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이 국어가 되기까지 - 대화로 읽는 국어 만들기의 역사
최경봉 외 지음, 김민수 구술 / 푸른역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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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학자 김민수(1926-2018)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애초부터 완전동화를 계획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조선 민족을 그냥 육체만 남기고 완전히 소멸시키자라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는 506개월 동안(189547일부터 19451025일까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타이완과 비교하면서 조선의 식민지 기간이 35년이라는 게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김민수는 일제 말기 타이완 주민의 일본어 해득률이 85%에 달했으며 이는 대단한 거라고 말한다. 나머지 15%는 오지에 사는 노동자나 농민이니, 일반인들은 대부분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들려준다. 1964년에 하버드 대학에 초청받아서 갔는데, 그때 마침 초청받은 타이완 학자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타이완 학자가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 일본어를 사용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집에서도 부부 사이에 일본어를 쓴다고 했다.


타이완은 조선보다 15년 먼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 시기에 타이완의 일본어 해득자는 1932(식민 지배 37)22%, 1937년에 37%(식민 지배 42)로 꾸준히 증가하다가 1943(식민 지배 48)에는 62%로 갑자기 치솟았다. 한편 조선의 일본어 해득률은 1932(식민 지배 22)7%, 1937(식민 지배 27)11%로 늘어나다가, 1943(식민 지배 33)에는 22%로 두 배가량 껑충 뛰었다. 식민지 말기로 갈수록 일본어 해득자가 가파르게 늘어났다. 35년 아닌 50년 식민 지배를 당했다면 한국도 타이완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을 것이다.


김민수는 해방이 20년만 늦었어도 조선의 일본어 해득률이 90%에 육박했으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면 광복이 돼도 국어의 회복은 어려웠으리라고 판단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어가 일상 언어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지식인이나 상류층부터 먼저 일본어로 생활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모두가 일본어로 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 가지 고백한다. 9(1935) 되던 해 소학교에 들어가 일본말로 교육받고 작문도 늘 일본말로 썼다. 그는 광복 후 성인이 된 다음 국어학자로 활동하면서도 어떤 때는 일본말로 사고를 한다고 했다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머릿속에서 일본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어휘를 찾는다는 것이다. 일본어로는 문장이 떠올랐는데 우리말 어휘를 찾지 못해서 일한사전(日韓辭典)을 찾을 때도 있다. 어린 나이에 배운 언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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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숭배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83
토머스 칼라일 지음, 박상익 옮김 / 한길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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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무리가 휘젓고 다니며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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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 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차승기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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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기의 시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도시 흥남이다. 제대로 된 지명조차 없던 한적한 지역이 단기간에 공업단지로 떠오른 이야기. 함석헌의 신앙동지 김교신은 일제 패망을 예감하고 광복 후 이 공장을 접수하는 큰 그림을 그렸으나 아깝게도 1945년 4월 24일 병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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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 제국의 그라운드 제로, 흥남
차승기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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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의 중심 도시는 함흥이었다. 흥남은 함흥의 남쪽이란 뜻으로, 1920년대 초까지는 제대로 된 지명조차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대표적 신흥 재벌 일본질소비료주식회사(약칭 일본질소)가 질소비료 공장으로 흥남을 선정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7년 초 사택 부지 포함 전체 47만 평의 토지를 저렴하게 구입하고, 착공 2년 반 만인 1929년 말에 흥남공장 1기 공사를 마무리했고, 193012일 조업 개시와 함께 본격적으로 비료 생산에 돌입했다.


흥남은 북선(北鮮)의 큰 고을(大邑)’, 또는 동양 굴지의 기업도시라고 불리며 대규모 중화학공업도 시로 탈바꿈했고, 그 결과 1930년에 면으로 등록된 지 1년 만에 읍으로, 다시 1944년에는 부()로 승격되었다. 1960년대 재벌 그룹 현대가 공업단지를 조성함으로써 울산이 공업도시로 급성장한 것과 비견된다.


20세기 후반 한국에 울산이 있었다면,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조선에는 흥남이 있었던 셈이다.


일본질소는 창업자인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의 이름을 따 노구치 콘체른이라고도 불렸다. 일본질소는 러일전쟁 무렵부터 일본의 제국주의적 성장과 함께 사세를 확장해 갔다. 그 자신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기술 엘리트이기도 했던 노구치는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할 최적지로 한반도 동북의 해안지역을 주목했다.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전기가 필요했는데, 수력발전에 적합한 압록강 상류와 가깝고, 일본과의 물류가 편리한 동해안 지역을 물색하던 중 흥남지역을 선정했다.


일본 자본의 흥남 개발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그 규모보다도 하나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이 징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일본질소는 토착민들을 추방한 땅 위에 단지 발전소와 공장만 건설한 것이 아니라 학교, 병원, 공급소(백화점), 경찰서까지 제공했다. 흥남면은 공장 설비 및 부지의 확장과 함께 1년 만에 흥남읍으로 승격하는데, 놀랍게도 흥남읍의 초대 읍장은 일본질소 창업자인 노구치 시타가우 자신이었다.


원래 비료공장으로 출발했던 일본질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화약과 금속 제련 부문 등 군수 공업 분야에 진출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을 뒷받침했다. 전시 비상 상황에서 화학 물질을 취급하는 비료 생산 시설이 군수공장으로 전용되는 것은 결코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생산 분야(화약, 마그네슘, 인조석유 등)가 확충되어 노구치 콘체른의 규모는 더욱 비대해졌다. 일제는 국가 내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전쟁 수행에 집중시키는 이른바 고도국방국가모델을 입안하고 식민지 조선을 병참기지로 배치했으며, 이에 따라 조선 관북 지역에 조성된 일본질소 콘체른의 거대한 중화학공업 인프라는 곧바로 군수물자의 생산 및 공급 기반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노동력의 수요가 증대해가는 와중에, 일본 청년들이 대거 징병으로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일본인 노동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일본인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질소는 총독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조선인들을 집단으로 모집·동원했다. 그 결과 콘체른 내 노동 인구의 민족 구성은 빠르게 역전되었다. 1932년 당시 흥남공장 전체 노동자 중 일본인이 70%였으나, 전쟁 말기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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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숭배론 / 의상철학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69
토머스 칼라일 지음, 박지은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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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번역자가 수년간 공력을 들여 번역해놓으면 눈 하나 까딱않고 해설까지 베껴서 헐값에 출판하는 허접한 관행이 이 나라 출판시장을 말아먹는구나. 자존심 없는 장사꾼! 부끄럽지 않은가? 별 하나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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