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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 -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삶, 2023 세종도서 교양부문
권기석 외 지음 / 북콤마 / 2022년 6월
평점 :
평점
4점 ★★★★ A-
‘보릿고개’란 말이 있다.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지고 새로운 보리를 수확하기 전인 초여름 시기(4~6월)를 뜻한다. 이때는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으며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 MZ세대에게는 까마득한 옛이야기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굶주림이 생존에 위협이 될 수준까지는 아니다. 먹을 게 넘쳐난다. 하지만 여전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돈 없으면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이 무얼 먹고사는지 모른다.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관심도 없다. 대부분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일할 의지가 전혀 없고, 무료 급식소가 제공하는 밥을 받아먹으면서 사는 그들을 비난한다. 잘 먹으면서 잘 사는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된다. 빵을 달라고 외친 시민을 본 프랑스 왕비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왕비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다. 어쨌든 가난한 사람의 식사에 무심한 우리는 프랑스 왕비가 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망언을 가져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집밥이 없으면 편의점에 파는 김밥이나 라면을 먹으면 되지.” 밥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싸고 간편한 김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김밥과 라면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
《매일 같은 밥을 먹는 사람들》은 영양 과잉 시대로 들어서면서 나타난 식사 빈곤 문제에 주목한 책이다. 이 책을 기획한 국민일보 소속 네 명의 기자는 가난한 사람이 집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지 취재했다. 기자가 만난 사람들은 무료 급식 대상자인 노인, 임대아파트에 혼자 사는 중년 남성, 자식과 함께 사는 주부, 고시원에 살면서 국가고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20대 청년 등이다. 이들은 종일 쫄쫄 굶지 않을 정도로 밥을 먹는다. 매일 같은 밥을. 반찬 가짓수는 많아야 세 개. 다 떨어질 때까지 매일 먹는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고기로 만든 반찬은 만들지 않는다. 제철 과일을 사서 먹는 건 그들에겐 사치다. 집밥이 없으면 저렴한 가격의 음식이 나오는 식당이나 편의점으로 향한다.
기자와 인터뷰한 사람들이 직접 차린 밥상이나 하루에 먹은 것들을 찍은 사진은 식품 불안정성(food insecurity) 문제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과제임을 보여준다. 식품 불안정성은 양적 · 질적으로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가난할수록 식비를 아끼게 된다. 그렇게 되면 먹는 음식의 양이 적어지고, 주식 이외의 음식을 충분히 먹지 못한다. 영양학적으로 불균형한 식습관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소득층은 약값과 진료비 부담을 크게 느낀다. 그래서 식비 지출을 줄이려고 하는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건강 상태가 더 나빠진다. 우리나라 저소득층은 이러한 형태의 빈곤에 처해 있다(이 책에 나오지 않은 사회 취약 계층에 속한 장애인, 외국인 근로자, 북한 이탈주민, 의료적 트랜지션[주1]을 받는 성소수자도 매일 같은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식사 빈곤을 겪을 수 있다).
이 책이 보여준 ‘빈자의 식탁’ 사진은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가 아니다.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저소득층에게 동정과 연민의 눈길을 주게끔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오로지 배를 채우려고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다. 헌법에 제시된 기본권은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이다. 사회권은 인간다운 생활을 한 권리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식품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인간은 최소한 배고프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건강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을 권리도 있다. 이제는 식품 안정성과 관련된 사회권 보장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 무료 급식소를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사회 취약 계층에게 양적으로, 질적으로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복지제도가 정착되어야 한다.
※ 주
[주1]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정신과 진단이나 호르몬 치료, 성전환 수술 등의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호르몬 치료와 성전환 수술 비용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트랜스젠더 당사자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관련 도서: 김승섭, 박주영, 이혜민, 이호림, 최보경,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오롯한 당신: 트랜스젠더, 차별과 건강》, 책공장더불어, 2018)
※ 정오표
* 51쪽
복지관에 음식 지원을 신청한 노인은 주말에 인기 많은 대형 쇼핑물 주차장에 들어간 운전자와 같은 신세다.
대형 쇼핑물 → 대형 쇼핑몰
* 136쪽
우리가 얻은 교훈은 가난한 사람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현금이 아니라 음식을 건네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이리저리 돈 나갈 구멍이 많았다. 현금을 손에 쥐어 주면[주2] 식사하는 데 쓰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식비는 늘 의료비와 교육비, 학비에 밀렸다.
[주2] ‘쥐여 주면’이라고 써야 한다. ‘쥐여 주다’는 무언가를 남에게 건네주는 상황일 때 쓴다. ‘쥐어 주다’는 스스로 무언가를 잡았을 때 쓰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