윤리가 가득했던 시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새들조차 세상을 뜨고 싶을’ 정도로 숨 막혔던 그때 그 시절의 아픔을 느껴본 시인과 독자들은 이 시집을 다시 들춰보기가 껄끄러울 것이다. 그런데 유신 시대가 종언을 고한 지금은 그때보다 더 미개해지고, 더 야만적이다. 지금의 세상이 황 시인의 시보다 더 혐오감이 난다.
행정자치부가 올해부터 새로운 국민의례 방식을 제정했다고 한다. 공식 행사에서 순국선열, 호국영령을 위한 묵념을 하도록 권고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은 국가가 지정한 묵념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그뿐만 아니라 5.18 민주 항쟁 희생자, 제주 4.3 희생자들도 묵념 대상자가 되지 못했다. (참고 기사 : [정부, 국민의례 때 ‘세월호, 5·18 묵념 금지’ 못 박아] 한겨레, 2017년 1월 5일 자) 국가가 국론 분열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묵념과 추도를 통제하는 상황. 우리가 탄핵 결과 그리고 최순실, 정유라에 주목하고 있을 동안에 정부는 조용히 역사의 시곗바늘을 유신 시대로 돌리고 있다.
나는 유신 시대와 유사한 상황으로 되돌리려는 정부의 행보에 거부한다. 국민의 취향과 마음조차 통제하고, 하다 하다 이제 희생자를 애도할 자유마저 빼앗으려고 한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도 한참 돌았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는 교황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행위에도 중립이 없다. 자유라는 단어의 의미가 민망해지는 요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여전히 유효하다. 시집을 두 번 다시 보기 싫더라도 84쪽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거기에 묵념할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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