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파티아(Hypatia)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수학자이자 철학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자인 아버지로부터 다양한 학문을 교육받은 수재였다. 성인이 된 히파티아는 학생들에게 기하학과 철학, 천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학 교과서의 주석을 썼다. 이 주석서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히파티아 혼자 수학자 디오판토스(Diophantos)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의 책에 대한 주석서를 썼지만, 안타깝게도 온전한 상태의 문헌이 남아 있지 않다.
히파티아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많은 사람은 그의 끔찍한 최후를 생전 활동보다 더 많이 기억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히파티아를 ‘그리스 최후의 여성 수학자’ 또는 ‘기독교에 희생당한 학문의 순교자’로 평가한다. 알렉산드리아는 과학이나 철학, 기하학 등의 학문을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 있는 학문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불만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히파티아의 지적 활동을 이교도의 소행으로 보기 시작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키릴로스(Kyrillos)는 기독교의 교리를 보호하기 위해 철학과 수학을 이교도의 학문으로 규정하여 배격했다. 키릴로스를 추종한 기독교 광신도들은 마차에 타고 있던 히파티아를 습격해 폭행을 가했다. 그들은 히파티아를 발가벗긴 다음 굴 껍데기로 피부를 벗기는 고문을 자행했다(어떤 고대의 역사가는 히파티아가 키릴로스의 사주를 받은 광신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했다. 히파티아의 피부를 벗길 때 사용한 도구가 날카로운 도자기 파편이라고 기록한 문헌이 있다). 잔인한 고문을 당한 히파티아는 산 채로 불에 태워졌다.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4》 (민음사, 2009)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
후대의 학자들, 특히 계몽주의자와 과학사학자들은 히파티아의 죽음을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된 모든 학문이 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매몰된 ‘암흑시대’의 시작으로 봤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히파티아의 죽음을 성인으로 추대된 키릴로스의 품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라고 평가했다(4권 47장 519쪽). 칼 세이건(Carl Sagan)은 《코스모스》에서 히파티아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마지막 등불을 지킨 여인(58쪽)’으로 소개했고, 그 역시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를 고대 과학이 쇠퇴하기 시작한 ‘암흑시대’였다고 주장했다(662쪽).
작가와 예술가들은 히파티아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비운의 천재’로 묘사했다. 히파티아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 <아고라>는 기독교가 지배한 비이성적인 시대에 맞서다가 희생된 천재 학자의 모습을 재현했다.
* 김정희 《수학 아라비안나이트》 (RHK, 2009)
* 김형근 《아테네 학당: 인류의 위대한 거인들과의 만남》 (영림카디널, 2011)
* 클리퍼드 픽오버 《수학의 파노라마: 피타고라스에서 57차원까지 수학의 역사를 만든 250개의 아이디어》 (사이언스북스, 2015)
* 김홍식 《세상의 모든 지식》 (서해문집, 2015)
* 마이클 J. 브래들리 《달콤한 수학사 1: 탈레스의 증명부터 피보나치의 수열까지》 (Gbrain, 2016)
* 김진용 《수학과 문명의 스케치》 (제2판, 경문사, 2016)
* 이만근 《아라비아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경문사, 2016)
* 줄리아 피어폰트, 만지프 타트 《페미니스트 99》 (민음사, 2018)
* 차길영 《교실 밖으로 꺼낸 수학이 보이는 세계사》 (지식의숲, 2019)
* 신기영 《수학은 자유이다》 (수정증보판, 북스힐, 2020)
히파티아의 죽음은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 중 하나로 알려졌다. 과학 또는 수학의 역사를 다룬 책을 쓴 저자들은 히파티아의 최후에 관한 전설을 인용하면서 그녀를 ‘종교의 광기에 희생당한 학자’로 묘사했다(《수학과 문명의 스케치》, 《수학은 자유다》, 《수학의 파노라마》, 《달콤한 수학사 1》, 《아라비아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아테네 학당》, 《세상의 모든 지식》, 《페미니스트 99》). 몇몇 저자는 히파티아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 중심의 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결국 마녀로 몰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고 썼다(《교실 밖으로 꺼낸 수학이 보이는 세계사》, 《수학 아라비안나이트》).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히파티아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와 이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사실과 다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히파티아는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재능을 모두 가진 특별한 여성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반기독교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을 비판할 때 히파티아를 거론했다.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전설은 기독교를 비판한 계몽주의 사상가와 반기독교주의자의 입맛에 맞게 윤색되었다. 미화된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학자들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온 학문적 유산을 가차 없이 파괴하여 유럽 지성사를 후퇴시킨 원인으로 과학과 철학을 거부한 기독교를 지목했다. 지식을 체계적으로 검증하고 비판하는 회의주의자로 알려진 칼 세이건도 전설을 인용하면서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편파적인 해석을 고수했다.
