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회화의 의미를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생뚱맞음’이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오브제들을 모아놓고 수수께끼의 이름이 붙인 그림은 관람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런 ‘생뚱맞은’ 초현실주의 미술을 구축한 화가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다.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 집단과 교류하면서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작 4년에 불과하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데 키리코는 ‘형이상학적 회화’로 명명된 그림들을 제작했다. 1920년부터 데 키리코는 돌연 고전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앙드레 브르통이 주도하는 초현실주의 집단은 과거에 회귀한 데 키리코의 작업을 비난했고, 그를 집단에 제명하기에 이른다.
브르통은 1924년에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사실주의를 ‘조야한 자기도취’라고 비판했다. [참고 1] 데 키리코는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과거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사실주의를 환기했고, 이를 형이상학적 세계와 조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의 후반기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의 현대적 변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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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적 회화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고, 데 키리코의 대표작으로 많이 소개되는 작품이 『거리의 신비와 우울』이다. 이 그림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데 키리코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오래도록 눈길을 붙잡게 하여버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광장에 노랗게 번지는 오후의 색깔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고대의 성벽이 서 있는 골목길은 햇볕을 받아 환하게 밝고, 오른쪽 반을 차지한 성벽은 완전히 칠흑처럼 컴컴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광장에 서 있는 한 남자의 상반신 그림자가 마치 굴렁쇠를 굴리며 달리는 소녀를 관찰하듯이 골목길에 삐져나와 있다. 굴렁쇠 소녀는 그림자를 향해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온다. 보이지 않는 광장도 보이는 골목길도 적막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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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키리코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밀라노 등을 여행하면서 지중해의 햇살이 고대유적과 광장에 가로질러 들어오는 풍경에 매료되었다. 형이상학적 회화 작업에 영감을 불어넣은 첫 번째 현현(顯現, epiphany)이다. 이때부터 데 키리코는 광장을 소재로 형이상학적 그림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묘사한 광장은 황량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가 짙게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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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노래』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아폴로 석조 두상과 수술용 장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아래에는 커다란 녹색 공이 놓여 있다. 이 오브제들이 사랑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제목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잔뜩 생긴다. 딱 거기까지만. 우린 절대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해답을 찾게 되면 이 그림 본연의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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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키리코는 처음에 상징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뵈클린 역시 음습한 분위기, 초자연적인 세계의 기이한 경험을 표현했다.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그림 속에 텅 빈 광장을 유령처럼 배회하는 듯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관람자에게 꼿꼿하게 서 있는 자신의 뒷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데 키리코의 수수께끼 인물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없다. 여기서는 ‘광장의 유령’이라고 표현하겠다) 광장의 유령은 뵈클린의 그림에 등장한 인물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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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의 섬』 중앙에 온통 암흑으로 드리워진 사이프러스 숲은 고요하고 아무런 형태가 없는 심연(深淵)을 형성하며 무한으로 향하는 미지의 세계, 즉 알 수 없는 죽음의 공간을 나타낸다. 검은 옷의 뱃사공이 노를 젓고, 하얀 옷을 입은 망자는 ‘죽음’이란 최후의 여행을 암시한다. 데 키리코는 우뚝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를 도시의 거대한 탑으로 변용했다. 거대한 크기와 단순한 형태의 탑은 무한한 환상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1919년에 데 키리코는 로마 미술관에 전시된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고 두 번째 현현을 체험한다. 그는 형이상학적 회화에서 고전적 사실주의로 돌아선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집단은 데 키리코를 변절자로 몰아세워 비난했으나 그들은 처음부터 데 키리코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데 키리코가 한창 형이상학적 회화 작업에 열중했던 시기에 이미 고전주의적 소재(고대 유적, 조각상, 도리아식 열주)를 사용하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집단은 과거와의 단절을 추구했지만 데 키리코는 과거와의 연결을 시도하여 초현실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브르통은 데 키리코의 사소한 일탈을 처음부터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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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키리코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의 그림도 봤을 것이다. 파르미자니노는 16세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다. 마니에리스모는 고전주의 르네상스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건너가는 과도기에 형성된 미술양식을 가리킨다. 더러 ‘매너리즘’으로 쓰기도 한다. 아르놀트 하우저에 따르면, 마니에리스모는 고전주의의 단순한 조화를 해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현실을 변형한 것이다. [참고 2]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는 미완성 작품이지만, 마니에리스모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불균형한 구도와 비현실적인 신체 왜곡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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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긴 성모』에 특이한 기둥이 그려져 있다. 그 기둥 아래에 성 히에로니무스로 추정되는 사제가 서 있다. 진중권은 이 오묘한 구도를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그림과 닮았다고 했다. 곰브리치는 정통적인 양식을 거부한 파르미자니노를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라고 평가했다. [참고 3]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을 데 키리코가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다. 『목이 긴 성모』와 『스가랴와 함께 있는 성모』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그림이다. 데 키리코가 피렌체를 여행하는 중에 우피치 미술관에 들렀을 것이다. 그는 파르미자니노의 특이한 신체 묘사, 배경에 배치한 고대 건물과 기둥을 인상 깊게 봤을 수도 있다. 데 키리코가 고전주의 회화에 탐닉했던 시기에 마니에리스모 양식과 유사한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 집단은 ‘합리적인 세계를 뒤집으려는 계획’을 갖고 현실을 재창조하는 예술 행위를 추구했다. 초현실주의 집단 일원들과 교류했던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데 키리코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점차 독자적인 화풍으로 현실을 재창조했다. 그는 보이는 것을 그리되,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전달하고 싶어 했다. 데 키리코의 영향으로 달리, 마그리트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자유로운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형상화해낼 수 있었다. 그가 달리와의 관계를 끊고(브르통은 달리가 상업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고, 히틀러를 찬양한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다. 당연히 달리와 브르통은 예전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갈라섰다), 자신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마그리트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있다. [참고 4] 달리는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자신의 기억, 꿈, 무의식 속에 있는 것들을 그렸고, 마그리트 역시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중시했다. 데 키리코는 자신의 그림이 꿈과 무관하며 초현실주의를 의식하고 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현실의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전주의로 관심을 돌렸다. 데 키리코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것을 시도했다.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의 결합. 물과 기름 같은 서로 상반된 양식이 만나 색다른 회화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도전이었고, 동료 화가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데 키리코가 죽을 때까지 형이상학적 그림을 그렸다면, 초현실주의 회화를 논할 때 달리, 마그리트보다 가장 먼저 언급되었을 것이다.
[참고 1]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2012년) 65쪽
[참고 2]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창비, 2016년) 제2장 매너리즘 편
[참고 3] 《교수대 위의 까치》(마로니에북스, 2009년) 11장 목이 긴 성모 편
《서양미술사》(예경, 2013년) 18장 미술의 위기 편
[참고 4] ‘다시 구할 수 없는 미술책 시리즈’ (2012년 3월 17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5505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