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에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우리나라도 이제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두고 겁탁(劫濁)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 세계가 흐려지고 있다. 겁탁의 시대 속에 우리는 이성의 변별력이 둔화하고 급기야 불편한 진실들을 망각하면서 사는 것에 익숙해 있다. 어느 인터넷 방송 BJ는 생방송 중에 경주 지진 소식을 듣고도 채연의 ‘흔들려’라는 노래를 틀어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그다음 태도가 더 문제였다. BJ는 지진 피해를 ‘몇만 명 다친 것도 아닌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BJ는 그 날 지진의 공포로 불안에 떨고 있던 경주 시민들의 심정을 몰랐다. BJ의 무지한 발언에 일부 시청자들이 지적하자, BJ의 ‘열혈 팬’ 시청자들은 BJ를 옹호했다. BJ와 열혈 팬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이기주의는 자연재난 상황이 ‘볼거리’ 또는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버린다. BJ와 열혈 팬들은 편하게 집에 있으면서 남의 고통을 감상하는 관람자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여진을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조차 무서운 실제의 현실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인터넷, SNS 그리고 속보 뉴스는 자연재난의 공포를 알리는 데 한몫을 했다. 하지만 자연재난 참사를 재연하는 소셜미디어와 대중매체의 장면들에 익숙해지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공포’가 ‘그들이 경험한 공포’로 느껴진다. 수잔 손탁은 실제의 참담한 현실과,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간극을 지적했다.
서경식은 현지 실상에 무감각해지는 인간의 심리를 ‘동심원 패러독스’로 설명했다. 우리나라보다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는 대책을 잘 마련한 일본 정부는 원전의 재앙을 뒤로 잊은 채 원전의 안전성을 강조한다. 서경식이 생각하는 원전의 재앙은 다중의 뜻을 갖는다. 기본적으로 원전정책 자체가 잘못되었고, 원전사고 이후 참사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본 정부의 무성의한 태도는 안전 불감증을 불러온다. 일본 정부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키려고 원전의 안전성만 부각한다. 재앙의 단편적인 실태를 전해 들은 시민들은 동심원 안에서 일어난 원전사고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원전 재앙이 발생한 지역, 즉 동심원 밖의 외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원전 재앙을 목격한 사람들보다 공포와 불안감을 덜 느낀다.
그렇지만 재앙의 근원 지역에 가까이 사는 사람들도 끔찍한 현실을 외면한다. 현실 회피성 인물의 모순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아모스 오즈의 소설 《물결을 스치며 바람을 스치며》에 나오는 스테파다. 그녀의 남편인 유대인 수학자 엘리샤 포메란스는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을 피해 탈출하지만, 스테파는 귀를 뚫는 포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스테파의 태도는 소설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로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점점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도 망명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프레모 레비는 ‘편리한 진실’이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환상이 고향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지적했다.
겁탁의 시대가 이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것들의 힘을 잃는다. 일본이 대지진 이후로 마음의 동요에 시달리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조만간 일본과 비슷한 행보를 걷게 될지도 모른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일상이 한순간에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비관적인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도 많이 나올 것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 이 사회의 구조는 비극들을 일상의 무대 뒤로 내쫓아내고, 기억하는 것조차 금기시한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 사고 이후에 연민의 연대를 좌파 논리로 몰아세우는 폭력을 목격했다. 몇 개월 뒤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다. “지진이 일어난 지가 언젠데, 경주 사람들은 정부에게 피해 보상을 원하는 것일까?”, “우리 지역도 먹고 살기 힘든데, 정부가 경주만 편애하는 것 아닌가?”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이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이는 힘이 필요하다. 강상중이 말하는 ‘받아들이는 힘’이란 어두운 과거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잊고, 주어진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다. 용기를 내어 가혹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서경식의 생각과 유사하다.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딛고 희망으로 전환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고통과 두려움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만 긍정적 변모가 가능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만큼, 아니면 그 이상의 고통에 연대하는 한에서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은 겁탁의 시대 속에서 사는 우리가 내면으로 치러내야 할 또 다른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