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은 다양하다. 시험이나 과제 등의 필요 때문에, 혹은 연구의 목적으로 책과 자료를 뒤지기도 한다. 그저 나처럼 책 읽는 것이 편하고 좋아서 늘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있다. 그 목적이 어디에 있던지,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동안에는 누구나 자기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독서는 ‘자유로움’에서 멀어지고 있다. 책을 잘 읽으려면 책을 통해 실제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법, 실생활에 적용하는 독서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혼미한 시대에 성공을 원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요건으로 ‘독서법’이 강조되고 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다. 독서를 통한 성공담을 들려주는 자기계발 서적들은 독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책 좋아하기로 소문난 유명인사들은 인문고전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성공한 경영인들이 고전이나 문학 등 인문학 전공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독서로 쌓는 인문학적 교양과 창조력이 경영의 핵심역량임을 보여준다. 여기에 맞춰 권위 있는 교육기관 또는 연구기관은 고전과 현대서적을 골고루 소개한 도서목록을 만든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의 저자 이지성은 인문고전 독서가 두뇌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체계적으로 독서를 하면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도 천재적인 지성을 지닌 두뇌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바꿔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마땅히 대답하기 힘들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지성은 고전에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이지성의 책 제목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검색해보면, 연관 검색어로 ‘리딩으로 리드하라 목록’이라는 것도 나온다. 《리딩으로 리드하라》 뒤편에 있는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전의 인문학 지식이 둔재를 천재로 만들어주는 현자의 돌이 될 수 있을까? 고전을 즐겨 읽는 사람으로서 이지성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오독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딜레당트’다. 그래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독서를 열심히 하면서 깊이 있는 내공을 갖춘 이지성의 노력을 존경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성공’ 또는 ‘천재’라는 단어의 틀에만 맞추려는 그의 독서 인식에 반대한다. 이지성은 출판계의 연금술사다. 연금술사들이 하는 일이란 값싼 금속인 납을 화학반응을 통하여 가장 값비싼 금속인 황금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처럼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지성은 마치 황금이라는 허상을 좇았던 중세의 연금술사처럼 고전 독서가 무조건 ‘황금빛 성공’을 보장해줄 거라고 주장한다.
이지성의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은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우리나라 유명 대학교 추천도서 목록을 외국 명문대가 선정한 고전 도서 목록을 적절하게 조합한 것이다. 이 목록에 미국 그레이트 북스 재단이 선정한 고전 도서 목록도 포함되어 있다. 시카고 대학 총장 로버트 허치슨은 시카고 대학을 세계 명문 대학으로 키우기 위해서 졸업 전까지 철학, 예술, 인문기초 영역에서 100여 권의 인문고전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교육방침을 마련했다. 시카고 주 정부는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고전을 읽고 토론할 수 있도록 ‘그레이트 북스’ 재단을 설립했다. 이지성은 시카고 대학의 교육방침을 옹호하면서 ‘천재’가 되는 인문 고전 독서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사실 이 내용만 보더라도 순진한 독자는 “인문 고전을 열심히 읽으면 사회에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구나.”라고 믿는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고전 독서를 통해서 성공하는 천재로 거듭나는 사례가 이 책의 절반을 차지한다. 비약이 있는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자녀를 원하는 부모들은 저자의 말을 맹신하게 된다. 그러고는 ‘단계별 추천도서 목록’대로 자녀에게 고전 읽기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한다.
이지성 열풍은 사유와 비판이 결여된 인문학이 ‘문화자본’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공하기 위한 인문학과 독서’로 향한 대중의 관심 속에는 계층 상승의 열망이 숨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일찍부터 책을 읽힌다. 이지성은 이러한 사례를 반복 언급하면서 자녀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주지 않으려면 일찍부터 고전을 읽으라고 말한다. 이지성식 독서법의 등장이 인문학 열풍에 기여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이는 곧 인문학이 ‘성공’과 ‘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 이지성 또는 이지성의 책을 좋게 보는 독자에게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다른, 2015)을 권한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명문대의 엘리트 교육이 현실에 순응하기만 하는 양 떼를 양산한다고 지적한다. 이지성이 그렇게 좋아하던 그레이트 북스 재단의 독서 프로그램도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독서 프로그램 개발의 이면에는 이주민 자녀, 유대인 등을 미국의 지배계급으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공부는 사유와 비판하는 방법을 잊게 한다.
이지성은 독자에게 자신이 만든 도서목록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자신만의 도서목록을 만들 것을 당부한다. 정말로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과 SNS에서는 이지성의 충고가 배제된 채 ‘단계별 독서목록’이 공유되고 있다. 심지어 그레이트 북스 재단의 도서목록은 독서 커뮤니티에서 ‘명문대의 독서목록’이라는 이유로 소개된다. 도서목록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목록에 있는 책을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는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목록에 있는 고전이 정말 나 자신의 정신을 살찌우게 하는 좋은 영양소가 될 수 있는지를. 천 년 동안 세계가 인정한 유명 고전이라고 해서 이 책을 읽은 모든 독자를 다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완벽한 고전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유명한 고전이라고 해서 무조건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유명인사가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고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그리고 평생을 그런 식으로 책을 읽는다면 무슨 재미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