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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정원 - 안티 - 스트레스 컬러링북 ㅣ 조해너 배스포드 컬러링북
조해너 배스포드 지음 / 클 / 2014년 8월
평점 :
컬러링북을 좋아하는 이웃님들에게 이 졸문을 보냅니다.
“화원이 그리는 것은 자신의 꿈과 욕망과 희로애락일 것입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나온 신윤복의 대사입니다. 이 드라마의 원작자는 조선 시대 화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설정했습니다. 여자로 살고 싶은 신윤복의 꿈과 욕망이 ‘미인도’라는 그림 속의 매혹적인 여성으로 표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비록 원작자의 상상력에 의한 설정이지만 드라마 속 신윤복의 대사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함으로써 스트레스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니까요. 말로 표현하지 못한 속마음을 그림을 통해 나타내면서 안정을 얻고 스트레스를 말끔히 해소하는 것이죠. 비단 화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림을 통해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에 착안해 응용한 것이 바로 미술치료입니다.
미술치료는 창작하는 활동을 통해 마음의 고통이나 정서 불안을 진단하거나 해소하도록 돕습니다. 미술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의학적 치료의 효과를 높이거나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 결과가 나오면서 의술이 닿지 않는 곳을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법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국내에선 의학적 치료의 보조요법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속마음을 표현하면서 심리적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의 치료효과는 과학적으로 정확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현대인들은 정신적인 안정에 큰 비중을 두려고 합니다. 게다가 살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무언가로 인해 자주 어디가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야 하는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면 미술치료 전문가들의 일은 많아질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술치료를 받으려고 집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어졌어요. 집 안에서 직접 혼자서 미술치료를 할 수 있으니까요.
작년 후반기에 서점가를 강타하기 시작했던 ‘안티 스트레스 컬러링북’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들의 지친 마음을 구원하는 책이 되었죠. 촘촘하게 엮인 풀과 나무, 앙증맞은 꽃잎들. 글자와 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섬세한 선들로 이어진, 복잡한 무늬의 일러스트로 채워진 책이 히트 상품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컬러링북 색칠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색칠을 해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색칠놀이 인기는 올해도 여전합니다. 조해너 배스포드의《비밀의 정원》의 인기와 함께 ‘아트 테라피’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사 컬러링북들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동식물 패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풍경, 문양, 패션 일러스트 등 정말 예쁜 일러스트들이 색칠하기 놀이에 푹 빠진 독자들의 취향을 저격하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컬러링북에 알록달록하게 색칠한 그림들을 블로그나 소셜 네트워크에 공개합니다. 저는 처음에 컬러링북 열풍을 지켜보면서 어렸을 때 많이 하던 색칠놀이를 다 큰 어른들이 열광하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몇 달 전에 동생이 《비밀의 정원》을 사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 한 권 살 돈도 없는 형편인데 하는 수없이 몇 달 동안 차곡차곡 모아놓은 알라딘 적립금을 동생을 위해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퇴근하다가 집에 오면 색칠하기에 몰두하는데 그 모습을 보면 마치 한창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렸어요. 제 동생도 화가가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색칠놀이에 푹 빠진 어른이 한순간에 아이가 되는 신기한 효과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색칠하는 동생을 보면서 왜 어른들이 색칠놀이를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드라마 속 신윤복의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컬러링북에 색칠하는 것은 희로애락 그 자체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종이 한 구석에 낙서하거나 아무 뜻도 없는 그림을 그리곤 합니다. 누구에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숨겨 놓은 여러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 순간, 하얀 도화지나 스케치북에 크레파스 색깔을 아무거나 골라서 색칠을 하면 분이 풀릴 때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화가처럼 그림 그리는 솜씨가 없더라도 내 마음대로 그리고 싶거나 색칠하고 싶은 것을 종이 위에 펼쳐놓으면 우리의 의식과 상관없이 스트레스와 긴장이 풀립니다. 약이나 주사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그리기나 색칠하기를 통해서 스스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역동적인 방법인 거죠. 특히 컬러링북이 새로운 미술치료로 주목받고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기존의 미술치료 방식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미술치료를 실시하면 검사자의 지시대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반면 컬러링북은 간단하게 색칠할 재료만 있으면 됩니다. 원하는 색깔을 골라 느긋하게 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무조건 색칠을 한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을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는 컬러링북을 친숙한 미술치료의 한 방법으로 장점을 열거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멈출 줄 모르는 컬러링북 열풍이 조금은 염려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하게, 느긋하게 색칠하면 집중력을 높여서 잡생각을 잊히는 효과만 있을 뿐이지 정신건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요. 컬러링북 열풍이 계속 이어진다면 출판사들은 컬러링북 출판에 열을 올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는 식으로 홍보한다면 누구도 컬러링북을 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친척, 내 주변의 사람들이 컬러링북 한 권 사서 색칠놀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그 유행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드니까요. 컬러링북은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가장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치료제가 아닙니다. 미술치료 전문가들은 지속적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우울증세가 심하거나 정신분열증 환자가 컬러링북에 색칠을 하게 되면 강박증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색칠이 완료된 컬러링북 그림을 보면 한 점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완성된 그림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칠하기 전에 절대로 잊어선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색칠하기.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진 멋진 그림을 원한다면 안티 스트레스 효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컬러링북은 아름답게, 보지 좋게 색칠하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색칠을 통해 아름다운 그림으로 완성하는 것도 좋지만,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 듯한 마음이 앞선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올린 완성된 컬러링북을 보면 ‘나도 저렇게 멋지게 색칠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색칠을 하다 보면 색연필을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어떤 색깔로 칠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나도 모르게 잡생각의 늪에 빠져 버리기 시작하는 거죠.
《비밀의 정원》과 같은 컬러링북은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올해의 책 1위로 선정되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좋은 책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컬러링북이 일시적 열풍에만 기대는 상황이 걱정됩니다. 우리 일상이 얼마나 각박하고 지쳤으면 어른들이 단순한 색칠놀이에 위안을 얻으려고 할까요? 한편으론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한때 암울한 우리 사회의 정곡을 찌르면서 등장했던 캐치프레이즈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드디어 한물갔는가 싶었는데 ‘아프니까 색칠한다’라는 변형된 힐링 캐치프레이즈가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계속 색연필을 손에만 쥐고 있을 겁니까? 색칠놀이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또 다른 치료제는 밖으로 나가서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 권 색칠한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질 거라고 믿지 마십시오. 당신은 플라시보 효과(환자를 안심시켜주는 가짜 약)를 내세운 출판사의 홍보를 너무 믿고 있습니다. 컬러링북을 사는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컬러링북을 좋아할수록 출판사들의 돈독은 오릅니다.
색칠놀이를 좋아하는 독자가 많아졌으니 컬러링북을 만드는 출판사는 앞으로 ‘안티 스트레스’ 같은 얄팍한 홍보 문구와 수식어를 빼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홍보 문구 때문에 수천만 어른들의 마음에 일부러 그늘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스트레스에 어느 정도 내성이 강한 어른들도 ‘안티 스트레스’ 홍보를 의심하지 않고 지갑을 엽니다.
색칠하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컬러링북을 샀거나 살 예정인 분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색칠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색칠하는 것을 따라하고 싶은지 말입니다. 후자가 많을수록 컬러링북 열풍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칠하지 않는 일러스트가 많이 남았는데도 이번에 새로 나온 컬러링북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듭니까? 색칠을 많이 할수록 마음이 편안해서 벌써 몇 권의 컬러링북을 고르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색칠해야 하는 이 사소한 행위만으로 당신의 칙칙한 마음을 화려한 색깔로 완벽하게 덧칠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