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풍 진단을 받은 이후로 한 달째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고기를 안 먹고 사니까 정신적으로 괴로운 점은 없다. 나는 집밥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데 반찬 대부분이 채소류가 많다. 집에서 소시지 반찬을 마지막으로 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군인으로 복무했을 시기에 소시지 반찬을 많이 먹었다. 어머니가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채소 반찬을 선호한다. 게다가 일부러 음식을 싱겁게 만든다. 덜 짜게 먹는 게 건강이 좋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반찬 투정을 부렸을 법한데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소시지 반찬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어요’라고 말하면서 소심하게 투정을 부린 적은 있어도 밥상을 뒤엎어버리면서 꼬장부리는(상대방이 일이나 행동 등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 패륜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군말 없이 먹기만 했다.
그렇다고 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밖에 나가서 고기를 먹게 되면 순순히 집밥을 먹던 그 모습이 아니다. 당연히 고기 먹는 날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고기를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조금 먹어도 살이 찌는 사람에게는 부러운 체질이지만, 정작 많이 먹어도 몸이 마른 사람들은 괴롭다. 덩치가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몸이 마른 사람들이 비실비실하게 보인다.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런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도 마초 맨(macho man)를 싫어한다. 마초 기질이 있는 동성을 만나면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내가 만난 마초들을 보면 일단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남성성을 동성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주변 남자들이 마초 맨을 좋게 보기 시작하면, 마초 맨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대학교 선배 중에 성격이 쾌활한 마초 맨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덩치가 컸는데,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선배들은 대학교 행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어울려서 잘 논다. 그런데 이 선배의 문제점은 술에 취하면 마초 기질을 드러낸다. 술을 못 마시는 후배가 있으면 모임 분위기를 흐리게 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런데 그 농담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마초 선배를 오랫동안 잘 아는 과 학생들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초 선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암시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초 선배가 오는 날이면 평소 술자리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초 선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꼰대스러운 잔소리+단체 얼차려’ 콤보를 받는다. 심하면 후배에게 손찌검까지도 한다. 마초 선배는 자신보다 아래인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줌으로써 남자다움을 한껏 뽐내려고 했다. 한 번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대학 축제 주막에 들린 적이 있는데, 여자친구가 보는 앞에서도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줬다. 후배들은 얼차려 받을 만한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배는 여자친구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야,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말 한 마디하면 후배들이 잘 따른다고.” 이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선배’라는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마초 선배가 술자리가 있는 날에는 누구나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피할 수가 없다. 그 당시 마초 선배 학번이 최고 학번이었기 때문이다. 마초 선배는 졸업을 코앞에 둔 사람인데도 학과 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마치 자신이 특별하고도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서 남들로부터 관심받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딱히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성격인데도 지금도 그와 연락하는 학교 동기들이 있다. 평소에 성격이 좋아서 어울릴만한데, 문제는 같이 술 마실 때는 되도록 피한다고 하더라.
남자들이 여러 명 모이면 ‘동성사회성’이 높아진다.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애를 의미하는데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동성사회성이 강화되면 남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특권적 지위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긴다. 자신들만의(편향된) 기준으로 타인과 세상을을 바라본다. 이렇다 보니 동성사회성이 차별과 혐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와 《여성 혐오가 어쟀다구?》의 '다른 목소리로: 남성 피해자론 및 역차별 주장 분석하기' 편에 소개되어 있다.
사실 이야기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새고 말았다. 원래는 채식에 관한 내용을 쓰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불편했던 과거가 불쑥 생각나는 바람에 그동안 묵혀 놓은 감정들을 드러냈다. 나는 그 마초 선배가 고맙다. 군대 가기 전에 미리 군기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진짜 군대에 가서는 선임 병들의 단체 얼차려를 받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상황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딱 내가 입대를 한 시기부터 강압적인 군기 문화를 탈피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임 병으로부터 구타나 폭언을 받은 적이 없다. 제대하면서 알았다. 마초 선배는 군대 ‘똥군기’의 향수를 잊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마초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가 만드느냐? 내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