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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기생충 콘서트 - 지구의 2인자, 기생충의 독특한 생존기
서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5월
평점 :
방금 점심을 먹고 왔으면 죄송합니다. 지저분한 얘기를 하려고요.
예전에 똥은 거름이었다. 배추, 무, 상추, 마늘, 고추 모두 이 똥을 먹고 자란 채소들이다. 우리가 웃돈 주고 사 먹는 유기농 채소라는 것도 따져 보면 바로 ‘똥 먹여 기른 채소’다. 밥이 똥이 되고, 그 똥이 다시 밥이 되는 오묘한 섭리. 요즘 커다란 슈퍼마켓을 가면 유기농 채소가 넘친다. 그 누구도 화학 비료와 농약을 뒤집어쓴 채소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기농산물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은 맹신에 가깝다. 유기농산물이 생물학적 위해(危害)에 취약한 면을 간과하고 있다. 생물학적 위해요소는 세균, 곰팡이, 바이러스, 기생충 등이 있다. 유기농이란 말만 믿고 세척을 소홀히 하면, 채소에 붙어있던 기생충에 감염될 수 있다.
오래전 똥을 농작물의 거름으로 주던 시대에는 기생충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농약 사용과 생활환경의 현대화로 기생충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유기농 채소를 선호하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기생충 감염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제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밭에 똥거름을 뿌리는 작업을 한다면 긴 옷을 입고, 장화를 신어야 할지 모른다. 유기농 채소를 가꾸는 사람들도 기생충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흙 속에 사는 분선충이라는 기생충이 산다. 이 기생충이 사상유충으로 자라면 감염력이 높아진다. 사상유충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소장으로 향한다. 소장 안에서 성충이 된 분선충 암컷은 스스로 알을 낳아 개체 수를 늘린다. 면역이 약한 사람이 분선충에 감염되면 치명적인 증상에 시달린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된다.
생선회를 먹은 다음 급격히 배가 아프면 고래회충(Anisakis)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 한때 고래회충의 실체가 매스컴을 타고 전국으로 알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고래회충에 걸려 복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급증하자 불안한 사람들은 생선회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런데 신선도가 떨어지는 싸구려 회나 생선의 내장을 날 것으로 먹지 않는다면 고래회충의 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언론은 정확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기생충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겼다. 앞서 소개한 분선충이라는 녀석은 피부뿐만 아니라 장 점막을 뚫고 혈관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고래회충은 분선충에 비하면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알고 보면 불쌍한 녀석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생선회를 먹고 복통에 시달리지 않았으며 고래회충에 감염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별다른 증상은 없었어도 고래회충 유충 한 두 마리 정도는 내 몸속에 살았을 것이다. 고래회충은 강한 산성, 방사선 등에 끄떡없는 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고래회충 유충이 재수 없으면 숙주인 고래 몸속이 아닌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녀석은 낯선 주변 환경에 당황한다. 마치 길을 잃어 이리저리 헤매면서 울상 짓는 아이의 심정일 것이다. 낯선 거리를 헤매는 도중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아이는 비를 피하려고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위장으로 진입한 유충은 위산의 기운을 감지한다. 위산 홍수를 피하고자 위벽에 머리를 박는다. 낯선 곳에 살아남으려는 유충의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그런데 이 녀석 머리가 위벽에 닿으면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한다. 이때 사람들이 고래회충이 위벽을 뚫어 몹쓸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래회충은 위벽을 뚫지 못한다.
기생충 감염을 불안해하는 대중 심리와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정보가 동시에 겹쳐지면서, 고래회충 유충이 무서운 존재로 오해를 받았다. 고래회충에 연민이 느껴진다. 나도 기생충을 좋게 보게 되다니. 기생충의 아버지 서민 교수는 기생충의 삶을 알게 되면 기생충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했다. 기생충을 사랑하는 감정은 이런 걸까? 고래회충이 위장에서 헤매는 모습을 생각하면 눈가에 촉촉한 습기가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