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여자와 단둘이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상황과 그토록 사고 싶었던 절판본을 책방에서 발견하게 되는 상황 중에 딱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후자를 선택하겠다. 지금까지 살았던 과정을 되돌아보면 절판본을 운 좋게 발견하는 성공률이 짝사랑하는 여자와의 데이트가 성사되는 성공률보다 월등히 높았다. 관심 있는 여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그런 거(?)는 내 삶에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지금은 여자보다는 책 읽는 시간이 좋다.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라는 드라마 제목처럼 절판본을 찾는 것도 기적이 필요하다. 책방이나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책이나 비싸서 못 사는 책을 싸게 살 때가 있다. 지금까지 책방과 온라인 중고서점을 애용하면서 수차례의 기적을 경험했다. 특히 지난 주말에 절판본을 발견했던 기적 같은 일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이다.
기적의 발단은 책을 주제로 한 글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에 <시사IN>에 게재된 박태근 인문MD의 글을 우연히 읽었다. 글의 제목은 「그때 그 시절의 ‘베스트셀러’들」.(글 제목을 클릭하면 박태근 MD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한도전 토토가’로 1990년대 유행가를 따라 불러보는 추억에 공감했듯이 1990년대 베스트셀러가 진열대를 차지했던 서점의 풍경을 되돌아보면서 출판 및 독서문화의 향수를 느껴보는 글이었다. 박태근 MD는 1990년대에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던 독특한 성격의 베스트셀러로 《월리를 찾아라》를 언급했다.
200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월리를 찾아라》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수준 높은 외국 그림책이 많이 나오지만, 199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그림책을 꼽으라면 단언 《월리를 찾아라》가 되겠다. 책을 멀리하는 아이의 책장에 한 권쯤은 꽂혀 있을 정도로 어린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월리를 찾아라》를 펼치는 순간, 공부할 때 생기지 않았던 집중력이 갑자기 생겨난다. 요즘 아이들은 각종 게임과 어플이 가득한 최첨단 장난감 스마트폰이 없으면 하루라도 못 산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 눈과 머리를 모으고 월리를 찾아대던 시절이 있었다. 《월리를 찾아라》 는 단순히 숨은 그림을 찾는 그림책이 아니다. 아이들의 눈과 머리를 즐겁게 해주는 멋진 장난감이었다.
월리는 1987년에 영국의 삽화가 마틴 핸드포드의 펜에 의해 탄생했다. 대교출판을 통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다, 1990년대에 태어난 세대는 대교출판에서 나온 《월리를 찾아라》를 읽었다. 2008년에 예꿈이라는 출판사에 재출간되었지만 절판되었다. 영국과 호주에서는 월리로 알려졌지만 나라마다 이름이 다르다. 미국에서는 왈도, 우리나라와 노르웨이는 윌리라고 부른다. 대교출판에 처음 나왔을 때는 ‘월리’라고 표기했는데, 예꿈출판사에 재출간되면서 ‘윌리’로 개명되었다. 사실 예전에 월리를 윌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월리라는 발음이 지금도 여전히 생소하다.
월리 열풍에 힘입어 TV 만화 시리즈로도 나왔는데 이십년 전에 KBS 2TV에 만화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만화 에피소드 중간에 월리가 숨겨진 그림이 나오는데 시청자들도 월리를 찾아보는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시간 관계상 그림을 잠깐 몇 초만 공개했는데 월리를 찾으려고 TV 브라운관에 얼굴을 바짝 갖다 대다가 어머니한테 혼나기도 했다. 그 당시 TV는 요즘처럼 거대한 HD 화면이 아닌 아날로그 화면이라서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월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화가 끝나고 나면 월리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월리는 숨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월리를 찾아라》에 관해서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어렸을 때 《월리를 찾아라》를 사지 못했다. 엄마에게 책을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끝내 사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림만 있는 책이 학습 발달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서 《월리를 찾아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친구와 로봇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노는 것보다는 《월리를 찾아라》를 보는 것이 좋았다. 친구의 집에 가면 친구가 가진 장난감을 탐내는 것이 당연한 건데 나는 《월리를 찾아라》를 갖고 싶었다.

온라인 중고서점에 판매되는 월리 시리즈의 최저 가격이 15000~20000원대이며
제일 비싼 가격으로 40000원을 넘는다.
내 마음속에 잔불로 남아있던 어린 시절 책에 대한 소유욕이 다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월리를 찾아라》의 중고가가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라딘 중고샵에 검색을 해봤다. 세상에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만 원 이하의 가격으로, 그것도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 두 권이 중고샵에 있는 것이다. 두 권의 책 상태가 ‘최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주문했다.

어제 주문한 책을 받았다. 15년 만에 추억의 책을 만져보게 되었다. 비록 내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책은 아니었지만, ‘날 찾아봐라!’라고 말하듯이 해맑게 웃는 월리의 얼굴이 무척 반가웠다. 눈 빠지도록 월리를 찾았을 땐 실실 웃는 월리의 얼굴이 얼마나 밉상이었던지. 깨알같이 그려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월리만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월리는 얄밉게도 어린 독자에게 적지 않은 미션을 부여한다. 월리의 여자친구 웬다, 마법사 할아버지, 강아지 우프, 월리를 괴롭히는 우드로를 찾아야 하고, 월리가 여행 중에 잃어버린 소지품들도 찾아야 한다. 이걸 다 찾으려면 족히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월리보다 제일 참기 힘든 캐릭터가 강아지 우프다. 우프는 빨간 줄무늬 꼬리만 드러낸 채 숨어 있다.

만약에 월리 시리즈가 다시 나온다면 아이들의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의 자리를 뺏을 수 있을까? 서글프지만 월리가 예전의 명성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집중력을 쏟아낸다. 학습 능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시력을 떨어뜨린다. 안구가 움직이는 횟수가 적고, 너무 한곳에만 향하면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 벌써 시력이 나빠서 월리처럼 안경을 쓰고 다닌다. 《월리를 찾아라》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눈이 피로해서 시력에 안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인내심, 관찰력을 높이는 데 도움 된다. 나는 월리 시리즈가 아이들보다는 시력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는 중장년층이 많이 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력 저하를 예방하려면 안구 운동을 자주 해야 한다. 즉, 안구를 상하좌우로 자주 움직여야 한다. 어젯밤에 오랜만에 월리를 찾아보니까 눈에 힘이 들어간다. 스마트폰의 존재가 잊힐 정도로 몇 시간동안 월리를 찾으러 그림 여행을 했다. 눈이 피곤해도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월리 덕분에 이십 년 전의 시간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림에 푹 빠져들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이 잡문을 보는 이웃님들도 방 한 구석에 먼지 쌓인 채 잠들어 있을 월리를 찾아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