* [품절] 마리아 드스지엘스카 《히파티아: 고대 그리스가 사랑한 여인》 (우물이있는집, 2002)
체코의 역사가 마리아 드스지엘스카(Maria Dzielska)의 《히파티아》는 기독교를 공격할 때마다 거론된 ‘히파티아 신화’에 가려진 진실을 밝힌 책이다. 마리아는 히파티아를 종교적 광신의 희생자가 아니라 키릴로스와 히파티아의 친구인 로마 제국의 제독 오레스테스(Orestes)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대립에 휘말린 희생자였다고 주장한다. 오레스테스는 기독교인이었다.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관직에 등용된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던 키릴로스는 히파티아와 친하게 지내는 오레스테스가 거슬렸고, 이를 빌미로 히파티아를 이교도로 몰아세워 탄압했다. 히파티아가 죽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된 이후에도 고대 과학과 철학은 발전했다. 그리고 마리아가 쓴 히파티아 전기에 따르면 죽음을 맞이한 히파티아의 실제 나이는 60세였다. 소설과 그림 속에 묘사된 ‘젊고 아름다운(관능적인) 여성’ 히파티아는 왜곡된 전설이 만들어낸 이미지다.
* [절판] 로널드 L. 넘버스 엮음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뜨인돌, 2010)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는 ‘과학을 배척한 기독교’라는 오래된 통념을 반박하는 학자들이 모여 만든 책이다. 이 책에 히파티아의 죽음을 고대 학문이 쇠퇴하는 시점으로 보는 해석에 반론을 제기하는 내용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의 글쓴이는 마리아의 히파티아 전기를 인용했다.
* 김용관 《수냐의 수학 영화관: 영화로 수학 읽기, 수학으로 세상 읽기》 (궁리, 2013)
영화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거나 간접적으로 묘사된 수학과 수학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은 《수냐의 수학 영화관》에 히파티아의 생애와 학문적 성과를 소개한 내용이 나오는데, 저자는 히파티아가 기독교인들과 원만하게 지냈던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의 죽음을 기독교에 의한 희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163쪽). 국내에 출간된 교양 과학도서의 저자들은 히파티아 전설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인용했다. 하지만 《수냐의 수학 영화관》의 저자(자신을 ‘수학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했으며 ‘수냐’는 저자의 별칭이며 ‘비어 있음’, 즉 0을 뜻하는 인도어다)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과장된 해석에 의해 부풀려진 전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히파티아의 최후과 관련된 전설이 너무 많이 알려지다 보니 일부 페미니스트는 히파티아를 ‘남성 중심 기독교’의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 또한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 히파티아는 젊은 학생들의 스승이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모여 줄을 섰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고위직 관리나 성직자가 되었고, 히파티아를 직접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히파티아를 남성 중심의 학계에 침범한 여성으로 보거나 그의 재능을 받아들이지 못한 기독교인 남성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아닌 ‘현자’로 살아온 히파티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히파티아를 단순히 성차별을 받으면서 살아온 여성으로 볼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히파티아 전설’과 그의 죽음을 바라본 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공통으로 ‘젊은 여성’, ‘순교’, ‘희생’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작가와 예술가들은 히파티아의 여성성과 관능적인 매력을 부각했다면, 학문의 자유를 중시한 학자와 사상가들은 히파티아를 기독교에 맞서다가 희생당한 최후의 천재로 만들었다. 그들은 곳곳에 비어 있는 형태로 전해져온 알렉산드리아 현자의 생애에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들을 채워 넣었다. 결국 히파티아의 생애에 대한 진실은 완전히 잊혔다. 역사적 진실과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실하기 짝이 없는 가공된 전설만 남게 되었다.