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양이의 서재 - 어느 중국 책벌레의 읽는 삶, 쓰는 삶, 만드는 삶
장샤오위안 지음, 이경민 옮김 / 유유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책 읽는 것이 좋아서 도서관 주변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조용한 도서실에 가서 혼자 책을 읽었다. 한참 책을 읽다 교문을 잠그려는 경비 아저씨에게 혼난 적도 있었다. 중학교 때 시립도서관과 조금 가까운 곳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에서 도서관까지 걸어가면 10분도 안 걸린다. 학교 수업을 다 마치고 나면 PC방이나 집이 아닌 도서관으로 향했다. 싫증 날 정도로 맘껏 책을 읽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읽는 도서관 개념은 거의 사라진 지 오래다. 도서관은 입시를 준비하는 독서실과 같은 의미가 되어버렸다. 대학교 도서관도 교재를 읽거나 고시와 취업 준비 서적을 읽는 삭막한 공간이다. 그렇지만, 난 지금도 어린 시절부터 열정적으로 책을 읽었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에 친구들끼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을 서로 바꿔가면서 읽은 적도 있으며 고등학교 야자 시간에 책을 읽으려고 학교와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책 한두 권씩 빌려 오기도 했다. 유년 시절이 지나고도 그것은 항상 내 마음속에 아련한 추억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이파리 책갈피처럼 남아 있다. 책은 항상 내 삶의 기억과 함께 존재했다. 각자의 찬란한 기억들은 누구나 한번은 지나왔음직 한 과거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 들어 있었다. 그 특별하지 않은 과거의 대상이 때로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차츰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 《밑줄 긋는 남자》(열린책들, 2008)의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고 말을 걸고 싶어졌다.
서평을 꾸준히 작성하는 중국의 과학사학자 장샤오위안은 《고양이의 서재》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서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는 책에 대해서라면 무척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고전을 남몰래 읽어가며 답답하기 짝이 없는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년)을 버텨냈다. 그때는 즐거움을 위한 독서가 금기시된 시절이었다. 정부 검열 때문에 중국인들은 원하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책 대신에 마오쩌둥의 글을 억지로 읽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때가 가장 즐거웠던 시절로 기억한다. 집에 있는 책만으로도 독서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던 어린 장샤오위안은 다른 사람의 책을 바꿔 보기 위해서 ‘책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가 구한 책을 친구들에게 빌려주었고, 다른 친구들은 책 좋아하는 장샤오위안을 위해서 자신의 책을 빌려줬다. 자신과 주위 사이에 하나씩 하나씩 다리를 놓듯이 장샤오위안은 책을 징검다리 삼아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갔다. 독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장샤오위안은 대학원을 다녔을 때 동기들과 함께 ‘책 찾기 지도’라는 것을 만들었다. 베이징에 있는 수많은 서점 위치를 표시하고,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게 노선도까지 구성했다. 이처럼 책과 독서는 장샤오위안의 인생을 지탱해준 정신적 다리였다. 튼튼하게 만들어진 다리 덕분에 왕샤오위안은 학자가 되어 앙숙처럼 지내오던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접목하는 학문의 다리를 만드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장샤오위안은 자신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책 제목을 ‘고양이의 서재’로 정했다고 한다. 애서가와 고양이. 만약에 당신이 애서가라면 연관성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둘의 조합에서 흥미로운 데자뷔를 떠올렸을 것이다. 일본에서 책 많이 읽었으며 꽤 많은 책을 보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건물 이름이 ‘고양이 빌딩’이다. 다치바나도 장샤오위안철머 인문학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서 편력으로 유명하며 인문학에 의해서 뒤로 밀려난 과학의 암담한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장샤오위안은 다치바나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한다. 고양이 이미지를 좋아할 뿐, 실제로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다치바나도 마찬가지다. 그도 고양이를 좋아해서 자신의 서재 이름을 ‘고양이 빌딩’이라고 지은 것이 아니다. 다치바나와 친분이 있었던 무대 미술가 세노 갓파가 서재 건물 외벽 디자인 도안을 맡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유명한 검은 고양이 그림이다.
고양이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예술가들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성품이 예술가들의 기질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체리필터의 노래 ‘낭만 고양이’는 “거미로 그물 쳐서 물고기 잡으러” 슬픈 바다로 떠난다. 도시의 추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맛본 도시의 고양이가 바다로 떠나는 이유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다. 장샤오위안은 아무 책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책벌레가 아니라 책 읽는 자유를 맛보고 싶은 ‘낭만 고양이’다. 하루 종일밖에 나가지 않고 사방에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보내는 일이 소원이라는 그의 말에 애서가라면 크게 공감할 것이다. 서재는 아무 책이나 펼칠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면서 사유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우리는 고단한 삶에 쫓기고, 분요한 일상에 치여 낭만과 여유를 저당 잡힌 채 참 재미없게 살아왔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은 항상 또 다른 일상탈출을 꿈꾸며 사는지 모르겠다.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람들의 말은 독서를 싫어해서 만들어 낸 좀스러운 변명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하루에 몇 분씩 시간을 내서 읽어보기도 하고, 정독할까 속독을 할까 고민도 해보지만 바쁜 일상에서 책 읽는 시간을 내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스마트폰에 밀리고 TV에 밀리고 독서는 언제나 다음에, 다음에, 할 일 목록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책으로 즐겁게 놀이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과연 다음에 태어나서 자라나게 될 아이들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책과 도서관을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