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익 교수는 《나의 서양사 편력 1》(푸른역사, 2014) 서설에서 역사학은 다른 어떤 학문보다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역사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교과서나 책에서 알게 된 역사는 시대를 지배했던 기득권 논리를 대변하기 위해 첨가되고, 삭제되는 과정을 거쳐서 기록되었다.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싶어 하는 부분들을 좀 더 세밀하게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권력과 신화를 해체하고 인간의 전체 지식 안에서 올바른 진실을 찾음으로써 역사의 맨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프랑스인에게 물어본다면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 작품에 대해 먼저 얘기할 것이다. 이 작품은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 칼레시를 구한 영웅적 시민 6명의 기념상이다. 당시 영국에 포위됐을 때 시민들을 위해 밧줄에 목을 매어 처형받기로 자원한 6명의 칼레 시민들을 조각한 것이다. 이 유명한 이야기의 유래를 알려면 백년전쟁(1337~1453)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은 칼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칼레 시민들은 수 개월간의 항전 끝에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항복했다. 당황한 칼레의 시장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한다.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지만, 시를 대표하는 6명이 교수형에 사용할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걸어 성문의 열쇠를 갖다 바칠 것을 명령한다. 

그때 용감하게 나선 6명이 있었다. 당시 칼레시의 가장 큰 부호였던 이와 시장 등 6명 모두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귀족들이었다.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들을 살려줬다. 임신 중이었던 왕비는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6명의 시민을 사면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건을 연대기 작가인 프르와사르이 기록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박상익 교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칼레의 시민’」이라는 제목의 글(《나의 서양사 편력》 1권에 수록)에 칼레의 시민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한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로 독립운동가 이회영 일가를 소개했다. 

그러나 역시 서양사를 전공한 주경철 교수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 속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을 보여줬다. 이미 일부 역사가들은 칼레의 시민 이야기가 프르와사르에 의해 과장, 왜곡되었다고 제기했다. 프르와사르의 기록 이외에도 현재 남아있는 칼레의 사건을 증명해주는 당대 문헌들이 20여 개가 있는데 칼레 시민들의 행동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가 강한 공개적 종교 의례라고 적고 있다. 6명의 시민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용감하게 나섰다고 볼 수 없는 대목이다. 프르와사르의 기록은 칼레의 시민을 외세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애국 영웅으로 만들었고, 이야기는 민족주의적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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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3-2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먼저 책에 참고 문헌이 없을때의 허탈함에 깊은 공감 한표 꾹 누르구요

두 책을 비교하여 해석하시는 모습에 감탄하며 또 한표 꾹 눌러봅니다 공감만 있지말고 감탄했어요 놀라워요 같은 버튼 좀 있음 좋겠어요 알라딘~~!

cyrus 2015-03-21 11:27   좋아요 0 | URL
제가 책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바람에 참고문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2권에 있었습니다. 저는 참고문헌이 1권, 2권 따로 있는 줄 알고, 1권에 참고문헌이 없는 것을 보고 아예 참고문헌이 없다고 단정짓고 말았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5-03-21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프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반드시 보는 것 중 하나가 참고목록`입니다. 소설은 제외하고 사회인문과학 같은 경우는 참고목록이 있어야 하잖아요. 인용문이 많다면 더더욱. 그런데 참고문헌을 전혀 기재하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전 그런 책은 아예 안 사는 쪽으로 결정합니다. 기본이 안 된 거죠... 물론 사회인문과학을 모두 자기 주장으로 깔았다면 대단한 실력이지만 대부분은 문헌을 참고할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죠... 의심스러움..

cyrus 2015-03-21 11:17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참고문헌이 있어야 분야에 관련된 책을 참고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한심하게 참고문헌이 2권에 있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어요. <나의 서양사 편력>이 두 권짜리거든요. 저의 실수 때문에 좋은 책이 이상하게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돌궐 2015-03-21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문헌이나 자료가 발굴되어 기존과 다른 해석이 나오면서 역사학이 발전하는 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해석들이 다 잘못된 것만은 아니고 그 나름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낸 성과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때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가가 성실하게 조사연구를 했다는 것이 전제가 되야겠습니다.^^

cyrus 2015-03-21 11:23   좋아요 0 | URL
돌궐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정확한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패러다임이 생각납니다.

양철나무꾼 2015-03-21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이런 정보, 저같은 입문자에겐 큰 도움이 돼요~^^

cyrus 2015-03-21 11:18   좋아요 0 | URL
어렵지도 않고, 서양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안티고네 2015-03-2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권 말미에 참고 문헌 있는데요?

cyrus 2015-03-21 11:14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2권에 있었군요. 1권을 다 읽고 2권 절반 가량 읽은 상태라서 2권에 참고문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책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바람에 부끄러운 글을 쓰고 말았군요. 잘못된 내용은 수정하겠습니다.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단발머리 2015-03-24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레의 시민`이야기를 몰랐던 저로서는, `칼레의 시민` 이야기와 `칼레의 시민` 이야기에 감춰진 이야기가 모두 다 흥미롭습니다.

cyrus님 좋은 글, 공부를 부르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3-24 18:05   좋아요 0 | URL
실수로 잘못 적은 내용이 있어서 지난 주 토요일에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칭찬받을 만한 글은 아니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