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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한담 - 오래된 책과 헌책방 골목에서 찾은 심심하고 소소한 책 이야기
강명관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10월
평점 :
잘 정리된 서가 앞에 서면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애서가에게는 절로 호감이 간다. 그래도 현실은 절대 유쾌하지 않다. 이사할 때 책과 책장이 가장 큰 짐이 된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과감하게 솎아내야 한다. 사실 자식처럼 소중한 책들을 판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 얼마 전에 깨달았다. 서가에 빽빽하게 꽂힌 채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 숨 막혀 보였다. 팔기로 한 책 여러 권을 빼고 나니 수납공간은 기대 이상으로 넉넉해졌다. 책값이나 책 읽을 시간이 문제일 뿐, 당분간은 꽂을 자리를 걱정하지 않고도 책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 이태준은 자신의 수필에 책을 ‘冊’으로 썼다. 그는 책을 ‘冊’으로 써야 제격이라 했다. ‘冊’은 정말 책을 쏙 빼닮았다. 하지만 ‘冊’이 아름답다고 해도 차렷 자세로 고단하게 서 있어야 하는 모습에서 장서가의 독단적인 고집이 느껴진다. 이젠 슬그머니 짝을 지어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친구처럼 옆의 책에 비스듬히 기댈 수 있는 여유로운 서가의 모습이 이태준의 ‘冊’보다 더 아름답다. 생각해보면 워낙 없이 살아서인지 책을 빌려주는 데 참 인색하다. 그러하다 보니 상대방에게 책을 빌리는 일 자체도 어색하다. 애서가일수록 책을 빌려주는 일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건 책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국문학자 이희승은 빌려준 책에 낙서나 조금이라도 구겨진 책장을 발견하면, 그렇게 만든 사람의 뺨을 갈기고 싶다고 표현했다. 이희승 선생은 나와 비슷한 ‘궁정식 애서가’이다. 《서재 결혼시키기》의 저자 앤 패디먼에 따르면, 궁정식 애서가는 책의 내용뿐 아니라 종이와 활자로 된 책의 외양을 엄숙하게 떠받드는 독자를 의미한다. 궁정식 애서가에게 책에 밑줄을 긋는다거나 읽던 책장을 접는 신성모독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간혹 장서가를 ‘고서 수집가’와 동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고서 수집가는 고서의 매력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냥 막연히 고서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고서를 수집하면서 자연스럽게 고서의 내용을 분석하는 감식안까지 갖추기도 한다. 고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소장 가치도, 학문적 효용성도 없는 고서를 순우리말로 ‘섭치’라고 부른다. 고서라고 해서 수집가들에게 환영받는 것이 아니다. 섭치 더미 사이에 귀중한 고서를 고르는 수집가들의 능력은 대단하다. 특히 연구를 위해 책을 많이 읽어야하는 학자들은 수집가 기질이 다분하다.
책을 모으는 학자인 강명관 교수는 고서를 사 모으는 일에 애착이 없다고 밝혔다. 연구를 위해 참고해야 하는 고서는 대개 영인본으로 나와 있다. 큰돈을 들이면서 원본을 사지 않아도 된다. 강 교수의 생각은 고서 수집가들의 활동과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과거에는 고서 수집가와 학자가 장서가를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희귀한 고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그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무리하게 고서를 구입할 필요가 없다. 고서에 대한 강 교수의 확고한 주관은 고서를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재물로 여기는 사회 풍토에 맞서는 데 기억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값비싼 고서가 아니더라도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모으려고 한다면 누구나 장서가가 될 수 있다. 희귀 고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장서가의 자격이 될 수 없다. 장서가는 책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좋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도 된다. 나는 장서가를 ‘책 전문가’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다. 책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분야에 가리지 않고, 절판본에 관심이 많다. 가끔은 쓰레기통에 처박아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채운 절판본도 산다. 나는 남들이 찾지 않는 섭치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를 한 번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 섭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장서가다. 섭치도 가치 있는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 먼지 속에 묻힌 섭치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일이 정말 좋다. 강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절판본을 모으는 일만으로도 내 공부는 충분히 하는 셈이다. 고서가 아닌 심심하고 소소한 책도 장서가에겐 소중한 존재이다. 책에 귀천(貴賤)이 없다. 결국, 책의 귀천은 책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장서가의 마음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